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눈길을 잡아끈 단어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애매필’이라는 말이다. 정의에 따르면 이는 ‘애매모호한 시네필’의 줄임말로, 시네필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이 부담스럽기에 대안으로 이를 선택했다고들 한다. 이 말을 들으면 누군가는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특정한 무언가로 정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할 것 같다. 자기표현에 대한 욕구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네필이라는 말이 무언가 전문성을 지닌 집단으로 바라보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시네필의 속성을 참칭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네필은 그저 일상보다 영화에 관한 활동을 더 우선시하는 집단일 뿐이다. 이처럼 시네필이 영화를 애호하는 집단임을 고려할 때, ‘시네필’에 못 미친 정도로 자신을 두는 건 무언가 실패나 패배의 맥락에 더 가닿는다. 자신은 시네필이 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영화의 주변부에 남고 싶다고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바라는 집단을 모방해서라도 그에 소속되고 싶어한다. 아이들이 어른의 화장을 따라하거나 하는 식으로 ‘어른’을 흉내내는 걸 떠올리면 된다. 재벌들이 입는 옷이나 화장품 등을 소비함으로써 재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명품가방을 구매함으로써 해당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를 몸에 두른다. 그런데 애매필은 영화를 보면서 그런 영화를 소비하는 집단으로 남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영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시네필 집단과는 명확히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 이와 같은 반응은 다소 이질적이다. 영화를 누구보다 좋아한다면 영화와 얼굴을 맞대고 싶어하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왜 애매필은 영화 앞에서 누구보다 진심일 수가 없게 됐을까? 만약 이들이 영화에 진심이 되는 일에 ‘실패’했다면, 이러한 일은 말끔히 이해된다. 문화의 중심에는 항상 열렬히 애호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들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이 세계를 지켜야 한다고 다짐한다면, 애매필은 그렇지 않다.
미디어에는 뛰어난 일부만이 노출된다. 만약 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수면이라면 이 표면장력을 뚫고 나오는 건 최후의 승자일 것이다. 절대다수는 이 아래 잠들어 판판한 세계의 일부로만 다뤄질 뿐 별개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시네필이라는 말은 개인을 대변하는 말도 아니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도 아니다. 우리가 지구에 살고 있지만 정확히 지구인이라고는 하지 않듯 말이다. 다만 문화를 애호하는 삶 안에서도 자신이 바라는 모습에 가까워졌는지를 생각해볼 수는 있다. 이 모습은 어디까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감각으로 전제하는데, 여기서 중앙과 변방의 개념이 성립한다. 마치 겹겹이 벽으로 둘러싸인 세상처럼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서로 다른 문화와 층계가 자리하며 심각한 경우에는 꼬리칸과 머리칸은 아예 평생을 만날 일이 없기도 하다. 아마도 ‘애매필’이라는 말은 이들 시네필이 자기들과는 서로 다른 종이 아닐지와 같은 의문을 전제하는 것 같다.
