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영화, 아귀의 칭얼거림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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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말 중에는 이런 의견도 존재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하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출생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만 하는 현대인에게 발생하는 피폐라고는 해도, 곱씹을수록 뭔가 찜찜하고 가슴이 아프기만 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있다. ‘존재의 이유’를 찾은 이들이 잘 살아갈 것만 같아도, 사실은 그런 생각의 ‘노예’로 사는 건 아닐까. 이들 목적에 사로잡힌 삶은, 바닥에 떨어진 몸을 구해낼 수는 있지만 반대로 특정 반경 밖으로 나갈 수 없기도 하다. 목줄을 맨다는 건 울타리에 들어가는 것과도 같아서, 벼랑에 떨어져도 안전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목을 죄는 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일지를 조금은 더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를 찾는 쪽이 더 억압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산다.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사이에 서서, 무엇이 자기를 이룰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는 이미 태어나버린 이상 그 삶을 지속해야만 할 이유를 찾는다는 점에서 무언가 헛되게도 느껴진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이미 태어나버린 우리에게 ‘찾지 않는다’는 선택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종교에 귀의하든 아니면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든, 예술인이 되어 무언가를 창작하든 간에 ‘존재’는 그 자체로 설명될 수 없어서 항상 다른 무언가의 안에 담겨서만 언급된다. 달리 말해, 무언가에 빗대어야만 자신이 설명된다는 사실이 싫어서 역설적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냥 담겨있다는 것만으로도 여기에는 ‘투명한 막’이, 한 세계의 바깥으로서 제시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한 세계는 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여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막을 찢고 나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분법을 벗어나 존재의 이유가 아니라 경계를 인식하느냐를 두고서도 말을 꺼낼 수 있다. 가령 존재에 대한 긍정을 벗어나 자기를 이루는 영역을 인식하는지가 주된 논점이 될 수 있다. 어디까지가 영역인지를 구분하는 일이 선행돼야만 그런 영역 전체가 자기인지, 아니면 그 안의 중심만이 자기인지를 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가 아무런 형식도 없이 그저 벽 위에 투사되어만 있을 뿐이라고 가정해보자. 영화를 구성하는 요인인 ‘검은방’이 깨어짐으로써 영화를 구분 짓던 경계가 사라진다. 이 안에서 영화는 어떤 것에 반해 감금되어 있지 않기에 도리어 한 세계에 적절히 융해된다. 이처럼 자아가 사라진 영화는 애초에 태어난 적이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영화가 한 세계를 갖기보다 차라리 한 세계에 자신을 봉헌할 때 우리는 “영화를 잃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역을 인식하며 살아가는데 우리는 이를 ‘세계’라고 부른다. 마치 자동차 운전이 차체의 폭을 인식해야 하듯, 인생을 살아가는 건 자기를 중심으로 한 영역을 인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자동차에서 내리는 건 “자기를 잃는다”고 할 만한 게 되며 동시에 태어난 적이 없던 세계로 이행하는 과정이 된다. 어디까지가 자기인지를 알아차리려면 결국에는 막을 찢고 나올 수밖에 없는데, 흥미롭게도 이는 영화가 투명한 막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우리가 영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우리를 붙들면서, 동시에 마음을 찢는 셈이다.


