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떠났지만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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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에 따르면 <여행과 나날>의 제목 원안으로는 ‘여행은 떠났지만…’이 있었다고 한다. 이전에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했던 언급이 있으니, 아마도 이 제목은 그 점을 염두에 둔 것일 테다. 그는 오즈의 영화에는 항상 ‘…했지만’이라는 주제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다”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드라마 장르의 핵심 공식이기도 한 이 주제의식이 <여행과 나날>에서도 반복된다. 여행에 나서는 일은 어떠한 종착지를 동반하지 않는다. 차분히 거쳐가는 과정들은 바라던 곳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이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안정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중요한 건 이 ‘했지만’이라는 용어가 배반의 트루기를 내포함으로써 ‘실패’의 자장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이 ‘했지만’이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But’으로 풀이된다는 걸 생각하면 이를 이해하기 쉽다. 이 단어는 항상 자신의 앞에 무언가를 둔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관객의 앞에 자신을 (스크린으로서) 두기에 그 자체로 ‘했지만’이 될 수 있다. 대개 영화는 ‘실패’로서 이해되는 면이 있지만, 반대로 실패로 이해되고자 눈 앞의 관객을 필요로 한다. 이를 따라 생각하면,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우리가 ‘실패’를 대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실패를 인정하는 일은 영화가 존재하는 방식과도 같으며 여기서 ‘바깥’은 그런 실패가 존속하는 과정이나 절차를 잘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란 건 ‘했지만’을 통해 현실과 결합한다.


영화가 항상 실패의 감정으로 이해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믿고 싶어한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 우리가 실패라고 말하는 건 단순히 어떠한 행위를 지시하거나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성공’으로 이해되는 기본 상태를 동반한다. 즉 일단의 ‘판단’이 요구되는 것이고 바라보기에 따라 당락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시험에서 낙제를 했다면 대개는 ‘실패’로 여기겠지만 만약 그게 전시상황에서의 징집 같은 것이라면 오히려 반대로 이해될 공산이 크다. 이때의 ‘실패’는 무언가 구덩이에 빠진 듯한 느낌보다는 나아가야 할 현실에 ‘반’함으로써 다른 길을 열어준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에서 ‘했지만’은 단순히 현실의 대체재나 다른 판본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무언가를 하는 법은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일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영화가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고쳐 말한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만큼이나 현실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 어떤 영화도 현실보다 행복할 수 없고, 슬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도리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보게 되는 쪽은 관객이 있는 현실이 아닐까. 영화가 항상 최악의 경우를 고려한다면, 현실에서는 그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관객은 무엇이 최선인지를 항상 고민하며 살아야만 한다. 영화가 개연성을 따라 가능성을 추리한다면 반대로 현실에서는 실패에 ‘반’하는 선택지를 잔뜩 집어들고서 나아간다.


영화를 본다는 건 형식만으로도 무언가 실패를 요구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실패를 경험한다. 영화 속 현실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애초에 존재했던 적이 없으니 이를 닮으려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또한 앞이 가로막힌 이곳에서 ‘전진’을 말하는 것도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끝나는 때, 꿈에서 추방된 우리가 그 꿈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른’이 되면 아이들은 원더랜드에서의 즐거운 한때를 잊는다. 단적으로 보면 이렇다. 현실은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실패’를 피해 달아나는 것 뿐이다.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마음에서 도망치는 것, 영화는 이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며 그렇기에 ‘했지만’이라는 조어가 된다. 그런 점에서 미야케가 말하는 <여행과 나날>의 출발점을 짚어둘 만하다. 그는 “놀라워야 마땅할, 아름다워야 마땅할 사물이 즉각 말이나 의미에 구속되는 것에 대한 깊은 피로의 감정”을 치유하는 프로세스로 영화의 기능을 든다. 만약 영화가 이미지를 집행함으로써 현실에서는 파악되지 않는 의미를 구체화한다면 이는 현실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말이나 의미를 ‘언어’로서 구속하기 때문에 다소 ‘피로’한 것이며 이에 작중 인물의 행동방향은 그와 같은 피로를 벗어나는 쪽이 된다. 설명을 따르자면 <여행과 나날>의 여행은 그러한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 ‘해체’의 프로세스다.


