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는 망했는가, 아니면 깨끗해졌을 뿐인가?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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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은 한국영화 최악의 한 해로 남을 것 같다. 우선 2012년부터 2024년까지 매년 나왔던 천만영화 기록이 깨졌다. 중간에 판데믹인 20년과 21년에도 천만영화가 없었지만 이 기간은 봉쇄가 이루어졌으므로 논외다. 중요한 건 봉쇄가 점진적으로 해제된 2023년에 천만영화가 나왔다는 점으로, 한국 영화는 판데믹의 충격에서 벗어나며 자생의 힘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판데믹 기간에 연기됐던 창고 영화들이 각자의 자리에 배급을 마쳤음에도 그에 따른 반향이 회수되지 않았다. 투자를 진행했던 것들이 연달아 실패했고, 시장이 판데믹 이후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전이라면 자신들이 먼저 나서 트렌드를 만들만한 힘이 있었지만, 분산화된 취향이 그대로 고착화된 현시점에서는 흩어진 목소리를 한곳에 모으기가 어려워졌다. 이 사실이 가리키는 건 한국영화가 망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동안 돌아가던 사이클이 어긋나면서 점점 평형을 이루기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배급 권력에 균열이 생기면서 각자 자기만의 ‘극장’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극장가의 붕괴 반대편으로는 ‘마이크로시네마’의 등장이 있다. 이 둘을 상호관계에 두기는 적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중앙이 정치적으로 불안을 겪을 때 지방에서는 항상 호족들이 등장해 왔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물론 한국영화의 가장 ‘완벽한’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가 호경기와 불경기만 있듯, 최대한 평형에 가깝게 물가를 유지하려는 게 정부의 목표라면 마찬가지로 영화시장의 논리는 ‘망했거나’ ‘잘나가거나’ 둘 중 하나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른바 한국영화가 지금 ‘망했다’고 보아야 하는 건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고점을 찍었던 것만큼의 반동일지도 모른다. 다만 경제학적인 면으로는 평형을 이탈하기까지의 기간이 너무 가팔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실 “한국영화 망했다”는 말에 의문이 생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 산업이 불경기인 것과 한국영화 자체가 망했다는 말은 서로 같지 않다. 관객 수가 작품성을 대변하지 않듯이 극장의 쇠락이 한국영화의 부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영화는 점점 더 지역 네트워크에 유통되며 집단에서 군락으로 이동하는 것 같다. 평론가들이 올해의 한국영화를 꼽는 자리에서 극장가의 작품들이 사라졌지만 반대로 독립영화들이 자리를 채운다. 주요하게 언급할 만한 게 없어서인지, 아니면 독립영화가 약진해서인지를 분간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건 ‘거대 블록버스터’가 사라진 자리에 ‘작은 이야기’를 하는 독립영화들이 너도나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구분하는 건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자본이나 유통하는 경로인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지를 따른다. 가령 연말에 개봉해 올해의 한국영화 자리에 오른 윤가은의 <세계의 주인>은 쉽게 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다. 영화는 무언가 사건을 마주함으로써 한 세계가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들여다보는 이는 자신 또한 상처를 대가로 바쳐야 한다는 공식을 유지한다. 내면의 작은 것을 가장 크게 확대하는 이 화법은 일종의 현미경처럼 한 세계를 들여다본다. 이 안에서 우리는 매끈한 사물에도 사실은 병균이나 미생물, 여러 다른 불순물이 섞여 있음을 알게 되어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단순히 ‘표면’과 분간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일컫자면 한국영화는 그저 단순히 망하기만 한 게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 상처를 맞대는 법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모두가 상처받지 않을 방법이란 없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이들 상처에 기대 살아가는 것,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상처를 마주하며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판데믹 시기에 비말 감염을 막고자 착용했던 마스크가 서로의 입을 아직 막고 있는 게 아닐까? 대화와 소통은 ‘완벽한’ 위생을 전제하지 않는다. 카페에 앉아 서로 대화하다 보면 침이 튀거나 한 공기를 마신다거나 하는 건 부득이하다. 무언가 Zoom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대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흥미롭게도 판데믹 시기에 이루어졌던 극장 배제조치는 이와 같은 점과 연결돼 아래와 같은 단상을 제공한다. 판데믹 시기에 사람들이 극장에 가지 않던 건 혹시 모를 감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감염’은 같은 곳에 모여 있기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는 영화를 보며 감정적으로 동조되는 관객성을 연상케 한다. 