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다들 한 해 동안 보고 들은 일을 정산하는 시간을 갖는다. 영화계에서는 사사로운 리스트를 작성해 서로 쪽지처럼 돌려보는 일이 하나의 연례행사가 된 것 같다. 개인의 취향을 엿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사적인 무언가를 돌아볼 수 있어서 저마다의 답이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올해 본 영화를 돌아보면 몇몇 작품이 문득 떠오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체인소맨: 레제편>이다. 작품을 꼽은 건 순전히 리스트에 넣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업성의 끝자락을 달리는 이 영화는 340여만 관객을 달성하며 올해의 영화관객 순위 3위에 올랐다. 참고로 1위인 <주토피아2>는 640만명으로 1위지만, 한해를 일주일 남긴 시점에서 4위 <영웅>의 327만명 기록이 경신될 리 없으므로 이대로 ‘귀주톱’ 트리오가 순위권을 달성하는 게 확정이다. 특히 이 이야기가 충격적인 건 올해 8월22일 <귀멸의 칼날>이 첫 운을 뗀 후로, 연말까지 애니메이션이 연달아 개봉하며 1~8월 간의 흥행 공백을 깨버려서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해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한해를 평정해버렸다는 것이다. 극장가에 빈집털이를 했다고도 보이지만 반대로 특출난 하나가 자리 잡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관객을 하나로 통솔할 메가히트작이 부재했다. 더 나아가 <레제편>의 흥행은 아래와 같은 질문을 남긴다. 극장가의 수입은 예상관객층에 따라 결정되고, 이에 따라 성인등급보다는 전체이용가나 12세 관람가는 선호하는 편인데 <레제편>은 성인영화였음에도 340만 관객을 동원했다. 성인영화이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이 흥행한 건 당최 무슨 이유일까? 소수의 취향을 저격하는 특정 영화들이 크게 흥행한다면, 반대로 모두에게 먹힐 메가 히트작을 만들기보다 적당하게 취향을 타는 작품 여러 개를 만드는 편이 더 유리한 게 아닐까?
영화 한 편에 이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할 것 같은 작품들을 보러 간다. 둘다 비슷한 말 같지만 다르다. 전자가 시간 날 때 대충 일정에 맞는 영화를 골라서 방문하는 쪽이라면, 후자는 영화 한 편을 보려고 극장가에 시간을 내어 방문하는 쪽이다. 영화 값이 비싸진 것도 있지만 시대의 흐름 쪽이 점점 더 실패를 지양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자신이 들인 시간에 비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애초에 처음부터 선택이 ‘실패’했다고 여긴다. 그래서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할 것 같은, 혹은 좋아하게 될 작품을 미리 염두에 둔 채로 방문하며 이 과정에서 주위의 반응은 중요한 지표가 된다. 쉽게 말해 ‘영화’는 어떠한 조우가 아니라 ‘예측’과 결론의 범주에 들어선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갖는 기대치를 안은 이 영화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보고 싶은 걸 충실하게 보여주는 게 ‘옳다’고도 보이지만, 반대로 그럴 뿐이라면 영화는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자문하게 된다. 더는 새로운 걸 보여주지 못하는 영화란 <칠드런 오브 맨>처럼 더는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세계와도 같다. 거대한 죽음, 세계의 멸망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가운데 아기의 탄생은 모두가 알던 그 세계를 깨부순다.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보여주는 게 바로 영화의 역할인 셈이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기억을 바깥에 운반하게 된다. 그게 어딘지는 몰라도 내부에만 두면 언젠가 멸망할 세계니까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이른바 ‘숏’이라고 하는 구멍이 뚫리면서 바깥에 자신을 데려간다. 이런 점에서 예측을 벗어나는 영화는 자신을 예측할 수 없는 세계로 데려간다. 이 안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인지를 더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가 갖는 반향성이 오히려 관객의 현실에로 펼쳐지는 인상이 있다.