이야기를 다음으로 옮겨서 이 ‘해체’에 관해 말해보자. 미우라는 설원을 걷는 그녀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성공과 실패 간의 진자운동에 빗댄다. 경주에 빗댄다면 중앙선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게 아니라 트랙 사이를 침범하며 현실과 영화의 자리를 오가는 셈이다. 이를 묘사하면 미야케의 말마따나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에서의 ‘이방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방인이란 철두철미하게 바깥에 소외된 존재가 아니라 주변부를 어슬렁거리면서 내부를 관측할 수 있는 정도의 외계에 자리잡은 존재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내부를 두고서 자신이 속해있지 않다는 뜻에서 ‘텅빔’이라는 용어 사용이 가능하다. 대개는 이 말을 아무런 것도 속해있지 않다는 점에서 항구적인 바깥으로 보겠지만, 하마구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틈을 두는 건 (…) 저절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영화에는 수미상관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그에게 ‘반복’은 다시 내놓는게 아니라 내부에 다시 속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이 진자운동은 이야기가 무르익기 위해 경험하는 ‘실패’의 시간이자 ‘해체’의 과정이다. 실패는 반대편이 아니라 성공을 수행하는 초입에 있는 셈이다. “성과물로서의 영화는 인간이 보는 한 ‘의미’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영화는 기본적으로 “아무리 얌전하더라도 활극 일 수 있”으며 관객의 역할은 그 “’인과’의 연쇄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는 특히 하스미가 말하는 ‘활극’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데, 하마구치가 하스미의 제자인 기요시의 제자임을 고려하면 그리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스미는 활극의 필수요소로 ‘남녀’의 껴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취향을 감안하면 대개는 ‘웨스턴’을 가리키며 웨스턴이란 아직 개척되지 않은 영역을 바라보며 집을 떠나는 이야기, 즉 ‘횡단’의 서사를 지닌다. 하스미에게 활극이란 기본적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딘가로 떠나는 이야기 즉 ‘여행’에 초점이 있다. 이런 가정하에 하스미는 남녀간의 껴안음에서 숏의 포착을 발견한다.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지만, 반대로 내부에도 이끌리는 이런 모순을 ‘껴안음’이라는 중간지점으로 갈음하고자 했다. 한번 뒤를 돌아보며 고향을 떠올리지만 그럼에도 줄곧 나아가야만 한다. 바로 여기서 하스미가 말하는 ‘숏’의 개념이 등장한다. 하스미는 활극에서 ‘숏’의 기능이 대상을 투과해서 관통하는 시점이 아니며, 한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숏이란 무언가를 항상 등지는 일에 의미가 있으며 이런 뜻에서 ‘인과’란 기본적으로 배반을 통해 작동한다. 삶에는 항상 실패가 있지만 영화는 이를 등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영화란 현실이 안길 수 있는 무대가 되어주는 것, 현실이 ‘반’할 만한 무언가여야만 한다. 이 활극들이 낭만적이면서도 동시에 허구로 느껴지는 건 그때문이다. 현실이 영화에 반하고, 영화는 현실에 반한다. 이 둘은 서로 합의 관계에 있다.


현실의 가장 피로한 점은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글쓰기처럼 감정을 적확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선호되며 문자 이외의 ‘비언어’적인 수단은 다소 지양된다. 누군가는 비언어 소통이 인간미가 없다고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굴에 쓰인 행간을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문자가 발달한 건 서로 간에 자칫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와 비슷하게 영화란 이런 부류의 ‘오해’를 방지할 요령으로 제작됐다. 현실에서는 자칫하면 크게 번질 오해가 영화에서는 미학의 일부로 이해된다. 오해가 발생하더라도 이를 ‘미학’으로 받아들여서 결과가 차단된다. 영화와 현실의 관계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다. 현실이 말하는 실패는 결코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다. 오해가 발생하면 그냥 있는 그대로 관계가 끊겨버리는 때도 잦다. 하지만 영화가 있다면 이런 상황은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현실에 반하는 영화는 우리에게 돌아갈 길을 만들어준다. 비록 현실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옮기는데 실패하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 판단을 수행한다. 영화는 현실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판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간접적으로 말해줄 수 있다. 영화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속내를 숨길 수 있고, 의도적으로 행간을 지우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도리어 그 점이 눈 오는 날의 여행처럼 지난 날을 다가올 날에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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