이를 테면 이를 전통적인 국가와 거주지의 형태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중세 국가의 도시는 성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외세의 침략이 벌어질 때 가장 안전한 성 안이 인프라 면에서 ‘우수’한 곳으로 여겨졌다. 덩달아 집이나 토지, 거주민이나 지배층의 등급도 높아져서 성을 중심으로 상류층과 하류층이 나뉘는 결과를 낳는다. 애매필은 이 중에서 성 안에 들어가 살지 않는 형태의 삶을 가리킨다. 이들은 문화 자본이 없거나, 아니면 이를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성 밖에 살기를 선택한다. 한편으로 성 안에 사는 일은 ‘시골쥐와 도시쥐’ 일화에서 말하듯이 인프라가 우수하지만 반대로 언제든지 사망할 수 있는 그런 삶이다. 우리는 화려하게 살다가 죽거나, 아니면 변방에서 조용히 살며 여생을 보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굳이 시네필이 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영화를 누리거나 즐길 수 있는 상황에서 문화의 최전선에 자리하는 건 너무 위험성이 크다. 때로는 휘말리기 싫은 일에도 스트레스받아야 하고,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일상을 포기해야 한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런 일은 미디어에 화려하게 등장하다가 어느 순간 빠르게 잊혀지는 현대 인플루언서군의 생태계에 기인한 것 같기도 하다. 통상 시네필에 관한 이미지가 미디어에 나오는 인플루언서의 이미지와 맞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무언가 불안정한 삶을 산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인플루언서나 시네필이나 결국 ‘내일’을 위해 살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향이 강하니 말이다. 이런 점이 ‘크게 한탕’으로 묘사된 건 몇 년 전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다. 이 작품은 피폐해진 미래의 한복판에서 성공을 꿈꾸던 한 소년이 끝내 비대해진 몸을 감당하지 못한 채 사망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소녀는 소년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말하지만, 반대로 소년은 이곳이 아니면 일말의 신분상승 기회도 없다고 말하며 도시에 남기를 택한다. 그 결과 잠시나마 도시의 중심에 섰던 소년은 자기만큼이나 우수한 호적수를 만나 장렬히 산화한다.
다른 작품 하나도 생각해보자. <메이드 인 어비스>는 여러 심계로 이루어진 공동을 배경으로 한 만화다. 이 만화에서는 하계로 갈수록 다시 위로 돌아올 수 없다는 속설이 있는데, 하계로 갈수록 점점 환경이나 생물군 등이 변해서 정보가 제약된 이들로서는 이런 환경에 ‘대응’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받은 일부는 이런 환경에서도 저항력을 지닌 채로 살아남는데, 이 과정은 점점 더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군중의 모습이 이렇다. 무언가에 미친 이들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구석이 하나쯤은 있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일반화할 수 있는 구석이 사라지게 되며 반대로 깊은 심도에 있던 이가 온전하게 밖으로 걸어나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엣지러너>의 결말이 소년의 비대해진 신체가 부서지는 것에서 끝나듯이 심계로 갈수록 점점 더 기이하게 뒤틀린 생명체가 등장해 주인공 일행을 위협한다. 그렇게 보면, 시네필이 되기를 주저하는 건 그와 같은 신체 변형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애매필이라는 말을 ‘~되기’의 실패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은 누구든 간에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이렇게 변형된 신체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한번 내려간 이가 다시 표면에 올라오기 위해서는 이미 벌어진 문화격차에 따른 상승부하를 견뎌내야만 한다. 누군가는 타인 도움 없이도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갈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더 좋은 영화에 대한 갈망으로만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볼 수 없고, 커뮤니티를 찾아다니며 동료를 만들거나 탐사 장소에 대한 주의점이나 예비 탐사를 나서는 등 ‘생존’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런 영화에서 다시 빠져나오는 방법을 익히는 일이다. 특히나 조금의 실수로도 금세 벼랑에 내몰리고, 순간의 선택으로 모든 걸 망쳐버리는 세상에서 이런 점을 각별히 더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숱한 ‘엣지러너’의 최후를 보아왔고, 같은 길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들었던 마음이, 그 풍경이 구전으로 전달되지 않으니 직접 가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마음은 전해지지 못한다. 애매필은 그런 위험을 굳이 감수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게 설사 거짓이더라도 자신이 느꼈던 마음만큼은 진짜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니 ‘진짜’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안전함에 머무르기를 택한다. ‘애매하다’는 건 어느 하나를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아직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 말은 애매필이라는 말을 스스로 사용하는 일에 관한 의문을 낳는다. 만약 시네필이 우수한 영화팬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오타쿠’ 집단 즉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집단을 가리킨다면, 이러한 비정상성을 모방하는 애매필 집단은 정말로 기이한 게 아닐까. 힙스터라는 간단한 말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이 말은 변방에 선다는 본래 뜻에서 벗어나 버려서 있는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