극장에서 관객은 타인의 감정에 쉽게 휩쓸린다. 혹은 자기보다 더 큰 화면과 소리, 공간의 크기에 압도돼 스크린에 삼켜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극장은 어느 정도 감염을 전제하며 방문하는 곳이었고 마찬가지로 ‘상처’를 전제했다. 우리는 흔히 극장이 일방적인 소통의 장이라고들 여기지만 이 공간의 진가는 서로에게 쉽게 침투할 수 있는 환경, ‘감염’이 수월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판데믹 시기에 극장 수익이 줄었던 건 어찌 볼 때 당연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착용한 마스크는 일종의 장막이 되어 영화의 공간을 입안으로 축소했다. ‘스크린’을 기준으로 전개되는 공간이 마스크에 대체됨에 따라 ‘침투’는 사적인 게 됐다. 이제 사람들의 과거는 서로 간에 섞이기보다 각자가 소유하며 관리하는 재산이 됐다. 문제는 이로 인해 ‘마스크’를 끼지 않은 일이 마치 알몸처럼 느껴지게 됐다는 점이다. 이제 사람들은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고, 나누는 일을 어렵게 느끼게 됐으며 이에 따라 ‘극장’은 무언가 고해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극장이 고해의 장소가 되는 것까지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사실 극장이 결국 사람들을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곳임을 고려하면 극장은 회복을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속 시원히 마음을 털어두고 다시금 현실에 돌아간다면 그것만큼 이목을 끄는 기능이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극장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보다 단순히 자신이 할 말만 하고 나설 뿐이라면, 오히려 우리는 상처를 대하는 법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은 채로 말하는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서 말하는 건 화면을 보지 않고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적어도 마스크를 끼던 시기에는 자신이 하던 말이 곧바로 내면으로 되돌아왔지만 벌써 수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이미 마스크를 낀다는 사실이 어색해졌다. 이런 뜻에서 상처를 직면하지 않는 일이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가령 <세계의 주인>에서는 세차장 장면이 평자들 간에 유의미하게 언급되고 있는데, 이 장면은 결국 자동차 안에서 이어지는 말이 외부로 새 나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분히 영화적이다. 마치 마스크를 낀 듯이 발화가 작중 세계에 전파되지 않으며 이 말이 전달되는 건 바로 옆의 어머니와 바깥의 관객뿐이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자동차가 하나의 극장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주인공과 어머니는 극장에 앉아 나누어지지 않는 상처를 고하는 셈이다. 문제는 이렇게 고해성사를 하는 일이 결국에는 상처를 공동체와 나누기보다는 혼자 감내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계의 주인>은 인물이 앞으로 나아갈 수도 과거를 돌아볼 수도 없는 애매한 위치에 자리함에 따라 결국 그녀 자신의 자리를 ‘영화의 자리’에 한정 짓는다. 영화는 이처럼 작품의 화자를 영화와 동일시함에 따라 그녀의 신분을 위생학적으로 분리해낸다.


이 이야기를 곱씹게 되는 건 ‘위생’이라는 말이 유난히 아프게 다가와서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위생학은 외부와 멸균적으로 분리돼 내부를 어떠한 징후가 번지지 않게 하는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영화를 안팎으로 분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이는 영화와 현실이 기본적으로 상호관계에 있어서다. 현실이 영화에 영향을 주고, 영화는 현실을 본받는다. 이 둘이 서로 독립적인 개체로 있기는 해도 결국 서로가 같은 곳에서 대화를 주고받기에 일정 정도의 영향력이 발휘된다. 무작정 소통을 해야 한다고 권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만약 영화가 하나의 자동차라면, 영화는 분명 폐허가 된 세상을 차분히 견뎌낼 수 있을 테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자동차는 항상 새 이야기를 끌어내는 동인이자, 카메라를 대신해 인물의 시선을 사로잡는 역할을 했었다. 이 과정에서 자동차를 마치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 바라보면 <세계의 주인>에서 자동차 장면은 무언가 현실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이 세계가 바라보는 영화란 역쇼트를 허락하지 않은 채 상처를 혼자만의 것으로 갖는다. 주변인에 마음을 나누어 연대하기보다는 마술처럼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처는 이 세계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기원 삼은 ‘본래’이기 때문이다. 모든 어른이 아이였던 시절을 잊지 않고 살아가듯 우리에게 과거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는 다시금 새로운 과거가 대두할 뿐이다. 현실과 영화의 관계에서도 이런 점이 되풀이된다. 영화에서 상처는 거진 과거와 같은 말이다. 모든 영화는 하나의 상처로서만 존속하며 여기엔 단지 그걸 안으로만 가두거나, 아니면 밖으로 꺼내어 상담하던가 둘 중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한국영화를 두고서 망했다는 표현을 써야 한다면 바로 이런 뜻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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