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가 유튜브 쇼츠 영상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것 같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뭔가 재미있어 보이는 장면만 모아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말도 완전히 틀린 것 같지는 않다. 흥미롭고 재미있어 보이는 장면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와중, 영화는 단종의 죽음으로 끝맺음한다. 아니, 사실은 정반대에 가깝다. 단종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맺음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화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탐색한다. 어떤 길을 돌아가더라도 한 가지 지점에만 골인하면 된다. 즉 주어진 맵을 충실하게 채우면서 빈칸이 최대한 남지 않도록 하는 탈출게임과도 같다. 너무 빨리 가면 자원이 남고, 너무 돌아가다가는 게임이 엎어지고야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가는 게 맞는 것이다. 이 구조의 장점은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이야기가 엎어질 우려가 없다는 점이다. 규칙을 지키기만 하면 그 안에서는 어떤 일을 해도 상관없다는 건데, 대개 이런 실험은 그야말로 올림픽의 향연이 되고는 한다. 살아서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는 단서가 없으니, 탑승자의 생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스포츠카라든가 하는 것들. 딱 한 번만 출력을 낼 수 있어서 출격과 동시에 차체가 구겨지고야 마는 개조품 등. 이런 게임의 구조가 성립하는 건 다음 스테이지로 가면 모든 게 리셋되는 덕분이다. 만신창이인 몸으로 던전을 빠져나오더라도 다음 스테이지로 가면 모든 자원이나 변수가 초기화돼 오로지 ‘전략’으로만 승부를 볼 수 있다. 적어도 깨질 우려는 없으니 이 안에서 온갖 종류의 상상이 가능해진다.
끝장을 보려 하는 것만 같은 영화가 있다. 현실이라면 엄두를 낼 수 없지만, 다시 출발선에 설 것을 잘 알기에 비로소 가능한 움직임을 보인다. 어떤 경우 영화는 자신이 죽음에 이를 수 없다는 규칙에 서기보다 이를 극단으로 활용한다. 가령 죽음을 맞은 영화가 분리된 이야기의 가장 큰 조각에서 다시 시작된다고 가정해보자. 역사에 기록된 문장 하나에 주변 서사를 부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인 머리를 자를 경우이다. 목을 자른 몸에서 새 머리가 돋아난다면, 의식은 잘려나간 쪽과 새로 돋아난 쪽 중 어느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단종이 무기력한 인물에서 백성을 위해 각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역사가 허용한 상상범위 내에 있기 때문이다. 캐릭터로 보면 ‘단종’은 역할과 위치, 상황 등에서 모든 게 원본을 모방한다. 영월에 유배를 온 단종이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서 죽음을 마주하는 장소에 들어서는 것까지가 역사의 큰줄기다. 다만 이 마을에서 단종은 어느샌가 깊은 우울증에서 꺼내어져 젖은 몸을 말리고, 몸을 추스르게 되는데 어쩌면 이미 왕으로서의 상징성이 제거된 상황에서 자신이 인격적으로 원본의 ‘데드카피’에 불과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이건 의무감이나 당위가 아니라 순전히 게임의 규칙을 따라가는 것에 가깝다.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난 단종이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건, 게임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자신이 왕이었던 상황에서의 시간뿐이기 때문이다. 즉 한 체제의 바깥에 있는 건 애초에 기록조차 될 수 없다.
왕권을 얻으려는 일은 한 게임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게임 그 자체를 갖는 것이다. ‘왕’ 자체가 이미 게임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주관하는 사람인 셈이다. 이런 뜻에서 바라본 영화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영화를 서술하고 계승하는 작업 시스템에 관한 것처럼 보인다. 단종의 최후가 현실에서 이미 많은 야사와 판본으로 전해진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원칙적으로 말해 영화는 항상 특정한 숏에 멈추므로 이에 반문하거나 뒤집는 건 불가하다. 카메라가 기록과 재현의 매체라면 영화가 멈춰 선 곳은 곧 더는 보여줄 게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게임의 규칙만큼은 남아서, 이를 아는 이라면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다. ‘영화’를 갖는다는 건 그런 뜻이다. 영화를 주관하는 이는 영화가 속한 내부에서 기억을 생성하는 회로를 재배할 수 있다. 이 말을 따르자면, <왕사남> 자신이 지정한 경로로 이야기를 흐르게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출발한다. 모두의 생각이 짧은 회로로서 반복될 때, 중앙은 이야기를 꺼내보고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진화한다. 단편적으로 떠오를 생각이 있을 수는 있어도, 그걸 보관할 곳이 없으면 금세 공중에 휘발되고야 만다. 하지만 규칙을 이해하는 이는 공중에서 다시 기억을 포집해 유의미한 정도의 액체를 활성화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많은 경우 구조에 포섭되지 않는 것을 간과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도리어 이런 그물망에서는 의미의 곁가지를 포착하기가 쉬워져서 이렇게 대기 자체를 증명해내기도 한다.
