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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를 습관처럼 말하게 되어버린 인생이여

by sooowhat

나이를 먹을수록 얼마나 많아지는가. 어쩔 수가 없다, 는 말로 퉁치고 넘기는 일이. 그리고 그 뒤에 파도처럼 밀려드는 현타에 푹 잠겨 잠 못이루는 일이.


모든 것을 성심성의껏 고민하던 청년의 시절,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대부분의 일들을 변명하던 어른들이 있었다. 그들이 비겁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한 수순처럼 나 또한 비겁한 이들의 대열에 예외없이 끼었다. 나만은 뭐라도 될 줄 알았었다. 그 또한 그들도 같았을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삶을 향해 읇조리기에 이보다 편리한 변명도 없다. 위대하지 않은 사람은 불편한 것과 편한 것 중 편한 걸 택한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낯짝 두껍게 써재껴도 무리 없을 정도의 나이까지만 버티고 버틴 후 마침내 그 말을 뱉었을 때, 나는 마치 어떤 권리라도 획득한 것 같았다. 이제 더이상 떳떳하고자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암묵적 공모. 적당히 퉁쳐도 서로 이해할 거라는 무언의 작당. 그것을 알량한 경험이 내려주는 자격인양 여겼다. 언제부턴지 친구에게, 가족에게, 직장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어쩔 도리 없지 뭐'가 되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 없음은 종국에 상대방이 아닌 나에게 돌아온다. 자신에게 하는 변명은 남에게 하는 변명보다 더 사람을 뻔뻔해지게 만든다. 뻔뻔해짐에 무뎌지게도 만든다. 인생이 편리해진 대신 시시콜콜해진 것도 그때부터였을까. 아직 30대에 불과한데, 40이 되고 50, 60, 70 이 되어갈수록 점점 더 하찮은 인간이 되면 어쩌나, 이따금 가슴이 선득해 남은 인생을 어림해보게도 되었다.


계속 어쩔 수가 없다고 되뇌이는 만수 역시 끝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지경에 이른다. 결말로 치달을수록 만수는 더욱 대범해지는데 그 배경엔 과거 순수했던 자아의 상실과, 동시에 그 상실에 아픔조차 못 느끼게 된 무감함이 깔려있다. 한때 빛나던 순간들을 다 잃고 껍데기만 남는 인생이 바로 어쩔 수가 없어서 사는 이들의 삶이 아닐까. 나를 포함해 대부분비슷할 것이라 말하면, 너무 자조적인가. 살아있는 한 살아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면 애당초 도리 없는 것이 삶 자체인 듯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면접장에서 더이상의 전투를 놓아버린채 일말의 불편해함 없는 만수의 모습은 외면하고 싶은 어떤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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