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을 회복하는 관계만이 지속 가능한 이유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고심한다.
그리고 그런 고심의 대부분은
‘내가 손해 보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은근히 상대방의 덕을 보고 싶어 한다.
즉,
누구라도 자신은 손해 보고 싶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서는 조금이라도 더 얻고 싶어 한다.
그래야 관계 안에서
‘이익’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인간관계는
언제나 딜레마에 빠진다.
인간의 이기심은 자연 본능이지만,
그런 이기심이 기준이 되는 순간
관계는 피로해진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어릴 적 읽었던 붓다의 법구경에는 이런 말이 등장한다.
“자기보다 낫거나 동등한 사람을 찾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다.”
'이 문장은 왜 이리 삭막하지?'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는 인간관계의 냉혹함을 느꼈다.
‘자기보다 낫거나 동등한 사람만 찾으라니.
그렇다면 부족한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
관계에서 자비는 가능한 걸까.’
나는 붓다의 말에 의아했다.
붓다도 그러지 않았던가.
자신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말라고.
생각하라면서 말이다.
관계에서 오직 자기 이익만을 노린다면,
그것은 진흙탕 속에서 뒹굴면서
자신만 깨끗해지길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이중잣대는
관계를 건강하게 오래 작동시킬 수 없다.
반드시 데이고 상처 입으며,
결국 ‘내가 손해를 봤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느 인스타 웹툰 명대사는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모두에게 사랑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너에게만은 반드시 받겠다.'
'아니, 대체 왜 내게?'
이런 피로 끝에,
사람들은 관계에 ‘공정함’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도 손해 보기 싫고,
너도 손해 보기 싫다.'
그 결과, 사람들은
반반 대칭을 공정함의 기준으로 삼는다.
부담도 반반,
책임도 반반,
감정도 반반.
겉으로는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준은
관계의 실제 작동 방식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
관계는 본질적으로
대칭적일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누구와 관계를 맺든,
불균형의 발생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불균형 부담의 비는
대략 '자신:상대방=3:2'를 넘기 어렵다.
3:2는 양쪽 모두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다.
부담 수준 조율에 따른 역할 교체도 수월하다.
약간만 덜고, 약간만 더 부담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2:1 이상으로 벌어지면
많은 사람은 그것을 불공정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관계는 그때부터 힘들어지거나
균열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것은 개인 관계에서도,
사회 구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질문은 여기로 수렴한다.
관계에서 불균형을 피할 수 없다면,
무엇이 그 관계를 살리고,
무엇이 그 관계를 망가뜨리는가.
여기서
‘대칭’과 ‘균형’이라는
두 갈래의 길이 등장한다.
관계는 대칭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균형을 회복하려는 의지로 유지된다.
불균형은 언제든 생긴다.
문제는 그 순간
‘누가 더 손해인가’를 따지는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를 묻는가다.
균형은 반반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인식하는 태도다.
오늘의 3:2가
내일의 2:3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
그 신뢰가 없다면
어떤 관계도 오래 갈 수 없다.
균형은 숫자가 아니라 방향이다.
균형을 회복하려는 관계에서는
불균형이 생겨도 그것을 일시적 현상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할을 나누거나 바꾸고,
서로의 사각지대를 보완하며
불균형을 균형 쪽으로 되돌린다.
그들의 관계는
정지된 평형이 아니라
움직이는 균형이다.
반면, 균형 의지가 없는 관계에서는
눈앞의 불균형이 곧바로 분노와 원망으로 전환된다.
그들은 즉시 일괄적인 반반 대칭을 요구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의 대칭만을 내세운다.
자신의 이익에 맞는 것만을
공정과 정의라 부른다.
그 순간,
관계는 협력이 아니라
치열한 계산 싸움이 된다.
그런데도 어쩐 일일까.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균형보다 대칭을 선택한다.
이는 상대방을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은
생각과 번거로움과 시간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그런 활동은
돈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 걸 하면 내가 손해 보는데
상대가 과연 나중에 돌려줄까?’
이런 의심이 생기고 불신으로 굳어진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숫자로 딱 맞아떨어지는 대칭은
공정함의 증거처럼 보인다.
자본의 논리는 맥락보다 숫자를,
윤리보다 등가를 선호한다.
그 결과,
등가 교환이라는 명목 아래
타인의 희생과 고통은 쉽게 가려진다.
"등가교환했는데, 내가 무슨 책임?"
"너는 내게 시간당 노동을 제공했고,
나는 네게 시간당 임금을 제공했다.
그렇게 대칭을 이뤘으니,
우리 관계는 윤리적이고 공정하다."
그러나 이런 숫자 대칭이 관계의 기반이 되면,
불균형 속에서 균형을 회복하는
협력과 신뢰의 경험 자체가 사라진다.
결국 관계의 윤리는
다음 질문으로 압축된다.
'이 관계는 불균형이 생겼을 때,
균형을 회복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살아 있다.
그러나 그 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미 위험 신호가 켜진 것이다.
고착된 불균형은
결국 지배, 원망, 폭력으로 변형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증오로,
호의는 통제로 변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2026년 2월 9일 작성
퇴고 보완 후,
2026년 2월 19일 업로드
Son the writer (aka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