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다운 단어들은 내가 맨 처음 상상한 세계였어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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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원하는 서울영화센터는 아마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였을 것이다. 1935년 앙리 랑글루아와 조르주 프랑주가 만든 영화 클럽은 영화에 대한 ‘보존’의 개념이 없던 시절 숱한 영화를 폭격에서 지켜내는 역할을 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다. 시네마테크는 나치에 의해 점령됐던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국의 영화 필름을 분산 보존하는 중심축이 되어줬다. 이러한 분산에서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을 비롯한 작품이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서울영화센터는 도리어 여러 시선이 교차하는 장이 되고 있다. 영화를 분산해서 보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화’를 조각내어 섭취하려는 것 같다. 물론 해당 기관의 특성상 이를 상징적으로 기념해서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가령 과거 ‘인체의 신비’ 전시전에서는 아인슈타인의 뇌를 조각낸 전시물이 공개돼 논란이 됐던 적이 있다. 위인의 뇌를 조각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일련의 사건이었다. 서울영화센터를 둘러싼 논란들은 그렇게 보이는 감이 있다. 영화를 보존하려고 ‘분산’했던 일에서 ‘보존’의 뜻을 잘못 이해하면 그렇게 된다. 영화를 조각내서 조각 하나를 두고서 영화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건 반대로 ‘영화’에 대한 본질적인 몰이해와 비난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특히나 영화는 성유물처럼 ‘일부’를 소유한다고 해서 ‘시성’을 받는 게 아니니 더욱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다. 영화를 다루는 일이 하나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영화센터 참여는 일종의 업적작이 된다. 무언가 예술을 하고 있다고 자평하기도 좋고, 명함 한 구석에 박아넣기도 좋다(“특정 분야보단 종합기능을 지니는 쪽을 고려하고 있다”). 영화센터를 둘러싼 영화인들의 반발은 이 점에서 무언가 실리적이지 않게도 보이지만, 반대로 예술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를 돌아보게 한다.


지난 9월2일 열린 서울시의회 기획경제위원회 회의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OTT가 발전하면서 기존에 있던 필름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굳이 보관해야 되느냐, 이제는 OTT만 들어가면 모든 과거의 영화를 다 볼 수가 있거든요. 그런 상황이 되다 보니 정말 아카이브를 구성해서 자료실을 만드는 게 시대적인 상황과 맞느냐 (…).” 이는 앞서 영화센터의 기능을 ‘보존’에서 ‘커뮤니티’로 옮겨가는 일에 연이어 영화인들의 항의를 불러모았는데, 이는 영화센터 건립을 준비하던 시간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어지는 다른 의원의 발언을 살펴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그는 “지금의 결과물은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독립영화를 전용으로 상영할 수 있는 상영관 3개를 만들면 다 된 것으로 여기는 일이 황당하다”고 지적한다. 이 문제의 중심에 선 시네마테크는 영화도서관에 빗대어지고 있는데, 사실 도서관은 단순히 작품을 수집해서 시민들에 개방하기만 하는 목적만이 아니라 보존고에 이를 넘김으로써 영화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의 형태로 변환하는 기능도 있다. 즉 시네마테크는 전쟁의 참화에서 영화를 빗겨나가게만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서 거대한 ‘바깥’이자 ‘이후’를 기약하는 장소가 된다. 단순히 영화를 갖고 있기만 할 뿐이라면 과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후대를 위해 남겨놓는다는 말도 가능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영화가 디지털화될 수록 온라인에서 이를 만나보는 일도 쉬워지므로, 물리적인 형태의 ‘보존’은 무언가 사람들에게 작품을 ‘볼 수 있게’ 한다는 말과는 딱 들어맞지 않는 듯한 인상이 있다. 오히려 이 경우 ‘보존’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참화를 겪고 파괴됐을 때 이를 다시 미래로 넘길 수 있게 하는 ‘가능성’에 명운을 거는 것이다. 즉 OTT는 단말기에 불과하며, 이를 종합하는 이데아를 보존하는 일에 중점을 두는 게 바로 시네마테크다.


