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
휴머노이드와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다. 아래 내용 중에는 /// 스포일러 /// 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 포스터에는 주인공 여성 옆으로 상대역인 남성 로봇의 수많은 복제 버전이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 있다. 스필버그의 대작 『에이 아이』에서 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파랑새』의 치르치르와 미치르처럼 먼 길을 떠나, 『엄마 찾아 삼만 리』의 마르코처럼 엄마를 찾아다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던 충격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감정을 지닌, 엄마의 진짜 아들이라고 생각하던 데이빗이, 자신과 똑같이 생긴 로봇 모형들이 줄줄이 들어 있는 상자를 발견할 때의 장면 말이다.
올해부터 젠더 중립을 선언하며 남녀의 구분을 없앤 베를린 영화제에서 미끈하게 잘 생긴 남친 로봇 댄 스티븐스가 주연연기상을 탄 줄 알았는데, 실제 수상자는 주인공인 마렌 에거트다. 평소 헐리웃 영화에만 익숙한 터라, 독일을 배경으로, 독일어를 구사하는 영화가 새로웠다. 여성 주인공 역시 마르고 늘씬한 몸매 대신,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덩치도 꽤 우람한 배우인 점이 더 멋있게 느껴졌다. 독신 고고학 박사 역할에 걸맞는 오피스룩도 어울렸고, 연구에 매진하는 베를리너로서의 아파트 실내 인테리어나, 배경이 된 페르가몬 박물관의 웅장한 모습도 색다른 볼거리였다.
이 영화의 포스터는 『에이 아이』를 떠올리게 했지만, 홍보 문구는 『그녀(her)』를 잇는 알고리즘 로맨스로 포장하고 있다. 외로운 독신남 호아킨 피닉스가 신비로운 인공지능 운영체제 스칼렛 요한슨을 만나는 내용의 연장선으로 생각되어, 개봉 전부터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her)』는 SF 영화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입력된 프로그래밍을 뚫고 자가발전해 나가는 '그녀'의 소름끼치는 응용이 알파고 이상으로 오싹했다. 인공지능 운영체제 '그녀'를 특별한 존재로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배타적인 일대일 관계를 인간이 원하게 된 바로 그 순간, 이미 수백 명과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실토하는 '그녀'의 섬찟한 발언, 방황 끝에 그 모습 그대로의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인간이 결심한 또 바로 그 순간, 더욱 고차원적인 인공지능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변주해 나가기 위해 인간을 아예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놀라웠었다.
『아임 유어 맨』은 전혀 그런 영화가 아니다. 그간의 영화들과 달리 '상대 남성'이 로봇이라는 점, 시작부터 본인이 로봇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점, 현대인의 외로움을 달래줄 프렌드 수준이 아니라, 사용자 평소의 니즈에 최적화된 외모, 언어습관, 성격을 모두 갖추었다는 점, 그동안 우스갯소리인 듯 제안되었지만 실제로는 효용성이 가장 높을 것으로 여겨져온 '남친 로봇' '섹스봇'의 모습을 공공연히 띠고 있다는 점 등이 새롭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소개에 나오듯 '발칙하지만 로맨틱한 상상력'까지는 아니며, 조각 미남 휴먼 그대로인 외형이나, 빅데이터 치고 일부 측면에서는 지나치게 완벽히, 일부 측면에서는 너무 허술하고 부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언어들이, 과학기술적으로 전혀 설명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실리콘 피부 수준이 아닌 완벽한 생김새나, 로봇스럽지 않은(매우 로봇다운?) 훌륭한 성기능을 제외하고라도, '문제 해결용 대화 시스템 형식의 챗봇'이나 '자유 주제 대화 시스템 형식의 챗봇' 어느 쪽도 현재 연구 수준에서 구현하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미래 시대도 아닌 지금 바로 이 시점 베를린에 상용화된다는 점부터 우선 현실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고고학 분야의 엄청난 논문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소화하고 있어 유적을 일견(一見)하자마자 꿰뚫어 내는 능력과, 놀라운 학문적 사실을 인지 즉시 입밖에 내기보다 주인공을 따로 불러 비밀스럽게 털어놓는 배려심이 놀라운 반면, 3년간의 연구가 허사로 돌아간 점에 오열하는 주인공에게는 생뚱맞게 공동체 윤리를 들먹이며 의아해하는 점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치매 노인 아버지의 외로운 여생, 추억만들기를 완벽히 학습하는 과정에서 서로 통하게 되는 인간과 로봇의 교류, 오글거리고 부자연스럽지만 '당신의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설계되었다'고 말하고 쿨하게 떠나는 댄 스티븐스의 진짜 로봇같은 연기가 좋았다. 남친 로봇을 들이고픈 마음 너머로 '간병 로봇'을 들이겠다고 아버지에게 소리치는 주인공의 모습이 현실적이었다. 식물인간 어머니를 돌보는 간병 로봇이, 환자의 죽음을 통해서만 아들의 편안한 삶이 보장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조치를 취한 뒤 파괴되는 김혜진 작가의 SF 소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가 떠올랐다.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 다른 감정의 소모와 조율을 통한 화합이 점차 어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성대를 제거하고 먹이를 주고 산책을 시키며, 정해진 범위 내 내가 원하는 최소한의 감정 교류와 반려를 목적으로 애완동물을 택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반려동물과 로봇의 차이, 노예와 로봇의 차이가 무엇일까. 이 또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영화는 내 기대와 달랐다. 다음 주 독서모임에서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로 토론을 앞두고 있다. 그때까지 개봉관에서 연이어 영화를 볼 예정이다. 가을, 그리고 추석.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