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입거나, 미국을 입는다

프랑스를 입거나, 미국을 입는다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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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라는 말에 관해서는 이런 반문이 달리고는 한다. 동아시아의 세계관에는 ‘유교’가 공통 사상으로 깔렸지만 정작 우리는 이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확실히 유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의미에서의 ‘활동’은 아닌 듯 하나, 차분히 돌아보면 삶의 많은 면에 자리 잡고 있다. 신의와 효, 충과 같은 맥락이 그러하며 이는 특히 종교와 철학이 서로 분리되지 않던 초창기 모습을 많이 갖고 있다. 이 점에서 생각해보고 싶은 건 우리가 한 집단을 지칭하는 단어에 관해서다. 가령 시네필이나 오타쿠, 힙스터와 같은 말은 무언가 ‘섞이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게 멸칭이든 아니면 경칭이든 간에 서로에 대한 ‘구분짓기’가 행해지는 셈인데, 중요한 건 시대의 변화다. 과거에는 외부집단과 섞이거나 교류하는 일이 흔치 않아서 국제결혼이라던가 하는 것도 흔치 않았다. 국경은 조금은 더 답답했으며 언어의 장벽도 지금보다는 더 높았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거리에 외국인이 하나 둘 보인다고 해서 놀라는 사람은 없다. 특히나 단일 그룹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동아시아권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이 변화는 기본적으로 ‘지구촌’이라는 개념과 함께 발달해왔다고 설명된다. ‘바깥’의 범주가 줄어들면서 길거리의 외국인도 손쉽게 볼 수 있는 범주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돈이나 시간 등의 문제를 제외하면 ‘어떻게’ 해외로 갈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듯이 외국이 곧 자아를 형성하는 반면교사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개항 초기에는 외인들의 등장이 ‘세계’를 인식하는 발단이 되어줬지만, 세계화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무엇이 어울릴 것인지를 고민하는 문제 즉 ‘나’를 긍정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프랑스를 ‘입거나’ 미국을 ‘먹는다’. 외부 카테고리가 곧 소비대상 중 하나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는 계급이나 취향도 몸에 걸칠 수 있는 게 되어, “상대를 이해한다”는 마음 없이도 이에 가볍게 어울릴 수 있게 된다. 이는 어떠한 이해를 의식하지 않고서도 다른 집단에 동조할 수 있게 된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특정한 ‘이해’에 속해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전이라면 영역과 영역 간의 대결로 비칠 것도 서로 몸을 겹칠 수 있으니 별다른 충돌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바로 이 상태, 자신이 붙들 것이 없어 무엇이든 간에 몸에 두르고 싶어하는 게 바로 ‘믿지 않는다’는 진술의 실체이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방위를 잃어버린 상태에 있으니 어디든지 간에 거리를 견줄 만한 대상이 필요하다는 게 된다. 남극지방의 백야라고나 할까. 이는 우리가 무언가를 사고하는 방식이 특정한 대상을 지정해서 연상하는 게 아니라, 그게 ‘아닌 것’을 차분히 제거해나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뜻한다. 동종 인류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나’와 닮은 게 아니라 ‘적’이 아닌 것을 차례로 배제하고, 이를 토대로 ‘우리’를 구성한다는 소리다. 생각해보면 현대 영화에서도 이러한 점을 생각해볼 만한 구석이 많다. 대표적으로 영화에서 24프레임은 매체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며 이를 어기면 ‘영화’가 아니라는 판정이 내려진다.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자신이 실제로 그에 특정한 의사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이질적’이라고 여길만한 인상을 준다. 현대 영화는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무엇이 ‘영화’인지를 묻는 게 아니라 반대로 왜 영화가 아닌지를 묻는 일에서 출발한다. 즉, ‘영화’라는 건 자신이 마주하고 싶지 않거나 되고 싶지 않은 면을 일정 부분 ‘선택’하기에 우리로서는 무엇이 이해와 포용의 대상인지를 알아챌 수 있는 셈이다. 이대로라면 ‘우리’가 사라지는 게 아니냐고 물을 사람이 있지만, 지구적 재난이나 종말 사태 앞에서는 국가나 민족, 성별이나 나이 같은 건 문제 삼기 어려운 부분일지도 모른다. 지구가 망할 때까지도 ‘부정’에 대한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이 문제에서 중요한 건 지구를 나가지 않고서도 이 지구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즉, 자신은 영화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도 이미 영화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삶의 많은 면에서 영화는 우리를 연결한다. 대표적으로 영화는 무엇이 현실이 될 수 없는지를 말함으로써 살아가는 세계의 범주를 넓힌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바깥, 비유하자면 두 번 살아보지 않고서도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돌아볼 수 있다. 특히 이런 점에서 영화는 일정 정도 종교의 기능을 대신했던 것으로도 보이는데, 그렇게 보면 영화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사실상 어려운 이야기다. 