이 생각의 흐름에서 생각해보려는 건 영화에서 변조와 변형의 활용 방법과 차이에 관해서다. 사실 사람들은 단종의 죽음에 관해서는 알지만 그 사이의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잘 알지 못한다. 기록이 남았더라도, ‘영화’는 어느 정도 시작과 끝을 지킨다면 그 안에서의 변형은 허락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내부를 꾸미는 건 전적으로 창작자의 자유다. 창작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를 설계해서 진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을 설계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이미 게임 자체가 특정한 의도 안에 갇혀있음에도 자신이 직접 캐릭터를 조작해 수행한다는 점에서 수행성을 담지한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기본 틀과 설정만 있으면 이 안에서 이야기에 인과와 개연을 부여하는 건 관객이다. 특히나 이는 이야기에 관객이 참견할 구석이 많을수록 증대된다. 누군가는 이야기에 빈틈이 많다고 하겠고, 큰줄기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반복될 뿐이라고 하겠지만, 한 게임이 동일한 볼륨을 갖고 있음에도 플레이어에게 각기 다른 파고와 능선을 보여주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게이머에게는 기억을 포집하는 신체가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 직접 참여하기 쉬운 규칙이 이야기에 반복해서 노출될수록 영화의 느슨함은 기억을 회집하는 포충망으로 변모한다. 이렇게 포집된 기억이 다시금 신체에 회로로 새겨지면서 관객 자신이 이야기를 이어가게 된다. 이때 구분해야 할 건 영화가 실제 사건에 모티브를 받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이를 현실에 새기는 건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의견이 가능하다. 실패한 선택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어느 정도 안전장치가 확보된 이야기를 보고 싶어한다. 이 경우 영화는 현실의 역사가 이미 하나의 안전장치가 되어줬기에 이야기상에서의 변주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어떤 숏이라도 전체 맥락에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여기서 중요한 건 ‘어디까지 가는지’를 실험하는 일일 뿐이다. 마치 오래된 우화처럼 하루 만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따라 자신의 땅이 생겨난다고나 할까. 이런 점에서 유튜브 쇼츠 영상을 얼기설기 엮은 것 같다는 평은 단순히 이야기에 쉬어가는 틈이 없다는 말이기 전에, 어떠한 공백들이 반복돼 펼쳐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숨을 쉬는 허파가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펼쳐지듯 허구와 세계를 교환하는 것은 영화가 지닌 고유의 기능이다. 이는 특히 우리가 사는 세계의 공기를 다시 새긴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영화는 분명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철저히 지켜내기도 한다. 혹자는 애초에 정해진 결말에서 출발하는 만큼, 영화가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필름의 물리적인 길이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그물형 구조의 장점은 우리가 같은 부피라도 더 압축된 형태로 소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 가볍게 펼친 날개를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지가 관객의 몫이고, 가벼운 뼈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가 제작자가 해야 할 고민이다.
특히나 이를 더 생각해볼 법한 건 이런 부류의 이야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건담 지쿠악스>나 <초! 가구야 공주> 같은 경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형태의 현실이 아니라 특수한 형태의 분열에서 공동의 장소를 분해한 뒤, 붕 뜬 서사를 회집하는 곳을 관객의 신체로 지정한다. 물론 관객이 그 모든 곳에 공감하는 게 쉽지 않지만, 작품이 자체적으로 설계한 구조 안에서 어느 한쪽의 기능이 다른 한쪽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일부를 모르거나, 대부분을 모른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바라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해하게 돼 있다. 파생되는 이야기 구조와 규칙을 만든다는 점에서 입소문이나 바이럴에 능숙하지만, 반대로 이야기 본편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구멍이 숭숭 뚫린 쪽에 가까워서 온전한 형태의 기억을 보존하기는 어렵다. 즉, 이들은 마치 각자에게 기억되지만 정작 통일된 의견을 도출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공론장의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다. 정확히 말해 이는 바깥을 지향하려는 탈주의 움직임에 더 귀결되는 것이기에, 위에 언급한 사례가 아니라 실사 영화의 경우에도 별다를 바 없이 적용된다. 이따금 영화의 장치적인 조건을 포함해 모델 전부가 규칙으로 작동하는 때를 보면, 아무리 말하는 게 많더라도 이를 자체적으로 소화할 장기가 없으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홀로 생존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들이 각자의 ‘숏’에서 공공연한 안전망을 얻을지는 계속해서 관찰하고 또 이야기할 기회를 얻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