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
떠나고 잊어버리고, 빈 자리가 생기고 대체재가 필요해진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 깔려 있는 기본 정서는 이것인 듯했다. 모두가 고독감을 느꼈고, 그 고독은 그들 주변의 빈 자리를 정의했다. 영화는 파리의 한 평범한 동네를 배경으로 해 거기서 내내 거의 벗어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평범하고 작은 이 공간에서, 고독한 이들이 안고 있는 빈 자리들은 끊임없이 일상의 균열을 만들어 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후 두 번째로 접한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감성은 여전히 좋았다. 좋았던 지점 또한 궤를 같이 했다. 어떻게 보면 줄거리만 다를 뿐 내러티브와 이를 풀어가는 방식, 연출기법 등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와 거의 흡사하다고 생각됐다. 예컨대 닫힌 유리창 너머로 인물들의 실루엣만 보여주되 말 소리는 들리지 않게 하는 방식, 또는 인물들이 대화 도중에 속으로 말을 삼키는 방식.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선 변화를 능동적으로 따라가게 하는 방식 말이다. 일상 속에 겹겹이 쌓여 있던 비밀과 오해의 서스펜스를 하나씩 해소해 나가는 섬세한 구조도 동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인물들은 감정을 삭히고 말을 줄이는 법을 알고 있다. 그의 영화는 갈등을 말로써 표현하기 보다, 인물들이 눌러 삼켜 끝내 내뱉지 못한 말로써 표현하는 부분이 훨씬 많은 영화다.
이런 방식으로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말하고 싶어 하는 바는 뭘까. 그의 영화는 매번 이란 사람이라는 민족성이 이란 밖의 다른 나라를 지향하는 방향성과 충돌하는 어떤 지점을 다룬다. 이란 뿌리를 지닌 인물들은 늘 고향이 아닌 다른 곳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한다.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씨민은 이란을 떠나 이민을 가고 싶어한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서 아미르는 파리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았지만 끝내 이란으로 되돌아갔다.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이란인들은 늘 머무름과 떠남의 경계에서 방랑한다. 그리고 ‘떠남’이란 필연적으로 이별을 수반하기에, 이들의 일상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파동이 발생한다. 특히 가족 안에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는 가족 관계를 통해 한 개인의 존재를 성찰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에서는 개인을 성찰하는 방식이 가족 테두리에서 좀 더 확장된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도 부녀지간, 모녀지간 등 가족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아울러 마리(베레니스 베조)와 새 남자친구 사미르(타하르 라힘)와의 관계, 마리와 전남편 아마드(알리 모사파)와의 관계, 사미르와 전 부인과의 관계 등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에서 파생되는 고독과 외로움도 큰 축을 이룬다. 인물들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누군가가 떠나고 다시 들어오고, 그러면서 계속 빈 공간이 생겨난다. 이를 메우기 위한 몸부림도 이어진다.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진실은, 아무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한 곳에 끝까지 머물러 줄 수는 없으리란 것이다. 자기 자신 말고는 삶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없고, 고독은 스스로의 몫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외로워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절망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존재를 갈구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실패할 것을 알더라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고, 그것은 처연하지만 동시에 무척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든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리다. 생명력이다.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인물들은 늘 크고 작은 일상의 파동에 흔들리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그것을 감당해내고 또 하루가 지나면 담담히 앞으로 나아가는 생명력을 지닌 이들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늘 따뜻한 느낌을 전한다. 소박하고 잔잔한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