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살지 않아도 영화에는 살 수 있다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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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이라는 말에는 많은 게 담겼다. 어떤 것이든 간에 중앙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활성화됐거나 주류가 교차하기에 일종의 포집으로서 기능한다. 한번 중앙에 들어오면 다시 바깥으로 나가기도 힘들게 되는 것이다. 서로 왕래가 자유롭다는 가정하에, 인프라가 잘 짜인 도시로 이주해온 사람은 대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중앙에서 외곽으로 이동하는 일은 월세가 오른다든가 하는 일 말고는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한편으로 애초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상위권이라고 볼 수 있다. 정말로 낙후한 곳에서 온 사람은 중앙의 근처로 이주하지 다시 가장자리 한복판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 빗대자면 마포나 용산, 성동구에 살던 사람은 이사 시에 과천이나 분당쯤으로 갈 확률이 크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모두가 중앙에 가기를 바란다고 가정할 때 ‘중앙’은 어떤 지위를 갖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부동산을 생각하면 서울에 접근할 수 있는 편의성이 가격을 결정하므로, 역세권이 ‘중앙’을 결정할 테다. 지리적으로 서울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지하철로 30분~1시간 정도에 광화문 주파가 가능하다면 그곳은 서울의 연장으로 보아야 한다. 즉,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중앙’의 세력권이 넓어진다는 뜻인데 이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점도 추론할 수 있다. ‘생활’권으로서의 ‘중앙’은 ‘거주’와는 서로 다른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 생활권으로서 중앙은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인프라를 소화해낼 수 없으므로 외부와의 교류가 필연적인데, 이 점에서 중앙은 완전히 고립돼있지 않다. 반면 거주권으로서 중앙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사회적 정서를 공유한다는 뜻에서 높은 주거 비용을 감당하는 곳이다. 즉 ‘중앙’의 핵심은 생활권과 거주권이 서로 교차하는 데 있으며 이를 고려하면 넓은 범위에서 바라보는 중앙 안에서도 다양한 크기의 ‘중앙’이 새로 생겨난다.


이제 자리를 옮겨 시네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최근 고민하게 된 건 사람들이 자신을 시네필로 지칭하는 일을 망설이면서, ‘시네필’의 주변에 자리한 사람으로 위치 짓기를 하는 일이었다. 처음에 시네필이라는 말을 힙스터의 한 종류로 이해하며 문화적으로 괴리된 집단으로만 바라봤다면, 이후에는 그들이 향유하는 만큼의 가치 실현이 불가하다는 점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무언가 생리적으로 ‘다르다’는 점이 혐오나 배격이 아니라 인정과 존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경위는 알 수 없다. 인터넷 악당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 수 있고, 문화 소비에 대한 성숙도가 높아진 것일 수도 있다. 유력한 건 영화 자체의 힘이 약해진 상황에서 자연스레 시네필이라는 말도 반발을 사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일이 문화적 등급이나 계급 등을 의미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을 굳이 구분 짓거나 놀릴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시네필이라는 말은 앵무새나 도마뱀을 키우는 정도로 관심사가 낮아졌을지도 모른다. 들여다보면 귀엽지만 관심을 갖고 키우기에는 무언가 정보가 잘 없다. 굳이 나쁜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고 관심이 생길 만한 사건이 생기지도 않는다. 예술영화든 상업영화든 판가름 할 새도 없이 그냥 영화 자체가 개봉하지 않음으로써 절대적인 모집단의 수가 적어졌다. 역설적으로 시네필을 멸종시킨 건 이들을 힙스터로 지칭하며 혐오했던 이들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였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네필이라는 말은 “왜 하필 영화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영화가 자기 삶의 중심에 놓인 이들을 가리키게 된다. 사회적 지위의 성취수단이라면 영화를 대체할 수 있는 것도 많으니 굳이 시네필을 자청할 이유가 없다. 영화가 인프라의 중심에 서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에 산다는 건 거주권이 아니라 생활권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는 단순히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통로에 불과할 수 있다.


