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은 왜 사랑을 무너뜨리는가

사랑은 고마움을 잃는 순간부터 천천히 죽어간다

by Son the writer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어느 이혼 사례글을 읽었다.


물론 제3자인 우리는 양쪽의 전체 맥락을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남겼다.


나는 그 기록을 토대로 관계의 구조를 생각해 보려 한다.




법원 조정기일이 끝난 날이었다.

서류가 정리되고, 현물 기준 정산과 함께

판결이 확정됐다.


두 사람은 법정 복도로 빠져 나왔다.


3년 결혼생활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월급 대부분을 아내에게 보냈던 3년,

합치면 9천만 원.

그는 월 20~30만원으로 생활했다.


그는 주당 70시간을 일했다.

심신이 부서질 듯한 날이 많았다.


그런데 더 힘들었던 건

집에 돌아온 이후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집 안의 공기를 먼저 살폈다.


그는 무엇을 하면

문제가 될지를 먼저 계산했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그는 집안에서 에어컨을 켤 수 없었다.


“왜 틀어? 제정신이야?”라는 말과 함께

온갖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더위를 참는 쪽이 덜 소란스러웠다.


야근하고 온 날,

집에서 맥주 한 캔도 눈치봐야 했다.


“왜 마셔? 미쳤어?”


잔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쏟아지는 잠마저

그에게는 허락 사항이었다.


“왜 지금 자려고 해?

집안 꼴 안 보여? 정리해!”


폭염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틀었다.


집 안에서는 아내 눈치를 봐야 했지만,

차 안에서는 허락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운전석을 뒤로 젖히고

그는 잠이 들었다.


집은 지상 위에 있었지만,

안식처는 지하에 있었다.


밖에서 주당 70시간을 버티는데,

집에서는 숨쉴 틈마저 조여왔다.


어느날,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내가 많이 힘들어.”


그러나 아내의 말은 차가웠다.


“그래서 어쩌라고?”

“뭔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야?”


이런 말들은 일상의 투정이 아니다.

상대를 낮추고, 깎고, 무력화하는 언어다.


관계가 기울어질 때,

한쪽은 요구만 하고

다른 한쪽은 지쳐가면서

비슷한 언어가 반복된다.


상대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되고,

부족함만 늘어난다.


예로,


"너는 내 기대에 모자라."

"네가 내게 해준 게 뭐야?"

"네가 과거에 해준 것은 의미없어.

지금 내 요구를 너는 못해주잖아?"


그런 언어 폭력이 이어지면서

상대방은 점점 위축된다.


처음엔 사랑이었을지 모른다.

더 벌어오겠다는 다짐,

더 책임지겠다는 선택.


그러나 희생이 반복되면

그건 당연한 기본 구조로 취급된다.


한 번은 배려였고,

두 번은 미덕이었고,

세 번째부터는 전제가 된다.


"이 정도는 기본이야.

남들 다 하는 거라고!"


희생이 기본 의무가 되면

감사는 사라지고 기대만 남는다.


게다가,

그 기대는 점점 높아져 가고

상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받기만 하는 사고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받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관계를

자신의 권리 행사 영역처럼 여긴다.


무엇보다 그들은 보답하지 않고 받는 것을

자신의 당연한 권리로 정당화한다.


“나는 이 정도는 받아야 해.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 순간 관계는 호의와 배려의 교환이 아니라,

일방적인 권리 행사로 변화한다.


사랑은 선택일 뿐인데,

희생이 딸린 기본 의무가 된다.


그런 사랑은 결국

감사와 보답을 받지 못한다.


이런 일방적 관계에서는 협력이 자라날 수 없다.


한쪽은 계속 희생하면서

매번 설명해야 하고,


다른 한쪽은 매번 받기만 하면서

매 순간 채점을 매기며 판정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뱉는다.


"너는 내 기대에 모자라."


그리고 결국

상대방은 소진한다.


“나는 네게 다 줬어. 더 이상 못해.

이대로 가면 내가 죽을 것 같아.”




법정 복도에서,

막 이혼한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했잖아.

사랑의 좋은 추억으로 남기자.”


마지막 순간 그녀의 말.

그건 사과도 위로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기억을 미화시켜

정리해 달라는 요구처럼 들렸다.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거창한 배신보다

반복되는 무감각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


거창한 배신조차

반복되는 무감각이 쌓여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반복되는 무감각일까?


그것은,

상대의 수고와 고통을 보지 못하는 태도.

계속 받으면서도 모자라다고 말하는 언행 습관.


협력 대신 평가나 하는 태도.


그와 동시에,

자신에 대한 평가는 거부하는 태도.


그런 사고와 태도 위에

아무리 사랑을 얹어도,

그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사랑은 고마움을 잃는 순간부터 천천히 죽어간다.




바꿔 말하면,

사랑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순간마다 다시 살아난다.


“고마워.”

“수고했어.”

“같이 해보자.”


이런 감사의 말들과 협력의 태도가

관계의 균형을 회복하고 지탱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라고 말했다.


기술은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며,

책임을 포함한다.

사랑이 기술이라면,

그것은 저절로 지속되지 않는다.

의지와 훈련, 그리고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랜 세월 사랑에 대해 잘못 배워왔다.


자본주의 소비 문화,

드라마, 대중 가요,

심지어 종교마저도

현실의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모두 잘못된 방향을 제시해왔다.


현대 사회는 사랑을 소비 행위로 바꿨다.


또한 종교는 희생만 너무 강조해와서

사랑에 대한 오독을 키워왔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단지, 사랑하려고 서로 협력할 수는 있다.




사랑은 더 많이 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또한, 더 많이 요구하는 사람도 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일방적 희생과 일방적 착취는

모두 무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를 채점하지 않고,

서로의 수고를 인정하면서 협력할 때,

비로소 신뢰가 축적되면서 단단해진다.


사랑은 거창한 희생이 아니라

감사를 주고받는 작은 협력 위에서 오래 간다.


서로의 고통과 수고를 덜기 위한

도움과 협력을 하는 것.


이런 사랑은 각박한 세상살이에

서로 회복의 휴식처와 숨쉴 틈을 제공해준다.


사랑은

서로를 도우면서 편안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


밖에서도 버티고,

집에서도 버텨야 하는 관계라면

그건 오래가지 못한다.


서로가 조금씩 편안해지는 방향,

서로 이완하며 숨을 깊이 들이마실 수 있는 방향.


그 방향으로 작동할 때

사랑은 비로소 오래 간다.




2026년 2월 23일 작성

퇴고 보완 후,

2026년 3월 4일 업로드

Son the writer (aka 엠마네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