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서의 투사주법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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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의 결말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이 난다. “등가교환이다! 네 인생의 반을 나에게 줘!” 이 말은 곧 윈리 록벨에게 정정당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점이 있다. 에드워드 엘릭은 자신의 지난날을 잊지 않기 위해 다리를 되찾지 않았다. 이를 돌려받으면 과거가 사라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오를 잊지 않고자 행위의 대가도 잊지 않는다. 여기서 행위와 결과는 서로 등가 관계에 있다. 하지만 이 행위(과거)와 결과(현재)는 일대일로 교환되는 게 아니라 중간에 시간이 개입하기에 정확한 의미에서의 등가가 아니다. 과거가 현재로 이행하려면 그 사이에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를 없던 일로 한다고 해서 현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며 현재는 흘러간 시간을 내포한다. 생각해보면 이야기란 것도 다 이런 식이다. 처음에 이야기란 건 한 사람이 집을 떠나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일을 단편적으로 서술한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사실을 나열한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고, ‘시간’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사건 간에 징검다리가 되어줌으로써 ‘변화’를 설명했다. 시간이 흘렀다는 건 그 사이에 얻은 게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곧 ‘변화’를 대변했고 그래서 이야기란 건 집에서 출발해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미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무언가 바뀌었다는 점을 암시했다.


이런 뜻에서 영화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 하나 있다. 영화를 거론하면 항상 나오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시간이다. 영화(사진)의 역사는 시간의 개념적인 변화와 맞닿아있다는 것인데, 이 점이 같은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문학이나 연극과 차별화되는 점으로 이해된다. ‘영화’는 일정 시간 관객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지만 반대로 극이 끝났을 때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극장에 불이 켜지면 관객은 자신이 왔던 그대로 다시 자리를 떠나가게 된다. 즉 들어간 곳으로 다시 나오는 ‘등가’ 관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영화가 시간의 흐름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므로 여기서 ‘변화’는 관측가능한 형태로 제시된다. 특히 ‘변화’에 대한 것으로서 관객이 ‘변하지 않는 것’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영화가 말하는 ‘변화’의 기준점은 어디까지나 관객 일반일 수밖에 없다. 이른바 관객은 변화를 목격함으로써 그 자신의 입장도 쇄신하게 된다. 이처럼 시간을 형상화하는 게 영화의 기능이라면 영화란 결국 두 세계가 단순한 등가가 아니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둘 중 하나를 제거하는 것으로 다른 하나를 얻지 못하고, 영화를 떠올린다고 해서 지난날을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영화는 극장을 나오는 경험을 선사하면서 우리 자신을 남긴 현실을 생각해보게 한다. 즉, 순서상으로 영화의 다음에 현실이 오기에 이 둘은 등가 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에 있다.


영화를 두고서 등가를 떠올린 건 얼마 전 방영을 재개한 <주술회전> 티브이 상영을 보면서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투사주법은 영화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술식이다. 1초를 24개 프레임으로 나눠 사용자가 각 프레임을 ‘지정’하는 효과를 부여하는 이 술식은 말 그대로 ‘투사’를 주된 원리로 사용한다. 술자 개인의 구상을 따라 각 프레임이 투사되어 이 동작대로 미래를 수행하게 된다. 여기서 다음 프레임을 설정할 때는 이전 과정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데, 이는 현실의 프레임이 영화의 프레임보다 높기에 영화에 모든 순간이 다 담기지 않는다는 점을 응용한 것이다. 예컨대 영화는 현실과 등가 관계이기보다는 ‘시간’에서 탈각돼 서서히 자기를 잃어가는 존재다. 현실에 어떤 변화가 가해졌음을 드러내는 게 바로 영화인 셈이다. 실시간으로 동작을 예측하며 프레임을 창안하는 방식으로 구현되는 이 술식은 자신이 바라는 현실을 부분적으로 ‘창조’한다는 점에서 ‘바라지 않는 것’을 버리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시간을 ‘잃어버리는’ 건 자신을 더 가볍게 해서 공백의 결로 나아가는 방식일 수 있다. 영화가 없던 곳에서 출발한 영화는 다시금 영화가 없는 곳으로 나아간다. 영화가 어떤 것을 ‘포착’하는 만큼이나 보기 싫은 면에서 고개를 돌린다는 걸 생각하면, 이 술식의 본래 기능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일깨우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모든 것을 담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떤 ‘변화’를 마주해서 ‘이후’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투사주법의 흥미로운 점은 프레임을 강제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장면들을 구상해서 그에 미래를 투사하기만 할 뿐이다. 