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였고, 내 기대치는 너무 높았던 모양이다.
영화는 친족 성폭력을 소재로 한다. 당사자 외엔 다 알 수 없을 트라우마를 그려낸다. 그것은 정말이지 남모를 고통의 심연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는 이견이 없을 소재를 사용해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덴 성공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아동, 친족 성폭력 소재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한 개인의 상처와 슬픔은 제각각의 몫이다. 그 진리를 영화 내내 새삼 상기했다. 나의 상처는 누구도 100% 나와 동일한 수준으로 경험할 수 없다. 따라서 각자의 고통은 각자에게만 진실이다. 나에게 진실인 것이 타자에겐 허위나 위선, 위악일 수 있다. 영화 속 수호는 성폭력 피해자의 삶이 처참히 망가질 것이라 짐작했다. 허나 주인이는 성폭력 이후에도 그런대로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가 겪은 트라우마를 수치화해 낮은 점수를 줄 수 있나? 누구와, 어떤 모습과 비교해서? 트라우마는 애당초 객관적이지 못한 영역에 자리한다. 그래서 외로운 것이고.
영화가 성폭력 보다 더 확장성 있는 소재를 택했으면 어땠을까 했던 건 그래서였다. 정확히는 이 주제의식이 품을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일지 궁금했다. 성폭력의 범주로 들어서는 순간 상처의 주체와 객체, 선과 악은 명확하게 선이 그어진다. 그만큼 트라우마의 상대적 진실을 논할 공간은 좁아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트라우마 다운 얼굴을 하지 않은 트라우마로까지 영화가 시선을 넓혀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영화는 성폭력 트라우마를 정형화하지 말자는 단순한 메시지에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듯 보인다. 물론 성폭력 트라우마에 대해 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것에 제대로 천착하는 것이 감독의 온전한 의도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왠지 영화 본인(?)은 그보다 조금은 더 나아가길 원한 게 아녔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조금 더 멀리 뛸 수도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들었다. 이 영화가 트라우마를 대하는 '세상적 기준'에 요리조리 의문을 제기하는 영화이기에 더욱 그랬다.
이는 물론 개인적 바람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아쉬움일 뿐, 영화는 훌륭하게 만들어졌다. 내가 이 영화에 괜히 좀더 기대를 얹어서 본 거다. 영화의 어깨가 무겁도록 말이다. 그리고 아마 그 이유는 내가 지니고 있는 이른바 '자격 미달감' 트라우마들을 투영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따금 난 그것들을 도무지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라 막막한 기분이 든다. 주인이가 누리를 꼬집으며 이래도 안 아프냐고 물은 것처럼, 나도 이따금 스스로를 꼬집어본다. 트라우마의 스펙트럼에는 그렇게 고통조차 모호한 지대가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소 자기중심적으로 감상하고 말았다는, 영화를 위한 변을 덧붙여본다. 하고자 하는 말과 손 들어주고 싶은 편이 명확하게 있던 <세계의 주인>. 보다 도전적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걸 보고팠던 과한 욕심은 차치하고 (말은 쉽지!), 깊은 트라우마와 공생하는 법을 체득한 주인이를 만난 것만으로 수확인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