거리감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모성에서 독립해 나오며 여기서는 ‘나’라는 게 성립한다. 이 ‘나’는 다시 모체로 돌아가기를 갈구하지만 이미 세상에 ‘태어나버린’ 주체다. 실존과 본질을 판가름하자면 실존이 우선하는 셈인데, 이 ‘실존’은 우리 자신이 태어난 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이다. 아무런 꿈이 없더라도 일단은 자아를 붙들기 위해 무언가를 창조해내야만 한다. 그런데 삶이 그저 자아를 붙드는 과정에 불과하다면, 자아의 상실을 갈구하는 건 필연이 아닐까. 기본적으로 흩어지려는 것을 붙드는 건 무언가를 줄곧 의식한다는 말과도 같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했다”는 건 이렇게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흩어지는 것들에 대한 저항능력을 상실했음을 가리킨다. 무언가를 ‘붙든다’는 게 힘들어졌으니 그냥 있는 그대로 퍼져서 아무런 것도 ‘감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 테다. 아무런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자아도 흩어지니까 그저 있는 그대로 편하다고 할 수 있고 말이다. 다만 꼭 이러한 산개에 저항해야만 하는 건가. 무언가를 붙들고 서 있는 일의 반대편에는 응집에 대한 해방이나 탈출이 있을 수 있다. 영화를 예로 든다면 영화의 의미를 정의하는 건 어떠한 프레임이 아니라 이를 통해 영화의 경계를 정의하는 ‘나’다. 영화를 붙드는 게 ‘나’니까 마찬가지로 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동일인이다. 영화로서는 자기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말을 꺼내는 게 귀찮을 테니까 차라리 붙들고 있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존재를 부정하는 쪽과 긍정하는 쪽 모두 영화 자신에게 의사를 물어본 바는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특정한 무언가에 집착하는지,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건지를 자문하면 결국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쩌면 평생을 결론 내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꼭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기보다는 그냥 이 사이의 경계에 중점을 두고 싶다. 평생을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면 경계에 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말은 오히려 방에 앉아 웅크린 쪽이 아니라 창문에 기대어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 ‘거리감’을 재는 쪽에 더 가깝다. 애초에 바깥을 내다보는 일도 창문에 가까이 다가서야만 가능할뿐더러,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상태에 후행한다. 영화가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 모습을 가둔 것이라면, 반대로 영화를 보는 일은 우리가 믿고 싶은 꿈들의 일환이다. 여기서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은 이를 실현해가는 일의 연속을 이룬다. 즉 ‘믿는다’는 건 이미 본질을 알기에 그것이 실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따르자면 거리감을 느끼는 건 분명하게도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잘 안다는 점에서 그것을 ‘믿는다’고 보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을 둘러싼 투명한 막은 한 세계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마스크’일 수 있다. 한 사람이 자아를 구성하는 일은 우주의 먼지를 끌어모아 별이 탄생하는 과정이 아니라 안갯속의 세상을 차분히 걷는 쪽에 가깝다.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아도, 이 세계는 자신이 벽에 부딪힐 것을 걱정하기보다 무언가를 볼 수 있음을 믿어야만 한다. 단지 자신이 아는 미래에 반해서만 자기를 구성할 뿐이라면 그렇다.


가령 ‘태어나서 괴롭다’는 말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들에 의해 유발되는데, 존재에 대한 정의가 사라지고 나면 이를 수용하는 주체 또한 사라지니까 ‘괴로움’을 느낄 새도 없다. 이때 우리 자신이 이 세계의 감각을 수용하는 촉삭돌기 같은 것이라면 손상된 곳을 피해 돌아가거나 임무를 분담하는 식으로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오히려 정직하게 존재가 하나로만 규정된다고 보는 쪽이 바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도 사람은 특별할 수 있다는 걸, 존재하는 것에는 꼭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바닥을 딛고 서 있는 것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바로 서기 위해 중력을 이겨내야 하는데 그 결과로 도달한 자리가 바로 삶이다. 아직 사회생활은 잘 못하더라도, 간식을 먹거나 변을 보는 등의 기본생활은 혼자서도 가능한데 이는 기본적으로 삶의 기본 형태가 무언가를 이겨내는 것임을 보여준다. ‘삶’은 무언가를 벌이는 일이면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음이다. 이 안에서 인간은 네 발로 길 때까지 부모의 보살핌을 받다가 두 발로 일어서며 비로소 독립에 이른다. 다른 한편 이와 같은 기립은 ‘선다’라는 것이 어떠한 사건의 발생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가리킨다. ‘일어난다’는 건 사건의 벌어짐 즉 ‘일상’에서의 틈새를 가리키는 것인데, 바닥을 딛고 일어난다 함은 그와 같은 일상의 흐름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의 기립이란 어떠한 사건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의 ‘성장’을 가리키며, 마찬가지로 ‘존재’란 스스로가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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