영화가 발명된 이후 우리 세계에는 영화가 깊숙이 자리 잡아서, 영화를 생각해보지 않고서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매체의 발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 ‘아닌 것’의 삶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정확하게는 영화가 아무것도 아니어야만 자신이 ‘아무개’가 될 수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 여기에 아무도 없더라도 영화는 계속 나아갈 것이라는 점이다. 극장에 관객이 들지 않아도 영화는 끝을 향해 나아가며 이런 경우 관객의 역할은 철저히 관찰자에 국한된다. 내용에 개입해서 본격적으로 세상을 바꾸기보다는 그저 이 세계에 자신의 역할이 삼켜지기만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거대한 운명이 흘러가는 가운데 개인이 아무런 것도 해낼 수 없다고 보는 일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 ‘인식’ 이전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세계는 결정가능성에 의해 결정화하고 또 체결된다. 그러니 어떤 것은 가능하다고 납득시키는 일이 변화에서는 무척 중요한데, 여기서 영화는 ‘영화라면 가능하다’는 인식을 나누기에 중요하다. 즉 두루뭉술하게 서술되는 세계의 범주를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만큼으로 축약해서 다루는 게 바로 영화의 역할이다. 영화는 잠시나마 이런 현실 인식을 깨트리기에 의미가 있는데 만약 영화와 자신을 서로 분리해서 바라보게 되어버리면 이는 말 그대로의 종말로 이어진다. 종말은 자신이 설 곳이 없다고 믿는 일, 자기가 없더라도 세상이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라고 보는 일이다. 물론 사람 한 두명 사라진다고 해서 시스템이 붕괴할 리 없으니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현상의 진의는 다른 무언가로 태어나기 위해 요구되는 가림막을 잃어버리고서 평생을 무대에 올려져 살아야 한다는 점에 있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특정한 영역을 갖고 있음에도 정작 자신이 어떤 무대의 주인공인지를 생각해보지는 않는다. 이는 자신이 살아가는 몸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많은 경우 몸에 대한 인식은 성별이나 체중, 노화의 정도에만 그친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몸을 의식적으로 바꿀 수 있었으면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몸을 의식하지 않는 쪽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관객’이 됨으로써 얻는 건 그와 같은 철학에서 벗어나는 일 그 자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건 극장에 들어서는 과정이나 감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세계를 바꿀 수 없다고만 보기보다는 영화를 의식하는 것만으로 이 세계의 바깥에 나설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존재자가 된다는 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에 남아있는지를 생각하는 일이다. 단순히 무언가를 믿거나 의심하는 일이 아니라 정해진 무대에서 역할을 연기하고 또 수행하는 일이 중요하다. 가령 연극무대에서는 배경에서든 아니면 이야기상에서든 무언가 ‘변화’함을 알아채는 일이 중요한데, 관객은 인물의 연기를 보면서 이를 이해한다. 인물의 대화에서 행간을 유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알지 못한 나머지 세계를 알아가는 게 그와 같은 분위기 파악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행간을 남긴다. 얼마나 세밀하게 제작되든 간에 영상은 눈에 담지 못한 나머지 프레임을 잃는다. 이 안에서 우리는 자체적으로 행간을 읽어내고 이를 채워넣음으로써 안정적인 인식의 토대를 얻고 싶어한다. 이에 오늘날 특정한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은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깊숙이 뛰어들기보다는 경계에 서는 경향이 있다. 이를 두고서 누군가는 얕고 넓은 소비사회가 문제라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선택해서 애착함에 따라 돌아올 이별의 과정을 두려워하는 일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확실한 건 우리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는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은 포용의 욕구일까, 아니면 이질적인 면을 천천히 잃어가고 있다는 죽음의 요구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꺼내보고자 하는 건 자신을 어떤 정체성으로 소개하는 일에 관해서다. 오늘날 정체성은 크게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개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고, 이 점에서 ‘주술’은 ‘술자’와 ‘술식’으로 나뉘게 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따라 개인의 꿈이나 목표를 설계했던 과거 상황은 자신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얻고 싶은지와 같은 기대의 논리에 정확히 부합한다. 즉 술식의 성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 그 자체의 법칙에 복속했고 또 철저히 부응했다. 그러나 점점 더 지켜야 할 세계가 많아진 상황에서는 각 세계마다 요구하는 논리가 다르므로 이해관계는 서로 충돌하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게 바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제약’의 논리다.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말로 종교를 서술하는 능력을 기른다. 누군가는 무대에 깔린 레일에 싫증을 내기도 하지만, 이미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은 자신이 인식하는 것 이전의 문제다. 그래서 영화를 통한 이 ‘분단’은 유교적 세계관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몹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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