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관계에서 끊임없이 계산하게 되었나

윤리 대신 숫자가 관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

by Son the writer

요즘 인간관계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장면이 반복된다.

관계는 시작되기 전부터 계산되고,

유지되는 동안에도 계산되며,

끝난 뒤에도 손익 정산이 이어진다.


“내가 해준 게 얼만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결국 손해 본 건 나잖아!”


이런 말들은 이미 낯설지 않다.

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SNS 공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더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손해를 봤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이런 손익 계산은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라지지 않는다.


관혼상제에서는 오히려 더욱 정교해진다.


“세월의 친분이 얼만데,

이만큼은 주거나 받아야 서운하지 않지.”


이런 현상은 대외 인간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비롯한 여러 상담 프로그램에서,

이혼 전문 변호사, 작가, 상담가들이 ‘엑셀 이혼’을 언급한 바 있다.


유퀴즈_엑셀이혼_유재석.jpg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엑셀 이혼 설명 장면 캡처


엑셀 이혼은 부부가 생활비, 가사노동, 시간 사용 등을

엑셀로 항목화하고 수치로 관리하다가

결국 관계 자체가 파탄에 이르는 현상을 의미한다.


유퀴즈_엑셀이혼2.png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엑셀 이혼 설명 장면 캡처2


그런 부부들은 돈, 시간, 노동을

반반 대칭이나 등가교환의 기준으로 맞추려다 보니

갈등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유퀴즈_엑셀이혼3.jpg 디클 유튜브 영상 썸네일 캡처, '엑셀 이혼? 2030 이혼의 큰 원인'


“공동생활비용 반반씩 부담해.”


“내가 청소에 1시간을 투자했는데,

왜 너는 1시간을 안 써?”


“네 친정 가는 길에 내가 운전하니까,

기름값은 네가 내.”


“시댁에 용돈 20만원 보냈지?

그럼 친정에도 20만원 보내.”


이런 식이다.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라는 천륜 관계에서도

조건과 손익을 따지는 장면이

점점 흔해지고 있다.


“내가 밖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왔는데,

너희는 집에서 감히 편히 쉬고 있어?”


“엄마, 내가 성적 올리면 뭐 해줄 거야?”


“너 키우느라 돈 많이 들었다.

한 달에 용돈 얼마씩 꼭 부쳐라.”


"집값 좀 보태주세요.

우리 결혼하고 싶어요."


“그런 배우자 만나라고

널 키운 줄 아니?”


이런 말들이 오간다.


사람들은 관계에서 공정함과 정의를 원한다.

노력에는 보상이 따르길 바라고,

일방적인 희생은 피하고 싶어 한다.

이 자체는 틀린 요구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공정과 정의는 점점

각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언어로 변해간다.


공정은 자기 요구의 기준이 되고,

정의는 자기 손익을 방어하는 명분이 된다.


그럴수록 타자와 사회의 손해와 고통은

쉽게 고려 대상에서 밀려난다.


이런 상태에서는

인간관계가 피로해지고,

공존과 공생은 어려워진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지만,

극단적인 이기심을 가진 상대와는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계의 문제 원인은

인간의 이기심 그 자체일까?


조금 더 사람 심리의 본질로 들어가 보자.


사람은 누구나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고,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시대와 무관한 인간의 기본값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패시브 속성이다.


그러므로 초점은

이기심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인간의 이기심을

어떤 방식으로 다뤄왔는가’로 옮겨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활용하고 제어해 온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공동체 사회 구조 아래에서

관계는 주로 생존과 공존을 위한 윤리를 기반으로 유지되었다.


반면 자본주의 이후의 산업 사회에서

관계는 점점 윤리에서 이익 실현을 위한 계약으로 옮겨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약은

실제로 공정한지와는 별개로,

명목상 ‘등가교환’을 전제로 한다.

가성비, 성과, 보상, 조건, 탈퇴 규정이 중심이 된다.


그 결과

관계는 더 이상 윤리의 문제라기보다

계약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공정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체로

‘계약상의 공정함’이라 부를 수 있다.

숫자와 조건, 대칭과 비율로 정의되는 공정함이다.


현 시점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을 깊이 체화한 상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계산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정함이란 원래 이런 것이었을까.


인류가 오랫동안 이해해 온 공정함은

오늘날이 요구하는

‘지금 이 순간의 완벽한 대칭’이 아니었다.


애초의 공정함은

상황과 역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불균형을

다시 균형 쪽으로 조정하려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날의 공정함은

이렇게 작동한다.


“지금 이 순간, 정확히 반반인가?”


당장의 대칭,

즉각적인 균형이 기준이 된다.

잠시라도 기울어지면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의 공동체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쌓일수록

능력과 운, 환경의 차이로 인해

소유와 부담은 필연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그들은

불균형의 발생 자체를

곧바로 불공정으로 보지 않았다.


문제는 불균형이 아니라,

그 불균형이 굳어지고

세습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불균형을 다시 균형으로 되돌렸다.