전적으로 사용자의 예측 능력이 중요해서 무언가 미래를 확정 짓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대가로 술자는 1초를 구상하는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데 이런 점은 영화가 담는 현실이 정말로 등가 관계에 있는지를 돌이켜보게 한다. 가령 최초로 술식을 시전할 때는 발동시간으로 1초를 소비하지만 이를 실행하는 동안에 다음을 구상함으로써 제약이 파훼되는 구조다. 이는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정확히 같은 동작을 구현한다는 가정하에서만 가능하기에 시간을 면밀히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영화’로서의 투사주법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요구한다. 자신이 어떤 시간을 보낼 것인지를 구상하는 능력은 ‘변화’를 파생해서 변하지 않는 것을 지정한다. 이를 통해 상대에 공격을 적중한다고 하는 ‘고정’의 효과가 생겨나는 셈인데, 여기서 우리가 ‘등가’라고 오인할 만한 건 자신의 ‘1초’를 할애해 상대의 ‘1초’에 간섭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영화가 현실을 설명하는 과정에 ‘이야기’가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고 나면 결과적으로 이 능력은 “어떤 세계를 살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어떤 세계를 살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영화란 자신이 바라는 현실의 모습을 끝없이 지정하고 또 연기해야 한다. 관객은 그런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에 이야기로서, 수행주체로서 참여하는 것이고 말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투사주법은 미래를 예견해서 실현하는 능력이 아니다. 등가관계가 아니니까 서로 간에 교환은 불가하며 전적으로 술자의 이야기 능력에 의존한다. 이를 통해 영화와 현실이 서로를 참조하기는 해도 구체적인 교환비를 갖는 게 아니라는 점을 설명할 수 있다. 영화가 이루고 싶은 게 영화 안에서만 존재하는 풍경이라면 여기서 시간의 흐름은 관객에게 있어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가리킨다. 문제는 그런 영화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실패했을 때다. 투사주법은 자신이 지정한 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술자에게 반동이 돌아오는 원리를 지녀서, ‘영화’가 한 현실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못했을 때 그동안의 시간을 역으로 돌려받는 구조를 지녔다. 술식을 이행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면 평범하게 돌려받을 뿐이겠지만, 이를 영화의 사례에 견주어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가 현실을 말하려 할 때 자신이 바라는 현실을 정확히 수행해내지 못하면 영화는 아무런 ‘이야기’도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영화는 있는 그대로 현실을 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의 경과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야기하는 게 불합치할 때는 스스로가 현실에 나설 수 없는 ‘시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영화는 그 무엇으로도 참조될 수 없으며, 오히려 관객의 시간을 현실로 참조한다. 이런 경우 영화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기억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영화에 관한 다양한 생각은 영화를 공부해서만 얻는 구상이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바라보는 기본 틀은 같으며 이를 어떻게 응용하는지만이 다르다. 이미 백년 전에서부터 사람들이 하는 생각은 다들 비슷했다. 현실을 조작하며 개변한다는 뜻에서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불을 끄며 마주하는 몽상이라는 점에서 ‘꿈의 세계’를 떠올리는 등, 영화는 모두가 쉽게 떠올리며 공감할 만한 것이었다. 이런 공감은 이미 문학이 대중 사이에 인기를 얻던 비결이었다. 문학은 특정한 이미지를 갖고 작업하기보다 묘사와 관계라는 연결고리를 토대로 작업했고, 이에 따라 한 개인의 세계와 강렬히 이어졌다. 문학의 장점은 한 세계를 강하게 구속하는 능력, 인형극처럼 직접 상황을 통제하며 관계를 구상하는 일에 있었다. 반면 영화는 자신이 다음 동작을 투사해서 실행하는 과정이 관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참조점’으로 여겨질 가능성을 제공했다. 상대관계에 있는 두 세계는 서로를 참조하지만 그 응용의 방식이 다르다. 영화와의 접촉은 관객에게 일정 기간 생각이 머무는 ‘찌르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이들 관계에서는 영화가 말하는 현실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주류로 부상함으로써 반-영화의 술책을 중점으로 다루게 된다. 만약 영화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런 동작을 수행할 때 이를 ‘이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는 즉 현실의 관계에 있어 관객 스스로가 이를 주도해서 결정해나간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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