<레제편>의 흥행은 단순히 일본영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로만 프레이밍 될 수 없다. 이른바 ‘바깥’을 돌려주는 게 영화의 역할이라고 본다면, 모두가 알 것 같은 영화들의 점진적인 흥행은 그리 긍정적인 현상이 아니다. 뻔하고 익숙한 것도 영화로서의 즐거움이 있지만, 반대로 영화가 더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할 때 이 세계는 빛을 잃는다. 문득 영화를 보고 나서 ‘좋았다’고 느끼는 일이 점점 더 실패와 멀어질 때 이 세계는 자신이 탐구할 수 있는 바깥의 영역을 잃는다. 대개 ‘좋았다’고 느끼는 영화는 모든 장면이 아니라 특정한 장면 하나가 기억에 남는 때가 많다. 이는 기본적으로 삶의 모든 순간이 즐거움이나 슬픔 같은 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감정도 영화도 모두 한순간이다. 순간을 마치고 나오면 우리는 다시금 시간의 연속 안으로 내쳐진다. 영화가 특정한 시간을 지속한다면 반대로 이 안에서 발굴해낸 감정이나 기억도 그런 지속성에 지배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른바 순간이 전체를 지배하고, 프레임이 세계에 바깥의 기능을 부여한다. 이 분단에서 지속되는 게 내부인지 아니면 바깥인지를 알 수 없어서 우리는 바깥으로 나서보려 한다. 시간이 달리 흐르는지를 알려면 자리를 나서 걸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전혀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영화를 찾아 나서는 쪽이 타당하다. 하지만 <레제편>은 자신이 좋아할 것 같다고 여겨지는 영화에 가까워서 무언가 ‘영화’를 발굴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부차적인 말을 제외하더라도 이 안에서 ‘상상’은 철두철미하게 스크린 내부에만 한정되며 도리어 이 꿈은 영화와 함께 무너지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런 뜻이라면 체인소의 악마는 어떠한 종류의 ‘바깥’을 상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죽음을 마주하게 한다는 뜻에서 ‘영화’를 안에 남기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의 붕괴와 매몰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한 영화가 여전히 영화 안에서만 끝나야 한다는 관점이 있다.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영화’는 일종의 물질 분해 그릴처럼 작용한다. 허가된 감정이나 사고만을 통과시키는 이 그릴에서 ‘꿈’은 영화가 자신의 사상을 밀수하는 수단이다. 영화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이 현실에 나가 자유를 얻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꿈’이라는 인상을 남기게끔 바깥을 상정한다. 모든 영화는 빠져나오는 길이 있고, 이 길은 관객이 들어갔던 입구와 서로 같은 구멍이다. 결국 모든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제편>에는 무언가 꿈을 꾸는 인물이나 장면이 없다. 덴지와 마키마가 서로 무언가 ‘영화’라고 느낄 만한 걸 찾으러 다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어느 낯선 장면 앞에서 멈춘다. 팬덤이 레제와 마키마가 감명받은 작품으로 지목한 <병사의 노래>의 이야기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병사는 어머니가 사는 집을 고치려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몇몇 사건들을 겪으면서 집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사라져, 바라던 수리는 하지도 못한 채로 다시 부대에 복귀한다. 영화는 꿈의 세계에 머무르지도 못하고, 바깥에 나서지도 못하는 인물상을 보여준다. 만약 영화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고 그 과정에서 잠시 꿈에 머무르는 것이라면, <레제편>은 한 세계가 좌절되는 일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관해 말하자면 <레제편>을 보며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영화의 후반에 나오는 전투씬이다. 두 사람이 물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가운데 화면이 암전된다. 다시 눈을 뜬 레제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낀다. 이 장면은 앞서 의식을 유지한 채로 꿈의 세계로 잠수하던 수영장 시퀀스와 대비되지만 한편으로는 덴지와 마키마가 나섰던 극장을 연상케 한다. 불이 꺼졌는데 어떻게 영화가 중단되지 않고서 계속되는 것일까?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만화의 1부 후반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체인소의 악마를 만난 그녀는 재미없는 영화는 사라지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의 연속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면 결국 꿈에서 깨어나야 마땅한데, 밝거나 즐겁지 않은 꿈은 그저 악몽이기만 할 뿐 어떤 의도로서 현현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레제는 밝지 않은 꿈에 깨어났다. 아마도 레제는 이전 전투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 수 있다. 화면이 암전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관객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극장을 마주하고 싶었을 수 있다. 영화를 볼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은 반대로 스스로의 삶이 나락에 떨어지는 때이기도 하다. 영화가 힘을 얻을 때 현실은 거울 속의 낯선 자신을 보는 듯 변해버린다. 반면 불이 꺼진 극장은 있는 그대로의 영화를 남기기에 자신이 바라던 세계 품에 안길 수 있다. 이 세계에서는 정말로 온전한 형태의 죽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눈을 뜨면 현실이고, 다시 감으면 꿈으로 떨어질 뿐이다. 악마들이 지옥과 현실에 현현하는 <체인소맨>의 세계처럼 극장은 줄곧 바깥의 자신, 반대편의 ‘나’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세계의 바깥이 있다고, 문을 열면 또 다른 무언가를 마주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모든 건 등 뒤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뒤로 돌아갈 것인가?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 우리는 꿈을 저버릴 권리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무리 꿈이 꾸는 자의 몫이라지만 그런 논리라면 우리에게 영화를 선택할 권리 따위는 없다. 재미없는 영화라도, 이야기 전개가 이상해도 그냥 이건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자리에 남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객은 최후의 승객이면서, 감시를 멈추지 않는 사람, 혹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