창작자의, 창작자에 의한, 창작자를 위한(2)

역시... 현장이지 말입니다

by 대기만손

스토리 사업에는 발굴된 원천 스토리를 사업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피칭 행사도 있었다. 피칭(pitching)은 본인의 아이디어나 프로젝트를 기업이나 관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뜻한다(피칭에 대해서는 따로 더 세부적으로 다루겠다). 2012년까지는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에서 전년도 스토리 공모대전 수상작의 피칭만 진행을 했었다. 하지만 2013년부터는 부국제를 비롯해 미국과 일본, 중국 3개국에서 진행되는 해외 피칭과 연말에 신설된 스토리마켓에서 진행되는 피칭까지 수많은 피칭 행사가 신설되었다. 김춘수 시인이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했던 것처럼, 바이어가 스토리를 픽(pick)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주지 않으면 제 아무리 좋은 스토리라도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바이어들을 만날 수 있는 피칭 행사는 스토리를 콘텐츠로 사업화시키기 위한 가장 유용한 징검다리 중 하나였다.


피칭 행사의 경우 단순히 행사만 진행하는 게 아니라 사전에 창작자들에게 피칭 교육도 시켜야 한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글만 써봤지 자신의 작품을 수많은 바이어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제된 발표 형태로 소개해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칭 전문가를 멘토로 모셔 창작자들의 피칭 준비를 도왔다. 한 공간에 모여서 기본적인 교육을 진행하고 서로의 피칭에 대한 장단점을 피드백해 주는 것은 물론, 멘토들은 개별로도 담당 창작자의 피칭 자료(PPT)나 스크립트, 피칭 자세 등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당시 스토리 사업에서 진행한 모든 피칭 행사를 담당했던 나는, 피칭 교육 때마다 매번 교육 장소로 출장을 가서 진행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스토리 사업에 참여하는 창작자들은 보통 생계를 위한 본업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피칭 교육은 저녁이나 주말에 진행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평일은 야근이 잦았고, 주말까지도 피칭 교육이 진행되는 강의장에 있다 보니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렇게 까지 모든 피칭 교육을 직접 가서 관리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신입인 내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강의장에서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는 것이 그저 즐거웠던 것 같다. 딱히 '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달까? 피칭 멘토들은 대부분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영화계나 방송계 피디분들이 많았기에 그분들과 관계를 맺고 얘기를 나누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고, 창작자분들과도 밀착해서 자주 소통하며 이 분들이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이 산업에 몸담고 있는지 이해해 가는 것은 신입인 나에게는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피칭 교육 현장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그렇게 주야장천 여러 피칭 교육과 행사를 다니며 피칭이란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아갔다. 여기에 대해 2014년 3월에 있었던 일본 피칭 행사를 준비하면서 뿌듯했던 일화가 하나 있다. 그때 나는 2012년 스토리공모대전 수상작을 일본 바이어를 대상으로 소개하는 피칭 행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총 5명의 창작자가 참여를 희망해 이들을 대상으로 피칭 교육을 진행했다. 창작자들이 부산에서 피칭은 해봤지만 해외 피칭은 처음인 상황, 순차통역임을 고려했을 때 피칭은 그 어느 때보다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준비를 했어야 했다.


창작자들에게 담당 멘토를 매칭해 본격적으로 피칭을 준비하고 있던 어느 토요일 오후, 스토리창작센터에 모여 마지막으로 피칭 자료를 다듬고 있었는데 한쪽에서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SF 스토리로 피칭에 참가하는 작가님과 담당 멘토였다. 요는 작가님은 자신의 스토리를 바이어가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계관에 대한 설명의 비중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담당 멘토는 거기에 반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SF 장르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피칭은 짧은 시간에 작품의 매력을 최대한 보여줘야 하기에 세계관에 대한 지나친 설명은 독이 될 수 있다. 작가님이 원하는 바는 독이 될 상황이라 조정이 필요했지만 작가님은 요지부동이었고 담당 멘토는 결국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미 해도 저문 상황. 다음날 오전까지는 최종 자료를 넘겨야 했기에 이날 어떻게든 끝을 봐야 했다. 작가님 혼자 피칭 자료를 손 보기 시작했는데 뒤에서 지켜보니 내용이 여전히 난해했다. 그래서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작가님. 작가님 피칭을 들을 일본 바이어들은 통역 시간 포함하면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작가님 작품을 이해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은 세계관 설정 듣다 보면 피칭이 끝날 판이라 꼭 수정이 필요합니다. 저 같은 일반 대중이 이해하고 재밌다고 느낄 정도면 일본 바이어들도 그럴 가능성이 높으니 저희 같이 수정하시죠. 그간 제가 작가님 작품은 계속 봐왔으니 제가 스크립트 한번 다듬어 볼게요. 한번 봐주셔요"


그렇게 내가 직접 피칭 자료를 손 보기 시작했고 같이 준비하는 다른 작가 몇몇도 스크립트를 같이 봐주면서 피드백을 주었다. SF 세계관의 핵심은 살리되 어렵지 않고 간결하게 초반부를 다듬었고 이를 본 다른 작가님들의 반응이 좋다 보니 이 작가님도 조금씩 내가 수정한 스크립트에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속도가 붙으며 한참 동안 스크립트를 다듬고 피칭 자료의 비주얼도 거기에 맞게 수정을 했는데 결국 밤을 꼴딱 새우고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다음날 오전 8시인가에 최종 파일을 보냈던 것 같다. 정말 하얗게 불사른 밤이었다. 작가님을 비롯한 같이 밤을 새운 동지들과는 근처 국밥 집에서 뜨끈한 국물에 가볍게 반주를 하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때 함께한 작가님들은 나 같은 공무원(실상은 회사원이지만)은 처음 봤다며 엄지를 치켜세워줬다. 이 날은 정말 뭐라 말하기 힘든 그런 벅찬 감정을 느꼈던 날이었다.

일본 피칭에 참여했던 한 작가님이 내게 보내준 메일


당시 나는 미생으로 치면 한석률 같은 캐릭터였던 것 같다. 그렇게 저녁이고 주말이고 피칭 교육 강의장에 나가 진행 과정을 함께하고 멘토와 창작자들과 교감하고 싶었던 건, 정책 수요자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갈망이지 않을까 싶다. 멋모르는 신입의 패기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그때만 해도 몸으로 때우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늘 현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역시... 현장이지 말입니다."

출처: 웹툰 <미생>

그렇게 창작자의, 창작자에 의한, 창작자를 위한 마음가짐으로 스토리 사업에 영혼을 갈아 넣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했었고 이후 내가 어떤 분야에 가도 그 분야의 대상 고객을 중심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된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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