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중과 상연>은 작가의 필력을 두드러지게 느낀 드라마였다. 드라마 작가의 필력이란 이런 건가 처음 느낀 것도 같다. 그게 아니라면 상황만 볼 땐 무리한 설정들이 줄줄이 펼쳐지는데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을까. 은중의 입장에선 알고 보니 첫사랑 오빠가 성소수자였고, 대학 동아리 선배와 연애하게 됐는데 그가 알고 보니 첫사랑 오빠와 친구 사이다. 상연의 입장에선 짝사랑이 알고 보니 절친의 애인이다. 내내 각자 갈길 가던 이들이 10년 만에 같은 업계, 같은 일감, 같은 회사로 만난다...이 얼마나 말도 안되게 좁디좁은 세상인가. 그럼에도 스토리는 튀지 않고 막장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말이 되게’ 구현해내는 작가의 드문 재능이 몹시 부러웠다.
내게 <은중과 상연>은 우정 이야기로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상연이 자아와 분투하는 내용으로 읽혔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삶을 혐오한 상연이 마지막 순간에 한 번 스스로에 솔직함을 허락하며 자신과 화해하는 이야기로. 은중은 상연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라 해도 무방하다 느낀 건, 내가 유독 상연에 몰입해서였을까.
삶은 상연에게 내내 죽으라 죽으라 등떠밀었다. 그래도 살아내는 그녀의 생명력은 삶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다. 상연에게 삶은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버티고 이겨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상연은 자신을 아까워함 없이 쉽사리 불 속에 내던졌다. 또 활활 태워버리곤 했다. 나는 상연처럼 자기파괴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상연이 지닌 내면의 심연에 마음이 못내 머물던 이유를 생각해본다. 거절 당할 두려움에 거절 당할 일을 아예 제거해버리는 상연의 대담함은 쿨함으로 포장된 회피고, 단호함으로 가장한 포기다. 온 마음을 다해 생을 대했다가 생이 배신할 게 두려워 넘어오지 못할 선을 긋는 상연의 모습 속에 나도 있었다.
만일 누군가 내게 너는 인생을 매순간 진심으로 맞부딪히며 뜨겁게 살고 있느냐 묻는다면…뜨거웠던 찰나라도 있었는지가 아득하다 말하겠다. 나 또한 뜨거웠던 것이 차가워질 게 두렵다. 실패가 두렵고 상처받을까 두렵다. 그 두려움이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만든다고 포장하며 나도 살고 있다. <은중과 상연>을 보는 내내 마주한 건 상연의 그것과도 같은 내 안의 자기혐오였다. 아니, 실패하여 못난 내 모습을 수용치 못하는 나르시즘이었다. 그래서 상연을 보는 내내 마음이 쓰렸다.
ps. 복잡다단한 이야기들을 구체적인 사건과 순간들로 엮는 작가의 솜씨가 기막힐 따름이다. 특히 이들의 20대 젊은 학창시절은 동아리방의 왁자함 속에도 쓸쓸함이 깔려있는데,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각본으로 자아낸 건지 놀랍다. 훌륭한 드라마를 많이 알고 있지만, 작가의 필력이 큰 존재감으로 다가온 작품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