유대교 전통에 등장하는 희년(Jubilee, 요벨)

이러한 사회적 균형 감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약 50년을 주기로

부채를 탕감하고 토지를 반환함으로써

사회를 일정 부분 초기화했다.


완전한 평등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불균형이 영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이는 불균형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균형의 세습을 차단하려는 사회적 윤리였다.


반면 오늘날 관계의 공정함은

매 순간을 숫자로 고정하려 한다.


지금 당장 대칭이어야 하고,

앞으로도 계속 대칭이어야 한다.

잠깐의 기울어짐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공정함의 본래 모습은

고정된 대칭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불균형을 조정하고

보완하는 실행의 윤리에 가까웠다.


즉, 애초의 공정함은 숫자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균형을 회복해 가는

유연한 사고와 태도의 문제였다.


그런데 요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반반 대칭 계산이 관계를 공정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반반 대칭 계산은

협력과 신뢰를 형성하지 못하고

오직 손익을 관리할 뿐이다.


손익의 증명, 확인, 기록.

이 모든 것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계가 깨졌을 때를 대비한

자료 정리에 가깝다.


그래서 반반 대칭 계산이 많아질수록

관계는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종료될 준비가 된 상태가 되어

더욱 위태로워진다.


이는 특정 부부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관계가 계약 논리로

완전히 전환되었을 때 나타나는

하나의 사회적 징후에 가깝다.


관계는 본래 대칭 계약일 수 없다.


사람은 각자 다른 시간, 다른 조건,

다른 부담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관계를

‘항상 동일한 부담, 동일한 기여’로 맞추려는 강박은

결국 차이를 지워버리는 폭력이 된다.


각자의 차이에 의해

불균형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불균형이

영원히 고정되는 순간,

관계는 반드시 파열된다.


이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애초의 엄정함’이다.


관계가 건강하려면 필요한 것은

대칭이 아니라,

불균형 속에서도

균형을 향해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다.


이런 균형 회복은

‘완벽한 평등’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인류 역사상 이뤄진 적도 없고,

앞으로도 이뤄지기 어렵다.


완벽한 평등을

절대 기준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입장의 충돌에 부딪힌다.


그것은 단순한 이해관계 문제뿐만 아니라,

‘시선’의 충돌을 가져온다.


특히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상대적 강자와 약자의 입장이 그렇다.


약자는 강자가 누리는 결과에 주목하면서

성과와 지위를 함께 나누는 것이 평등이라 여긴다.


반면에 강자는

그 성과를 위해 감당했던 책임과 위험,

시간과 고통까지 함께 나눠야

비로소 평등이라고 말한다.


약자는 ‘결과의 평등’을 말하고,

강자는 ‘부담의 평등’을 말한다.


그러나 완벽한 평등은 그 둘을 동시에 요구한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쉽게 파열을 낳는다.


약자는 부담의 무게를 두려워하고,

강자는 결과를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결과만 평등하고

부담은 평등하지 않다면

그것은 평등이 아니라

한쪽이 책임을 감당하고

다른 한쪽이 결과만을

더 많이 가져가는 구조일 뿐이다.

이는 공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부담만 평등하고

결과는 강자나 약자 어느 한쪽에 고정된다면,

이 또한 공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반반 대칭이라는 방식으로

완벽한 평등을 구현하겠다는 발상은

애초에 구조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삶은 매 순간 같은 항목, 같은 조건으로

상수(常數, Constant number)처럼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는 불균형 속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동적인 현대 무용과도 같다.


예로, 삶의 관계에서는 리더가 교체되는 일이 흔하다.

자녀가 성장할 때까지는 남편이 중심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명퇴나 사업 실패 이후

아내의 부업이 잘 되어가면서

가정의 중심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역할 교체가 일어나도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온 부부에게는

그 변화가 파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역할이 바뀌어도

존중과 협력은 유지된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과 상황 변화에 따라

불균형의 모습도 바뀐다.


또한, 이런 실화 사례도 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러자 고등학생 아들이

노동현장에 뛰어든 어머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학교 중퇴하고 마찬가지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노가다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을 생활에 보태고,

남은 돈을 모아 작은 창업에 도전했다.

수년에 걸쳐 실패가 이어졌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하나의 사업을

수익 구조로 만들 수 있었고,

결국 전업으로 운영할 만큼 성장시켰다.


현재 그는 자신과 어머니,

두 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관계는 이렇게 변화하는 불균형 속에 놓인다.


만약 관계를

반반 대칭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매 순간 불공정으로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불균형해 보여도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는 협력이 있다면

그것은 ‘불균형 속의 균형’이다.


지금은 한쪽이

더 부담하는 시기가 있을 수 있고,

어느 순간에는 상황 변화로

역할이 바뀔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같은 항목을 반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각지대를 보완하며

균형을 향해 협력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애초의 공정함’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고정된 대칭 계산에 질식하지 않고,

동적인 관계 속에서

잘 숨 쉬기 위해서라도.




2026년 2월 7일 작성

퇴고 보완 후,

2026년 2월 17일 업로드

Son the writer (aka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