그에 대한 답변을 이어가보자. "라이브러리를 통해서, 아카이브를 통해서 영화 학도 한 명이 그룹을 지어서 그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받았던 어떤 기운과 영감이 커다란 발견의 시작일 수 있는 거죠." ‘원본’을 보존하는 일이 중요한 건 모든 일과 사건에 원형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는 단순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의 산물인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꿈을 꾸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안에서 영화는 경제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감각을 분배하는 현실 정치의 장이 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만큼 시네마테크가 어떠한 가능성의 산물이라면 반대로 무언가를 마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만약 영화가 분산에 기능을 둔 하나의 ‘장치’라면, 이 안에서 ‘영화’는 객체가 아니라 ‘대체’이고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한 사람의 시네필이 탄생하는 곳이라면 반대로 절대 다수의 대중이 탄생하는 곳이기도 해야 한다는 소리다. 언젠가 사람들은 시네필이 죽은 자리에는 무능한 대중이 태어난다고 믿었다. 이는 시네필을 대중과 구분짓는 방식으로 지위를 특권화하는 것인데, 사실 이들 모두가 투명한 거울을 두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항상 현실과의 교대를 준비하고 있고, 관객이 없으면 그런 교대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단순히 시네마테크를 시네필의 전유물로만 보기에는 이들 시간이 내부로만 갇혀있어서 이를 흘러가게 해야만 비로소 생성이든 소멸이든 해낼 수 있다. 아무런 시간도 보낼 수 없는 곳은 이를 관측할 외부가 없기에 반대로 바깥을 갖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니 시간은 흘러야만 한다. 불성실한 감시 안에서는 시합이 성립하지 않는다. 영화 또한 시간을 하나의 ‘바깥’으로 사유하면서 절대 다수의 경제논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고 든다. 영화는 시간의 경계면에 자리한다.


“OTT 시대가 됐고 한마디로 넷플릭스 시대가 됐으니까 기존 영화도서관이라고 꿈꾸던 목표는 수정될 수 있다. 수정될 수 있죠. (…) 그런데 지금 우리는 본말이 전도돼서 영화센터라고 이름을 바꾸는데 상영관 3개 만들어진 게 다라고요.”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영화는 ‘그들 자신의 시간을 빼앗는 것만큼이나 외부와 닿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공허’로 사유된다. 이 공허의 영역에서는 그 어떤 상상도 가능한데, 이를테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내부는 나치를 비롯한 악의 평범성을 묘사하고 있지만 도리어 ‘바깥’은 상상불가능한 영역으로 남는다. 그래서 영화는 흔히들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들 하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깨어난 세계에 돌아온다. 깨어난 세계에서 우리는 이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떠한 단절의 징후들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파악한다. 과정을 생략하고서 곧바로 결론에 도달해버린 사건들이라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영화와 관객 서로가 독립적인 결과로서 존속해왔다고 ‘착각’하거나. 우리는 극장이 흔히들 ‘어둠’으로써 무언가 은밀함을 내포한다고 여기지만 반대로 인간의 존재를 말살하는 수용소일 수 있다. 그 안에서 개인은 군중 무리 중 일부가 됨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는 어려워진다. 영화의 깊은 공허가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하는 탓이다. 도리어 영화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허에 빠지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영화를 보면 볼수록 자신이 시간을 투자했다는 사실이 곧 영화에 대한 지지로 변환된다.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이 부정당하면 이전까지의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이 과정에서 서로 고립돼 있다고 느낀 이들이 가장자리로 나서고 나면 그제서야 주변부의 혁명이 시작된다. 이를 통해 성립하는 내부는 소수의 시네필들에 의해 가장된 ‘장막’에 가까운 것이다.


벽을 세우는 건 안과 밖을 분리함으로써 어느 한쪽을 보존하는 대표적인 행위다. 그리고 시네필들의 영화에 대한 광적인 열광은 사실 영화를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보다 자신이 영화와 나눈 것이 얼마나 많은지에 유래된다. 그래서 시네필이 영화와 독립을 연관짓는 건 둘 중 하나는 보존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쪽에 가깝고, 나아가서는 폭발의 중심지에서 외부를 향해 나아가는 ‘위치’에 자신을 두려는 것이기도 하다. 시네필은 단수이기에 폭심지에서도 찢기거나 나누어지지 않은 채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덕분이다. 다른 한편 시네마테크는 영화사에 자리잡은 질산염 필름을 보존하는 역할도 하는 등의 보존을 수행한다. 흥미로운 건 시네마테크가 질산염필름을 보존함으로써 오히려 가장 화재발생 가능성이 높은 곳이 됐다는 점이다. 철두철미한 관리가 동반된다 하더라도 원자력 발전소가 핵붕괴의 시작점일 확률이 높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영화에 벽을 느끼거나 세우려는 건 그들 공허에서 우리 자신을 구하려는 몸짓일 수 있다. 비록 그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더라도 미로에 빠진 이들을 더 많은 가장자리로 이끌 수 있다. 그렇다면 한 인간이 영화 앞에 외롭게 서 있을 때 이들을 구할 방법이란 없는 걸까? 만약 영화가 하나의 거대한 벽처럼 느껴진다면 서로 함께 이를 넘어가보려 할 수는 없을까? 영화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공허라면 독립영화를 트는 일은 이들 영화를 서로 고립계에 밀어넣는 일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영화만을 위한 공간은 사실상 지원을 빙자한 차별에 가깝다. 만약 과거를 부정당한 상태에서도 이를 이겨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도가 될 것이다. 깊은 슬픔은 나누어지기보다 모두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존속하는데, 영화에 더 많이 교감해서 신경감응을 일으킬수록 더 많은 것을 영화에서 나누어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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