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대한 고찰
월트 디즈니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누가 제일 기억나는가?
얼마 전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유튜브 서핑을 하다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어릴 때 비디오테이프 필름이 닳도록 봤던 것도 기억나고 해서 잠들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재생했다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누운 자리에서 다 봤다. 오래간만에 본 백설공주 만화에 대한 감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오래 전엔 그저 예쁜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나와서 우여곡절 끝에 난쟁이 집에 당도해서 동물 친구들과 이리저리 조물조물 청소하고 요리하는 모양새를 구경하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그런데 다 커서 백설공주라는 애를 다시 보니 저에게 닥친 위험을 알아차리는 것은 고사하고 현실감각도 없지, 생각도 깊이 안 하는 것 같지, 애가 좀 모자란가? 싶은 거다.
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계모인 왕비에게 모진 수모와 구박을 받으며 사는 동안에 한 점 구김 없이 얼굴과 마음 둘 다 아름답게 자란 백설공주. 과연 그게 정상인가? 힘들게 일하라고 청소를 시켜놨더니만 랄랄라~ 새들과 정답게 지저귀며 언젠가 그가 나를 데리러 올 거여요~ 하고 있다. 돌았나? 싶었다. 왕비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엄청나게 얄미웠을 것 같다. 죽도록 고생해 봐라! 하고 부려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백설공주가 당연히 힘든 모습을 보고 싶은 건데, 내내 방긋방긋 웃고 있으면 "저게 나를 약 올리나?"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나?
만약 백설공주가 그 고생을 하는 동안 죽는시늉이라도 하며 괴로워했더라면 왕비가 백설공주를 그렇게까지 미워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비 같은 나르시시스트 앞에서는 그저 잠자코 숨 죽이고 사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백설공주는 왕비의 암살 계획에서 벗어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계모 아래 지내면서 눈치코치 없이 그저 순진하게만 자란 백설공주는 그가 오랫동안 겪어온 가정 문제로 인해 억압이나 해리, 반동형성과 같은 방어기제 사용에 고착화된 것 같다. 현실의 괴로움과 고통이 너무나도 크지만 자신을 도와줄만한 누군가라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부정적인 감정은 전부 차단하고 피상적인 희망만을 노래하며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작중 백설공주의 나이는 고작 14살. 요즘으로 치자면 사춘기가 이미 시작하고도 남았다. 그 나이면 한창 "엄마가 뭘 알아!"하고 소리치며 자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갈 때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지 느끼기도 전에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덮어둘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소녀,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한 딸이 백설공주다.
백설공주가 사냥꾼으로부터 풀려나 일곱 난쟁이의 작고 귀여운 오두막에 당도하기 전까지 어둑한 숲길을 헤매는 과정은 그동안 그가 애써 무시하고 억눌러왔던 내면의 불안, 공포, 두려움, 분노, 수치심, 슬픔과의 마주침을 의미한다.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계모가 늘 감시하고 있던 성 안에서는 어떤 고된 일을 하더라도 하나도 힘들지 않은 척, 배시시 웃을 줄만 알던 백설공주는 튀어나온 나뭇가지 하나에 옷자락이 걸리는 것만으로도 자지러지며 울음을 터트린다. 나에겐 그 모습이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있다가 태어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힘들긴 했지만 익숙한 성을 벗어나 거칠고 낯선 세상으로 내던져져 큰 소리로 우는 백설공주는 드디어 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일곱 난쟁이들 입장에서 백설공주의 등장은 갑작스런 날벼락같은 일이다. 하루 종일 땀에 절어 중노동에 시달리고 왔더니만 웬 공주라는 것이 집에 쳐들어와서 침대를 다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다시 보니 시키지도 않은 청소, 빨래, 설거지도 다 해놓고 이제부터는 밥 먹으려면 깨끗이 씻고 와야만 한다고 으름장도 놓는다. 마치 이 집의 주인이었던 냥 뻔뻔하게 구는 것이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하지만 난쟁이들은 깨끗하게 씻고 오라는 백설공주의 말에 토 달지 않고, 그에게 따뜻하고 안락한 침대를 내어주며 다음 날 일터로 떠나기 전에는 낯선 사람과는 절대 말도 섞지 말고 문도 열어줘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백설공주가 나타난 뒤 달라진 난쟁이들의 일상은 아기가 태어난 후 180도 달라진 가정의 모습과 비슷하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뜻만 맞는다면 엉망진창에 얼레벌레, 얼렁뚱땅으로 살아도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세상에 갓 등장한 아이에게는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이 우선 제공되어야 하고, 그 환경 속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위험한 것을 정확히 구분 지어 가르쳐주어야 한다. 난쟁이들끼리만 지낼 적에는 밥상 위에 곡괭이를 꽂아두어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백설공주가 등장하는 순간 가정이라는 구색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난쟁이들에게 딸이 생긴 것이다.
