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할 영화감독을 각자 발견해주었으면 한다. 그때 필요한 건, 영화의 주제 따위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는 점. 무엇을 그리고 있느냐가 아닌,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을 이야기로서가 아닌, 숏으로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하스미 시게히코-
하스미씨의 견해를 참조하다 보면 영화란 건 결국 쉽사리 대체될 수 있는 부류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에서는 대상이 아니라 시점을 강조하고 있어서, 주체에게 그 사실을 전할 수만 있다면 딱히 객체의 구분은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영화를 말하며 다른 무언가를 참조하는 건, ‘영화’로서 대체된 게 아니라 ‘나’의 재발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곳에 중점을 둘 것인지가 중요하다면 이는 곧 자세와 태도의 문제, 어떠한 입장에 ‘선다’는 쪽을 말하니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는 건 ‘영화’라는 매체의 시점이다. 우리의 현실은 앞으로 향하니 자연스레 시간을 따라 ‘미래’를 바라보는 게 된다. 반면 영화의 시점은 만들어진 당시에 고정되는데 이를 언제 돌아보든 간에 항상 같은 이미지를 제공한다. 원칙대로라면 그렇겠지만, 각도를 달리하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건 한스 홀바인의 그림에서도 확인되는바, 영화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다. 이 경우 영화는 관찰자의 시점에 많은 걸 의존하므로 오히려 사적인 것에 가깝고, 타인과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의 ‘잔여’가 되어버린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고 밖으로 꺼낼 수도 없으며 문제로 대해 이를 해결할 수도 없다. 그냥 거기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주체는 ‘자기’를 발견하는 경험을 한다. 문득 물가에 소리를 질렀을 때 돌아오지 말아야 할 목소리가 돌아오는 일이라고나 할까. 이 섬뜩함이 무언가 주체에게 강렬한 모습으로 남아 자아의 일부를 구성하게 됨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다. 다만 생각해보려는 건 그 반대로, 자아에 깊게 박힌 이 숏이 자기를 이루는 일부가 되는 때다. 우리는 이 이물질을 진주처럼 감싸 안을 수 있을까? 이 이물질은 마음의 핵일까, 아니면 배출해야 할 오염물일까.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 말로 꺼내어질 수 없는 경험을 했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영화를 구성하는 중심축이라면 우리는 이를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를 합리적으로 풀어나가는 게 비평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비평은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며 어떤 의견이든 간에 속을 파고들면 결국 화자의 심상세계를 비대화한 것뿐이라는 결론에 닿는다. 그러니까 비평이란 결국 일종의 영역전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특히 이는 영역 안에서는 상대방의 평소 삶과 마음, 행동거지를 반추할 수 있거니와 의견이나 사상에 감화된다는 점도 그렇다. 이야기를 더 풀어가면 비평가는 자아비대증을 필연적으로 달고 산다는 점도 논해볼 수 있다. 무언가 으스대며 자기를 몰아붙이는 것일 수 있고, 혹은 세상에서 도피해 어느 한가운데에 처박히고 싶어하기도 한다. 두 경우에서 전자는 일종의 대리물로서 자아가 탑승하거나 그에 준하는 객체로 사용되는데 보다 흥미로운 것은 후자다. 자기만의 영역에 갇혀 혼자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특히나 그 영역에 바깥으로 드나드는 문이 멀쩡히 있다면, 언제라도 나올 수 있는데 안 나오는 것이니까 무언가 ‘감금’이라기보다는 ‘요양’에 가깝다. 그러니 이런 때에 해볼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비평가는 ‘집’을 짓는 존재라는 점일 테다. 세상에서 도피해 자기만의 영역에 처박히는 일은 자신을 세계에서 분리해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있을 곳이 없다고 여겨서 자기만의 집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다. 밖에서 회유하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만 대개는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이기에 자발적으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몇몇 탐험가가 이곳에 찾아와주지 않는 이상, 숲은 검게 침묵하기만 할 뿐이다.
