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이후, 신뢰를 다시 세우는 세 가지 기준
요며칠 기괴한 사건 뉴스가 보도됐다.
올해 초 서울 강북구 일대 숙박업소에서 20대 남성 두 명이 음료를 마신 뒤 잇따라 사망한 사건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사망자들의 몸에서는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약물이 다량 검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 음료에 약물이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20대 여성 A씨를 특정해 구속했다. 현재 적용된 혐의는 상해치사와 마약류관리법 위반이며, 살인 혐의 적용 여부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은 지난해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A씨가 교제 중이던 남성에게 약물이 섞인 음료를 건넸고, 그는 의식을 잃었으나 생존했다. 이 일은 경찰에 진정 접수되었고, 당시 A씨는 그 사건의 ‘피진정인’이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수사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A씨가 세 명의 남성에게 약물이 든 음료를 제공한 정황이 드러났고, 이 중 두 명은 모텔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경찰은 약물 제공이라는 공통 방식, 약물 투여량 증가 정황, 사전 준비 가능성 등을 토대로 계획범행 여부를 포함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갈등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음료를 건넸다”는 취지로 진술하며 살해 의도는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은 이 사건의 당사자인 A씨를
‘연쇄 사망 사건 피의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기사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연쇄사망’이라는 단어에 위화감을 표시했다.
“연쇄사망이라니. 왜 그렇게 돌려 말하는가.”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사건의 본질과 의미의 무게를
제대로 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언어가 사건의 본질을
얼마나 정확히 전달하는지를 민감하게 느낀다.
때로는 그 안에서 의도나 프레이밍을 감지하기도 한다.
한편 언론은 단정이나 낙인에 따른
법적, 사회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중립 보도를 지향한다.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신중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립이 사건의 본질을
희석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다.
이번 사건에서 사용된 표현인
‘연쇄사망’에서 ‘사망’은 결과다.
그러나 사건의 핵심은
위험한 약물이 섞인 음료를 반복적으로 제공한 행위에 있다.
먼저 행위가 있어야 그 결과가 뒤따른다.
중립은 단정하지 않는 태도이지,
행위를 지워버리는 태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중립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사건의 구조를 분명히 드러내는 표현은 무엇일까.
‘연쇄 약물 투여 사망 사건’
이런 표현은 '원인 행위'인 약물 투여와 '결과'인 사망을 함께 드러낸다.
이렇게 하면 중립을 지키면서 사건의 구조를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건이 특히 공포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건의 진정한 공포는
명시적인 폭력이 없음에 있다.
위험 신호가 없었던 일상적 장면에서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했다는 사실.
그 사실은 일상적 사회 관계의 기본 전제,
즉 기본적인 사회 신뢰 감각을 흔든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 방식이
얼마나 취약한가 하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일상에서
기본적인 신뢰를 전제로 살아간다.
모르는 사람과 같은 시공간 안에서
함께 협력하여 일하기도 하고,
낯선 사람에게 친절과 인심을 나누기도 한다.
그런 모든 장면은 암묵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전제.
그 전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순간,
공포는 개인 감정을 넘어 사회적 감정이 된다.
물론 이렇게 보기 드문 극단적인 범죄는
극단적으로 비일반적이기 때문에 뉴스가 된다.
바꿔 말하면, 뉴스를 탄 극단적인 범죄는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이나 행태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런 극단적인 예외를 일반 대다수로 확장하는 순간,
공포는 통찰이 아니라 불신으로 변한다.
공포는 양면적이다.
공포에 따른 경계심은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그러나 성별, 계층, 지역, 세대에 대한 일반화로 번지면
사회 공동체를 병들게 하고 분열시켜 갈라놓는다.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두 방향으로 기울기 쉽다.
서로를 더 의심하거나,
제도를 더 통제적으로 만들거나.
전자는 관계를 메마르게 하고,
후자는 자유를 잠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먼저 받아들여야 할 전제가 있다.
1.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2. 극단은 극소수의 확률로 언제나 발생한다.
3. 악은 개인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4. 그러나 그 악을 관리하고 억제하는 책임은 제도에 있다.
또한 우리는 다음의 대비 관계를 유의해야 한다.
개인의 일탈을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두면
사회 구성원은 반복적으로 상처를 입고 사회는 삭막해진다.
반대로 모든 악을 사회 구조의 탓으로만 돌리면,
개인의 책임은 가려지고 사라진다.
이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조건이고,
이 긴장 속에 사회적 신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신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신뢰는 순진무구함이 아니다.
완전한 안전이 보장된 세계라면
신뢰라는 개념은 필요가 없다.
알고 있는 사람은 믿을 필요가 없다.
믿음은 언제나 알 수 없음의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신뢰는 언제나 배신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즉,
신뢰는 낙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배신의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의사결정에 가깝다.
신뢰에 대하여 명심보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을 의심하면 쓰지 말고,
사람을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
신뢰는 배신의 위험을 제거할 수 없기에,
그 위험을 감수할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런 기준이 없으면,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쉽게 신뢰를 줄이고 싶어진다.
신뢰를 줄이는 것은 쉽다.
더 적게 믿고, 더 많이 의심하면 된다.
그러나 줄어든 신뢰 위에서 공동체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신뢰가 줄어들수록 공동체는 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아니,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위한 기준을 더 엄격하게 정의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신뢰를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 위험을 인식하되 전반으로 확대하지 않는 사고와 태도다.
극단은 극소수로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악을 대다수의 모습으로 투사하면,
투사 받은 대다수는 사회적 관계에서
말없이 선을 긋고 거리를 두거나 이탈한다.
여기엔 남녀, 계층,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단계에 이르면
제도적인 대응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사회는 무심한 개인들로 채워지며
말없이 소멸을 향해 가게 된다.
둘째, 신뢰를 감정이 아니라 기준 위에 세우는 태도다.
책임 의식, 자기 통제력,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지키는 태도는
시간과 사건의 변화 속에서도 신뢰를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셋째, 개인의 성찰과 제도의 정밀함을 함께 강화해야 한다.
개인은 성찰로써 악에 대한 냉철한 방어력을 가져야 하고,
제도는 악에 대하여 정밀해져야 한다.
악은 개인의 선택에서 발생하지만,
그 선택이 반복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은 사회의 몫이다.
이 세 가지 기준은 언뜻 냉정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인간다운 사회를 지키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극소수의 극단적인 사건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믿음에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엄격한 기준으로 믿어갈 것인가.
공포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기준을 세울 것인가.
개인과 사회는 결국 같은 선택 앞에 서 있다.
신뢰를 줄이는 것은 가장 쉬운 선택이다.
그러나 신뢰를 다시 세우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선택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어려운 선택이
개인과 공동체를 살아 있게 만든다.
공포가 삶을 움츠리게 할 때,
기준은 삶을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신뢰가 반복적으로 재건될 때
비로소 사회는 살아갈 만한 공간이 된다.
2026년 2월 15일
Son the writer (aka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