난쟁이들은 자기 이름대로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서 공주를 대한다. 박사는 박사답게 논리적으로 대화하고, 부끄럼쟁이는 부끄럼쟁이답게 부끄러워한다. 멍청이는 멍청하지만 유쾌하게 백설공주를 즐겁게 하며, 심술이는 완고하고 냉소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공주에게 경고한다. 현실 속에서 그저 참고 웃는 것 하나만 할 줄 알았던 백설공주가 일곱 난쟁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세상을 배우고 자신의 인격을 깨우치는 시간이다.
일곱 난쟁이가 오직 순수한 사랑만으로 백설공주를 돌봤다는 것은 공주가 독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죽어(사실은 정신을 잃은 상태) 유리관에 보관된 채 사계절을 보내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아무런 대사 없이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과 함께 난쟁이들이 매일 같이 백설공주가 잠들어 있는 유리관 앞에 꽃다발을 들고 와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같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애니메이션 속 시간 흐름 상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함께한 시간은 단 하룻밤 밖에 되지 않는다.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난쟁이들은 정말로 백설공주를 열렬히 애지중지하며 사랑한 거다.
사람의 인생이 그토록 짧다면 우리 모두가 갓 태어나 부모의 품에 머물다가 세상에 독립하기까지의 시간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들이 함께한 그 하룻밤의 시간과 동일할지도 모른다. 그 찰나의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우리 각자는 언제 올챙이인 적 있었냐는 듯이 원숙한 성인의 가면을 쓰고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해진 내 얼굴 속에서 언제나 영원히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가 웃으면 히죽히죽 따라 웃는 말간 얼굴의 아기의 얼굴을 본다. 우리는 영원히 유리관 속에 예쁘게 보관된 어린아이로 부모의 눈과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난쟁이들을 보며 자식을 향한 부모의 순애를 본다.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사랑했던 난쟁이들의 사랑을 나도 받았던 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왜 눈물이 날까?
그 사이에 재미 찾아 정처 없이 떠돌던 왕자가 얌체처럼 등장해서 공주에게 입을 맞춘다. 아무리 난쟁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정성을 들여도 꿈쩍 않던 공주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런 얘기가 나온다. 자식새끼 다 키워놔 봤자 소용없다는.
백설공주는 고~대로 왕자의 품에 안겨 홀랑 떠난다. 하지만 난쟁이들은 아무도 공주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하지도 않고 어떻게 네가 우리를 두고 갈 수 있냐고 붙잡지도 않는다. 난쟁이들은 공주가 기뻐하는 것만큼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축복하고 환호 속에서 떠나가는 공주와 왕자를 배웅한다.
조건 없는 사랑 속에서 한 인간으로 올바르게 성장하여 배운 사랑을 그대로 누군가에게 베풀기 위해 그 부모로부터 떠나는 것 또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섭리다. 자식들은 그렇게 또 누군가의 부모로 혹은 배우자 혹은 동반자 혹은 친구로서 사랑을 나누고 살아간다.
누구는 그러더라. 왕자야말로 진정한 '남자'의 사랑을 실천했다고. 여기저기 잘 둘러보고 다니다가 이 여자만 한 사람은 없지! 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은 왕자가 현명하다, 뭐 이런 소리를 하던데. 참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이렇게나 다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할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