창작을 두고서 ‘집을 짓는 행위’에 빗대는 건 많은 경우 그런 점을 뜻한다. 자신이 살아가고 싶은 세계를 창조해내는 일이다. 다만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니 모형으로 그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결국 비평이라는 행위 자체도 그럴듯한 유사에만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비평가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여기 이곳에 자리하는 ‘나’는 따로 입증하거나 소명해야 할 이유가 없는 ‘나’다. 하지만 영화는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없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끔 납득시켜야만 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일종의 술어이며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해내야만 한다. 이처럼 자기 증명을 요구하는 영화는 일종의 투쟁상태라는 점에서 서로 간에 시선을 합치시킬 ‘계약’을 필요로 한다. 그런 뜻에서라면 비평은 결국 자기를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타협점, 안과 밖에서의 시선 차로 인해 만들어진 ‘경계’인 건 아닐까. 계약이라는 건 쓰기에 따라 다양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법을 공부하게 되면 가장 처음으로 배우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세계라면, 이를 어떻게 이해하며 소비할 것인지는 비평하기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자신이 새로 만든 세계에서는 작가 본인이 신이니까 그 안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따른다. 비대해진 자아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고, 딱히 사심을 추구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도 별 상관없다. 보다 중요한 건 상대방에 동화할 수 있느냐는 것, 이곳 안에서 들어서면서부터는 바깥을 상상할 새도 없게 하는 일이다. 비평에 정형화된 형식은 있어도 규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비평은 신세계의 신이 되는 일이 되는 것, 그로 인해 비평가는 죄인이 된다.
이는 물론 범죄를 저질렀기에 ‘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의 ‘원죄’에 가깝다. 뻔히 알지만 그게 자신을 이루는 것이기에 쉽사리 손댈 수 없는 게 있다. 척추 신경 근처에 자리 잡은 종양이라던가 하는 건, 제거하기보다 차라리 존속하는 게 더 나아서 이들 종양과 함께 공존하는 편이 권장된다. 마찬가지로 자아를 이루는 것 중에는 역겹거나 구역질 나고, 눈을 마주치기도 싫은 것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이 자신이기에 저버릴 수 없다. 비평의 역할은 이렇게 현실에서는 보여주기 어려운 것이 쉽게 적응하도록 규칙을 새로 쓰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데 현실과는 달리 외면받거나 냉대받을 위험이 없다. ‘영화’가 현실의 뒷면으로써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가 되려 한다면 이 과정에서 관찰과 서술이 병행하는 일은 ‘제헌’이자, 재창기로서 ‘비평’이라는 행위를 존속시킨다. 요는 영화 안에서만 존재하는 풍경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곧 영화가 왜 현실과 합치하면서도 모순되는 지점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모든 영화는 어느 정도 현실을 담는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 사실은 마찬가지다. 바꾸려는 현실이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바꾸고 싶지 않은 게 있어서일 수도 있다. 이는 자기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요약해둔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모든 이들에게는 자기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고는 한다. 그런 와중에도 앞뒤가 맞지 않는 바로 그 중심부에 ‘나’라고 할만한 게 있으며 이게 바로 ‘관객’의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이야기’로서가 아닌 ‘숏’으로 받아들여지는 입장이 바로 ‘나’인 셈이다.
영화 안에서만 자신이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우리가 이를 선호하는 것일 수 있다. 현실에서는 있을 곳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영화에 답을 구하는 건, 반대로 이곳이야말로 자기를 동결할 수 있는 최선이어서일 수 있다. 둘 중에서 들여다보고 싶은 건 후자로, 자신을 구성하는 것들을 말해보고 싶다. 먼저 현실이 앞으로 가는 사이 영화는 과거에 머무른다. 달리 표현하면 영화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현실은 바로 그 시점에서만 열리는 특수한 사례의 통로에 해당한다. 그래서 같은 때, 동일 장소에 가려고 다양한 방법으로 영화를 생각하지만 이런 시도는 쉽게 좌절돼버린다. 그저 ‘숏’으로 던져진 이 풍경은 우리에게 영화를 대하는 태도인 ‘선다’를 선사하기만 할 뿐이다. 많은 경우 영화에 매료되는 건 자신이 특정한 관점을 돌려받는 일이 어떠한 ‘이해’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있지만, 무언가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이를 영화가 말을 들어준 결과로 여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는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싶어하는 것, 현실의 뒷면을 안고 싶어하는 쪽에 가깝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보내는 시선일 수 있지만 어쨌거나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이를 ‘이해’의 영역에 들이려고 한다. 영화가 과거의 유산에 불과함에도 이를 현재를 구성하는 유인 삼는 건 어찌 볼 때 이상한 일이지만, 조금만 생각을 더 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점이 있다. 관객이 된다는 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를 발판 삼는 일인 것도 같다.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에 있을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이를 자기 삶의 축으로 가져오는 건 전적으로 ‘숏’의 역할이다. 즉 이데올로기의 반영일 것인지 아니면 자아를 보존할 것인지를 선택해서 구성하는 게 바로 이들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