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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범 Dec 31. 2021

초록색 향기

서귀포 자연휴양림 백패킹

처음 백패킹을 하기로 결심한 건 한 영상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영상에선 커다란 배낭을 멘 한 사람이 하루를 바깥에서 온전히 보내는 데 필요한 각종 물건을 짊어지고 거대한 자연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냈다.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그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커피를 내려 마시며 언제부터 자리를 지켰는지 모를 나무들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아침을 즐겼다. 

전 세계의 멋있다는 자연은 다 보고 죽겠다고 항상 속으로 다짐하던 나는 그 영상에 매료되어 곧바로 자연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목록을 만들고 내 커다란 배낭을 조금씩 채워나갔다. 가득 채워진 배낭을 메고 산으로, 섬으로, 숲으로 떠났고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과 함께 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백패킹은 필연적으로 자연과 함께 하는 활동이다. 백패커들은 자연과 하나 되어 하루 혹은 며칠을 머물고는 누가 여기 왔었냐는 듯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난다. 나 또한 숲이든 산이든 마지막에 자리를 떠날 때는 항상 내가 머문 곳을 정돈하고 밤사이 생긴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집에 가져갔다. 평생을 자연과 함께 하기 위해선 그들을 존중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러 밤을 함께 보냈던 자연들 중 단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제주도의 서귀포에 위치한 자연 휴양림이다. 여름의 파란색보다 여름의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에게 사방이 초록색으로 뒤덮인 숲은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 속에서도 몇 시간을 걸어 기어코 찾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두텁게 바른 선크림조차 뚫어버릴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는 7월의 어느 날, 15킬로에 달하는 묵직한 배낭과 야영에 필요한 온갖 잡동사니들이 잔뜩 든 보조 가방을 앞뒤로 멘 채 제주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한참을 달려 제주의 한가운데에 잠시 멈춰 섰고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서귀포 자연휴양림은 안내소에서 야영장까지 40분은 걸어가야 도착하는 생태관찰로가 잘 구성되어 있었다. 커다란 나무판으로 표시된 생태관찰로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순간 사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이전까진 드문드문 떨어져 있던 나무들이 입구에서부터 내 시선이 닿는 저 끝까지 한데 모여 있었고, 서로를 향해 몸을 한껏 기댄 커다란 잎들이 파란 하늘을 잔뜩 뒤덮어서 눈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초록색이었다. 생태관찰로는 지대가 어느 정도 높았지만 천천히 걸으면 난이도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내 몸에 무겁게 얹혀있는 짐들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사방의 초록색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무더웠던 아스팔트 거리 위에선 내내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생태관찰로를 걷는 동안에는 시종일관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이 없을 때마다 마스크를 살짝 내려 나무들이 내뿜는 초록색 향기를 힘차게 들이마셨다. 도시의 공기에 익숙해진 폐가 갑작스레 들어온 신선한 내음에 정신을 못 차리는 듯했다. 나와 함께 생태관찰로를 걷고 있는, 나를 마주 보고 오던 사람들도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가에 생긴 주름을 보아하니 마스크 속의 입도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자연 속에서 여유를 즐기며 걷다 보니 한 시간이 넘어서야 야영장에 도착했다. 야영장의 전경은 생태관찰로의 확장판 같았다. 드넓게 펼쳐진 장소에는 여전히 초록색이 만연했고, 놀이터의 아이들처럼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던 나무들은 이제 다 컸다는 듯이 길쭉길쭉하게 키가 커져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거리는 저만치 떨어져 있었지만 그 위에선 수많은 가지가 너르게 퍼져 있어서 마찬가지로 저 위에 파란 하늘이 있음을 이따금씩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은 완전한 초록이었다. 마스크를 벗고 다시 숨을 힘껏 들이마시니 또 다른 냄새가 났다. 바닥에 잔뜩 깔린 흙의 따뜻한 향과 사방에 펼쳐진 수많은 잎의 초록색 향이 어우러져 다시 내 폐를 간지럽혔다. 

야영장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데크에 텐트를 서둘러 설치하고, 의자를 펼친 뒤 앉아 이 순간이 다시는 안 올 것처럼 자연을 오롯이 느꼈다. 이어폰은 잠시 가방에 넣어두고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만드는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잎들이 내는 소리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와 온갖 생물들이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며 만드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들으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내 사방에 펼쳐진 초록색과 그 초록색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생물들이 만들어내는 소리 때문에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눈을 감고 가만히 숲을 느꼈다. 


시원했던 한낮의 숲은 해가 저물고 어둠이 드리우자 제법 쌀쌀해졌고, 나는 어둠 속의 푸르스름한 빛을 받아 희뿌옇게 빛나는 나무들에 둘러싸여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온전히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닌 듯했다. 날개를 가진 생물들이 내 텐트 주변을 맴돌았고, 바람이 불 때마다 쉴 새 없이 서로 몸을 부딪히는 나뭇잎들이 내 머리 위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방이 어둠이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자연휴양림에서의 하룻밤은 회색빛 도시 속에서 초록색을 갈구하던 나의 마음을 넘치게 만족시켰다. 숲의 청신함과 아름다움은 아무리 이야기하고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다. 누구라도 숲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숲이 내뿜는 초록색 향기를 한껏 들이마시면, 그 어떤 고민과 불안감이 마음속에 가득하더라도 이내 안온해져서 그들의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초록의 향을 내뿜는 사람이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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