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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지 말고 떠나가라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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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사라진 요즘, 연말 분위기를 나게 하는 건 웹서비스가 제공하는 Recap 기능이다. 유튜브나 스포티파이, 네이버 웹툰 등의 플랫폼은 이맘때가 되면 소위 연말정산 개념의 Recap을 실행하는데, 이런 통계를 보면 문득 자기도 몰랐던 자신에 대해 알게 될 때가 있다. 우선 일상적으로 반복하던 일이 쌓여 엄청난 횟수로 자리 잡는다. 이를 통해 매끄럽게만 생각되던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서,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아니면 거의 매일 플랫폼에 드나들었다거나 하는 식이다. 특히 콘텐츠 소비의 특징은 자신이 마음 가는 일에 끌린다는 점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소비할 까닭이 없다. 좋아하는 메뉴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통계를 내보면 미묘하게 더 자주 먹는 음식이 있고는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의식하지 않지만 일상이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됐는지를 보여준다. 분명 일상의 중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고 이것들이 ‘취향’을 구성한다. 취향이 구성하는 ‘나’는 미묘한 차이를 갖고 구성되며 바로 그렇기에 스스로는 이를 의식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취향은 결국 자신이 얼마나 분열되었는지를 의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취향의 세분화라고 부르는 것들이 이런 점을 가리킨다.


취향이 다양하다는 말은 어떤 면에서 자아의 분열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선 하나로 뭉친 ‘나’에 대해 생각하려면 자신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여러 다른 것들이 어떤 경로로 자기 안에 취합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즉 ‘자기’란 혼종성을 띄며 여러 다른 모순을 집행하는 ‘집합체’인 셈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 자신이 바라던 모습이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때가 있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음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는 자신이 얼마나 분열된 존재인지를 긍정하면서 그와 같은 ‘해체’를 긍정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신체를 형식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부류가 이에 속한다. 두 번째는 내부를 통솔해 ‘자기’의 방향성을 일원화하려는 경우다. 이 경우 ‘자아’는 자신이 지닌 취향 중 가장 크고 비중이 큰 것을 가리키는 게 된다. 우리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게 된다. 세계와 자기 사이의 경계를 자아로 받아들이며 살거나, 아니면 눈에 보이는 가장 큰 것에 기대어 살거나. 어느 쪽을 택하든 옳고 그름은 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취향은 완고한 하나가 아니라 상대적인 무언가에 가깝다는 점이다. Recap은 이렇게 우리의 의식이 표면에만 겉돌지 않고서 내부로 자연스럽게 말려들어가게 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의식이 내부로 말려들어가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Recap은 단순히 한 해 동안 우리가 즐겼던 것을 통계로 나열해놓은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선택을 밝힌다는 점에서 이들 선택의 집합체인 Recap은 데이터 우주 너머의 다른 자신이 된다. 이를 따르자면 Recap에서는 데이터로 보여지는 자신이 바깥의 ‘나’와 동일시하는 과정이 주된 화두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게 하나의 취향으로 집합된다면 이는 ‘결과’일까 아니면 ‘과정’일까? 바꾸어 말하면 이들 취향은 우리가 앞으로도 무언가를 선택할 ‘가능성’일까, 아니면 그저 과거에 존재했던 선택들에 불과할까. 앞서 설명한 대로라면 자아는 경계 그 자체이거나 혹은 가장 앞선 시야다. 취향을 결집하는 역할로서의 자아란 자기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우리를 깨어난 세계에 데려다 놓는다. 깨어난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 이들 저편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아란 결국 어떠한 ‘선택’의 결과지만, 반대로 과거나 미래 어느 하나로만 특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곳에만 국한된다. Recap은 지금의 우리가 어떤 것으로 맞붙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안에서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결국 바뀌는 건 없다. 그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덮어씌워질 뿐이다. 이 대목에서 해보고자 하는 흥미로운 생각은, 만약 영화가 하나의 자아라면 어떨지다. 대개 영화는 현실과 객석의 경계에 있어서 쉽게 자신을 투영할 수 있고 반대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좋은 위치로 이해됐다. 여기서 ‘영화’는 과거를 기록한 것으로서 시선을 투영하는 일 또한 자연스레 ‘과거’를 응시하는 게 됐다. 이에 반대편에는 과거에 상응하는 미래가 자리 잡게 됐으며 영화를 보는 일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로 향하는 일이 됐다. 하지만 만약 영화가 우리의 취향을 발견하는 장소라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영화 안에서만 국한된다. 영화는 우리의 과거나 미래, 둘 중 하나를 ‘결정’하는 곳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관한다.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도 짧다. 분명 영화는 시작에서 끝까지 안에 담긴 시간이 ‘결정’된 게 사실이지만, 그런 시간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영화가 발명해낸 중층의 시간들은 우리가 서로 같은 곳에서도 각자의 삶을 보내게끔 해주었다. 이 안에서 영화는 다양한 생각들을 품는 경계가 되어줌으로써 관객 자신을 ‘세계-신체’로 만든다.