이때 영화를 생활권에 둔 이들은 이곳에 거주하려는 이들을 보면서 “왜?”라는 물음을 던질 것이다. 삶의 중심에 놓인 영화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아서,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중심을 벗어나더라도 결국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돈을 많이 벌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거나 하는 마음이랄까. 전기의 시네필 용어가 문화적으로 뜨거운 장소에 대입된다면 후기에는 어디까지가 자신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가령 여행을 가서도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고 개중에는 입맛에 맞는 것도 있겠지만, ‘언제 먹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건 소위 말하는 ‘소울푸드’다. 어머니가 차려준 미역국이라던가 가래떡을 잘라서 해주신 떡볶이라던가 하는 경험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일부로서 편입돼있기에 다른 무언가와 교환할 수 없다. 즉 ‘시네필’에 대한 관점이 생활권에서 거주권으로 옮겨감에 따라, 그곳에 살 수 있는 사람을 ‘주거’로서 바라보게 된 셈이다. 시네필은 집값을 감당하고서라도 그곳에 산다. 영화를 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시대에 극장에 시간을 내어 방문한다. 부동산이라면 재화의 가치도 있지만, 영화가 말하는 거주권이란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어디까지가 영화의 영역일지를 고민하는 건 자연스레 어디에 살아도 영화에 갈 길을 찾는다는 말로 이어진다. 만약 자신이 영화를 볼 방법이 사라진다면 비슷하게라도 기억 속의 풍경을 재현해낸다. 이른바 자신이 살 곳을 직접 정하는 능력이 바로 시네필의 기준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은 자신이 이주한 곳에서 토착음식을 비슷하게라도 구현해 먹고는 한다. 고려인들의 당근김치처럼, 영화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만나 어떤 모습으로라도 기억을 만나려 한다. 마찬가지로 시네필에게 영화는 자신이 떠나온 기억과 긴밀히 연결됨으로써 항구적으로 수복돼야 할 상태로 지명된다. 영화를 통해 어디로 갈 것인지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영화를 살고 싶은지가 핵심 과제로 주어진다.


이런 관점으로 시네필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무언가 애매필이라는 말의 용례를 이해해볼법 하다. 한국에서 청년 세대는 많은 경우 안정된 주거를 확보하기보다는 다양하게 옮겨다니는 경우가 많다. 비슷하게 취향을 향유하는 일도 특정한 하나를 다루기보다 넓고 다양하게 즐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개인의 기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깊고 좁은 경험을 하기에 불리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에 많은 게 변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제와 오늘이 서로 다를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공개적인 지지행위가 섣부른 위험으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적을 두는 게 마음의 고정점이 된다. 한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하며 지지하는 일이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의 일환이라면, 시네필들에게는 영화가 바로 그 무언가다. 물론 이 말이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식의 세속 운동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네필이라는 말은 자기를 중심으로 영화를 분단하는 ‘중심’의 사유에 부과되는 정체성에 가깝다. 많은 경우 영화는 이 세계와 분리돼서만 개연성, 필연성, 핍진성이라는 삼중 고리를 얻지만 영화에 ‘산다’는 이들에게 삶은 분단의 대상이 아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야 할 곳, 어떠한 장면들에서 자신이 오래도록 알아왔던 무언가를 다시 소환해내 그 안에서 자기를 구축하는 정도의 능력. 여기에는 영화가 자기 삶의 중심에 있어서 길을 잃을 때면 항상 영화를 보며 방향을 찾는다는 방위가 자리한다. 반대로 자신을 시네필로 바라보지 않는 이들은 영화가 길거리의 사물이나 건물 등에만 그쳐서, 길을 찾을 때 참조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절대적인 방위를 알려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취향을 확인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이름을 대체하지는 않는 셈이다. 예컨대 이름의 이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의 문제가 바로 시네필을 판가름하는 법이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사람들은 영화를 자신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삼고 싶어한다.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같은 걸 보면 이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누구가 아닌 ‘그’가 꼽은 목록이기에 의미가 있다. 이 목록들은 영화사에서 별다른 공통분모가 없지만 목록을 작성한 사람의 이름으로 비준돼 사람들 사이에 영향을 끼친다. 이것들을 단순히 사사롭다고만 보기보다 끝내 중앙에 도달하지 못한 결과와 그에 대한 과정을 설명하는 시간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느 곳에 ‘산다’는 건 항상 실패담으로 남는다. 자신이 그곳에 산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은 반대로 그 안에 소속돼있지 않다는 말과 같아서, ‘산다’는 말은 외부의 관찰자가 이를 인지하면서도 반대로 자신은 이를 몰라야만 한다는 역설이 있다. 시네필도 그들 스스로 영화에 산다는 말을 적용하려면, 시네필 자신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차단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곳이 ‘어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려운 말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우리는 지구에 살고 있지만 반대로 지구인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화성의 사진을 볼 때면 무언가 지구처럼 생겼다고 말하는 식으로 지구인임을 자각하고는 한다. 마찬가지로 시네필 집단은 자신이 어떤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지는 않지만 일상의 어떤 순간에 영화를 문득 떠올리면서 삶이 거대한 영화에 이끌리고 있음을 느낀다. 이들에게 영화는 특정한 이름으로 기억되기보다 그런 사건들이 충돌해서 벌어진 것들에 의해 정의된다. 마치 한 사건을 겪은 이들이 트라우마를 갖고서 삶의 모든 순간에서 과거와 미래를 회집하듯이 시네필에게 영화는 과거와 미래를 초과해 선다. 이처럼 영화에 대해 발달한 감응능력이 시네필의 조건이라면 이에 따라붙는 다양한 수식언들이 이해가 간다. 염세적이거나 종말을 신봉하는 등의 행동은 사로잡힌 이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부여’의 모습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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