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만 해도 나도 내가 제약영업을 할 줄은 몰랐다. 그때만 해도 인문학의 위기 정도만 있었지, 문송합니다, 문과 폭망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학교에서 제약회사 채용설명회 포스터를 본 적이 있었고, 우연히 주변 사람이 제약회사 영업으로 왔기에, 나도 원서 써서 제약회사란 곳에 입사를 했다. 그만 둬야지 그만 둬야지 노래를 부르다 이렇게 오래 다닐 줄은 생각도 못했다.
대학교 다닐 때 어떤 친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허황되긴 했다. 내가 보기엔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본인이 얼마나 예쁘고 잘났는지 이야기를 했고, 모델을 한다 그랬나 뭐 어디 가서 연예인 기획사에서 러브콜을 받았다나 댄스동아리를 한다나 뭐 그러고 살았던 것 같다. 나중에 방학때 대학생들을 불러놓고 하는 다단계도 했다고 건너건너 듣긴 했다. 나는 그냥 졸업을 했는데, 그 친구는 남자가 군대 다녀오고 졸업하듯 6년 넘게 학교를 다녔나 그랬다. 작가가 된다고 하기도 하고, 강사가 된다고 하기도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조그만 기업에 다니다가 결혼 한지 얼마 안 돼서 그만 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대부분 결혼해도 일하는 게 당연한 문화처럼 되긴 했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애를 낳았는데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둥 전업주부 찬양을 엄청 하다가 키우기 힘들었는지 애를 낳고 얼마 안 돼서 엄마도 쉬어야 한다며 어린이집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워킹맘이라며 코스프레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워킹맘 코스프레. 그 워킹맘이 되기 위해 선택한 일이 다단계라는 건 슬픈 일이었다. 애 낳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연락도 뜸한 그 친구가 갑자기 카톡이 와서 대뜸 유산균을 먹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심지어 제약영업사원한테;;) 그때도 사지 않았다. 우리 아이는 유산균 안 먹어도 화장실만 잘 갔고 피부만 뽀얗게 예뻤으니까. 우연히 인스타 봤더니 애가 다니는 학원선생님한테 100만원 넘는 물건을 팔았다며 성취를 했다고 울컥하며 자랑 하는 말에 헉스럽긴 했었다. (학원 선생님을 상대로 학부모가 역으로 보험팔고 정수기 판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고 한참 지나서 우연히 다른 친구의 일로 겹치게 되어서 오랜만에 카톡이 왔다. 굳이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는데 시간내서 보자고, 언제 시간이 되냐며 어디에서 만날 수 있냐며 물어봤다.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도 애들 학원 픽업다니느라 바쁘다고 하니 라이드 해도 만날 순 있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알겠다고 나중에 시간되면 보자 하고 카톡을 남겼다.
그 친구랑 카톡을 하며 예전에 나이 들어 동창회 꾸준히 나가는 애들은 사기꾼이라고, 보험하고 다단계하는 애들이라고, 돈 빌려달라고 하고, 투자하자고 하면서 사기치는 애들이라고 그런 말들이 차례차례 머리를 스치기 시작했다. 결국 추억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엄청 비싼 물건을 팔 대상으로 생각하고 접근한다는 게 슬프고 싫었다. 최소한 너의 성취의 발걸음이 될 생각도 없다고, 10만원짜리도 안 되는 걸 몇 십만원에 팔아 놓고 그거 수수료 떼어먹는 짓에 내가 왜 불쏘시개가 되겠냐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나면 안부인사보다 물건 소개하는 게 목적일 텐데, 편히 커피한잔 마실 수 없다는 건 내가 더 잘 안다. 최소한 내가 영업한 기간이 걔보단 더 많으니까 말이다.
그 친구 인스타 보며 성장하고 나누는 삶, 가치 있는 삶, 기회가 있는 삶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하는 거 너무 어이없다. 다단계에 세상에 온갖 좋은 말 다 섞어 놓으면 괜찮아 보이는 걸까? 성형도 본판이 예뻐야 예쁘게 나오듯, 다단계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본질은 똑같다. 예전에 엄마한테 화장품 팔려고 굳이 얼굴 맛사지 해주던 아줌마, 명절날에 와서 정수기 사달라고 물건 강매하던 아저씨들 다 같은 교인들이었다. 내가 다단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도 다 겪던 일, 나도 옆에서 본 거라는 점. 그런데도 다단계는 줄어들진 않는 게 신기하긴 하다. 오히려 더 심해진다는 건 기분 탓일까?
그나마 제약영업은 그나마 병원이라는 거래처가 있고, 굳이 내 지인한테 약 사달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영업한다고 그걸로 인간관계가 엎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감사한 일인 것 같다. 물론 이 일도 신규를 해야 하고 증량을 해야 하는 압박은 당연히 오지만, 그래도 주변 인간관계를 팔아가며 주변 사람을 도구삼아 성장하는 일은 아니다. 고객은 명확하고, 나는 그 안에서 필요한 것만 영업하면 되는 거고. 그리고 영업할 비용은 회사 돈으로 지급되니 내돈 써서 영업하는 일은 없다. 제품 샘플도 대부분 내가 신청하는 거고 회사 비용으로 알아서 처리된다. 프로슈머라고 본인 돈으로 사서 쓰고 경험을 이용하는 다단계랑은 차원이 다를수도.
정말 나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서, 내가 제품 설명한다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돈도 여유가 있어야 영양제라도 사주지, 솔직히 애 키우느라 내 옷도 제대로 못 산지 몇 년이 되었는데 누굴 챙길까? 그 친구는 카톡 차단해버렸다. 두 번 다시 보지 않게. 그 다단계 안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차단을 풀어버릴까, 굳이 관심사도 다른 친구랑 만나며 추억 팔이 할 그 시간조차 부족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넷플릭스나 유투브를 보고 말지. 잊지 말자 다단계 노이즈 캔슬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