살다보면 그런 걸 느끼고는 한다. 어쩌면 타인의 삶에 공감할 일은 평생 없을 것 같다. 같은 걸 보더라도 이를 취합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신체가 서로 달라서다. 세계를 나누는 방법이 다른 한 우리가 같은 세계를 살아간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와중 대안으로 떠오르는 건 영화를 통해 세계와 신체의 경계에 서는 일이다. 이른바 세계-신체로서의 영화는 서로 다른 개인에게서 과거를 종합하지만 반대로 이를 우리가 속죄해야 할 대상이거나 확정된 미래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바꿀 수 없거나, 바꾸거나 하는 문제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영화는 우리를 돌아보게 할 수는 있어도 반대로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또 확정 짓지 않는다. 영화를 어떠한 화두나 문제의식을 선보일 수 있지만 반대로 그들 자신이 모든 걸 끌어안지 않는다. 단지 영화는 우리가 이 세상과 얼마나 연결되었고, 동시에 분산되었는지만을 체감하게 해줄 뿐이다. 생각해보면 영화는 있는 그대로 투명한 창이거나 문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한 세계를 지나칠 수 있지만 반대로 그에 머무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를 드나들며 보냈던 시간과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Recap은 마치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처음부터 무언가를 노리거나 의도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곳은 우리의 취향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우리의 취향을 따라 이해된다면 그 안에서 영화는 또 다른 ‘나’를 남기는 듯 여겨질 수 있다. 이 경우 영화는 우리를 혼자 있게 하고, 고립되게 하며 때로는 자신의 일부를 저버리는 게 될 수 있다. 이들 영화는 완전한 허구의 영역에 있지만 공상의 영역에도 있어서 둘 사이를 정확히 가르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Recap이 ‘다시’와 ‘포착’의 결합인 만큼 적어도 영화가 ‘앞으로 나아간다’와 ‘뒤를 돌아본다’의 중간지점인 것도 당연하다. 영화가 우리에게 아무런 것도 해줄 수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떠올리는 것들은 적어도 우리의 지난 삶에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들이다. 정말로 경험했거나, 겪지 않았더라도 그 안에서 파생된 것들은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있는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묘사하는 질감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아왔던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대부분은 가능한 미래이자 동시에 존재한 바 없는 과거로 묘사된다. 그 말인즉 우리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라는 뜻이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과 지난날과 이별하고 싶은 마음이 한 자리에 있다. Recap은 이 안에서 나를 대리해 뒤를 돌아본다. 어디까지가 현실이 될 수 있는지를 묻기보다는, 이 안을 통과하며 우리에 남은 게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영화가 지닌 시간의 특성은 마치 길고 긴 터널을 건너듯이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점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좋았던 일도, 싫었던 일도 모두 한때가 된다. 그리고 기억에 넘겨지고 나면 그런 이해는 더욱 판판해져서 비로소 데이터로 넘길 수 있는 부류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게 남은 것들은 무언가 시간이 지나 의미가 퇴색되거나 점점 더 소홀해지는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분류와 가공을 거친 마음은 반대로 우리 자신이 머물 곳을 제공한다. 지금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를 알 수 없다면 자신이 뒤를 돌아보았던 때를 떠올려도 좋다. 몇몇 작품에 머무르는 일은 그만큼 무언가를 끝내기 싫어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그들에 머물렀던 만큼이나 그들도 우리에 머물렀던 것이기도 하다. 영화로 보면 ‘의미’란 우리 자신이 그들 경계에서 발견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스크린과 객석 사이의 ‘관객’에 있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속한, 반대로 그 누구도 아닌 것으로서 Recap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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