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전혀 없는 결말 분석 있음)
2024년 넷플릭스에서 화제였다는 영국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를 뒤늦게 봤다. 넷플릭스에서 뭐 볼지 찾는답시고 무한 스크롤할 때 여러 번 눈에 띄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딱히 끌리지가 않았다. 장르와 분위기가 짐작되지 않는 제목과 포스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디서 '놓칠 수 없는 넷플 명작' 같은 피드를 봤는데 댓글에 이 드라마가 많이 호명되길래 마침내 선택한 것이다. 과연, 시작부터 진입장벽이 높았다. 아기 순록이라는 귀여운 제목에, 푸근한 고도비만 여주인공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내건 포스터로는 이 이야기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다. 대체 왜 이다지도 힌트를 거부한 제목과 포스터여야 했을까. 직관적인 '넷플st 드라마'는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인물의 심리묘사도 그만큼 복잡다단하다. 이 이야기가 감독이자 남자 주연배우인 리처드 개드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으니. 자기 이야기여서 더더욱 간단한 언어로 치환할 수 없었겠구나 싶었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작중 여자 스토커 마사가 스토킹 대상인 남자 도니를 부르는 '애칭'이다. (시청 전 포스터를 보고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해자가 '베이비 레인디어'를 음성으로, 텍스트로 말할 때마다 약간 역한 혐오감이 올라오는데..정작 이 드라마는 위에 말했듯 넷플 드라마 공식인 '권선징악', '정의 구현', '악인 고발'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다. 넷플스럽게 가고자 했다면, 1.흥행수표인 심리게임적 수법으로 분노 레벨부터 쌓아올리고 2.스토커의 비밀을 파헤치고 3.통쾌하게 스토커를 응징해 최종 도파민을 콸콸 분출시켜야 할 터. 하지만 <베이비 레인디어>는 이런 건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대신 스토킹 피해자인 도니의 심리 변화에 거의 모든 스토리텔링을 할애한다.
스토킹 범죄의 악랄함을 고발함에 있어 오락가락 하는 피해자 심리의 묘사는 오히려 선악의 본질을 흐리지 않나. 의아해질 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 작품속 도니는 단지 스토킹 자체로만 고통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스토킹을 겪으며 알아차린 자기 안의 모순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이 작품은 그 부분에 더 집중하는 길을 택한다. 도니의 자기혐오 묘사가 없었다면 드라마는 단순한 스토커 추격 스릴러물에 그쳤을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스토킹과 가스라이팅을 내포한 관계가 인간의 약한 고리를 어떻게 파고들어 치명상을 입히는지 그 파괴력을 체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단연코 유쾌 통쾌한 드라마는 아니다. 심지어 중간중간 불쾌감을 증폭시키는 특정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다 보고 난 뒤 묘하게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내 안에도 자리하고 있는 익숙한 감각이 호출되어서일까. 자책과 자기연민과 혐오의 사이클을 무한 반복하는 도니의 어리석음이, 나 또한 어느때 어디에선가 겪었던 어리석음에 면죄부를 주는 듯해서일까. 내밀한 마음이 밖으로 호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수치심 대신 동질감이 느껴지는 건, 이 작품의 연출이 그만큼 따뜻하고 섬세했다는 뜻이다. 드라마는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피해자를 탓하는 이분법적 선악 규정의 당위 속에 빠지지 않은 채 자기만의 갈 길을 간다. 때로는 가해자를 무참히 응징해주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보다, 당신의 혼란도 여기로부터 기인했음을 지그시 보여주는 '인식의 과정'이 더 깊이, 더 오래 가는 위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