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이상으로, 괴리를 중력으로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2021)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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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에 기고한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에 대한 글에서 야마다 사유카는 이렇게 쓴다.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유럽 철학 전통에 대한 가장 안전한 일반적 특징은, 그것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건담은 아무로와 샤아에 대한 일련의 각주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지적하는 대목은 <역습의 샤아>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음악 “Beyond Time”(비욘드)이 자아내는 놀라운 신비와 연결된다. <건담 지쿠악스>가 그러했듯, 작품에 무관하게 해당 음악이 인용되는 일은 오랜 악연을 끊어낸 아무로와 샤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새로쓰기’하려는 시도다. 소위 건덕(건담 덕후)이 인정하는 건담이 우주세기 본류인 <샤아의 역습>까지라면, 계속해서 인용되는 음악은 어쩌면 이들 우주세기의 망령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마귀들림처럼 이들 ‘건담’은 특정한 서사나 이야기가 아니라 ‘우주세기’로 돌아가려는 회귀의 속성을 지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위의 노래 ‘비욘드’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샤아>의 결말은 토미노가 더는 두 사람을 토대로 한 이야기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한 결과라고 세간에 잘 알려졌다. 이는 두 사람이 꿈꾸었던 이상이 실현 불가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이야기 단에서의 문제에 불과한데, 어느샌가 전자에 대입돼 다뤄지는 감이 있다. 샤아는 모두가 지구에 살 수 없다고 말했고, 아무로는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돌아가야 할 집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샤아>의 결말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진영을 가리지 않고서 모두가 힘을 합쳐 기적을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샤아와 아무로 둘 다 실종되고야 만다. 정확히 말해 ‘사망’이 아니라 실종이니까, 두 사람의 사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 힘든 상황에서 이들 사상의 후예가 들어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각주’를 다뤄보자. 어떤 이야기가 오가든 간에 결국 <건담>은 샤아와 아무로라는 대립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생각이 토미노의 사고일뿐더러, 지구와 우주의 관계 등 이분할된 사고는 거의 모든 구조에 쉽게 끼워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고향에 살 수 없다는 입장은 그럼에도 고향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견에 대립한다. 입장을 살짝 바꾸어 말하자면 유물론에 관한 특정한 관점이 해체될 때 우리는 이를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로도 볼 수 있다. 가령 영화가 필름과 극장이라는 두 개의 조합에서 벗어날 무렵에서부터 촉발된 게 바로 영화의 물질론이다. 우주시대(디지털)가 되면 온 인류(영화)가 뉴타입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영화를 구현하는 기술이 더 섬세해질수록 완전영화에 다가설 것이라는 완전영화론을 연상케 한다. 동시에 색의 스펙트럼이나 음질, 생동감을 담는 ‘기술적’ 시사로서의 영화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는 만큼은 늘 고민거리로 남는다. 아무로는 뉴타입을 위한 기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도 이미 대중 일반을 뛰어넘는 실력이 있었고 이는 뉴타입을 전용으로 한 기체가 나온 후에 더욱 심화된다. 그렇다고 하면 교환비가 월등한 뉴타입 기체만 양산하는 게 옳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주시대에도 뉴타입은 꽤 희귀해서 무턱대고 이를 양산할 수만도 없는 실정이다. 이 설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뉴타입이 자연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전쟁의 판도를 바꿀 만하지만 도리어 수가 적어서 절대다수의 전쟁은 대중일반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아무리 완전영화에 다가선다 하더라도, 여전히 대중일반에 의해 바라보아지게 될 것이므로 뉴타입을 위시하는 일은 지양돼야 한다. 뉴타입은 특정한 작전에서 활약할 수는 있어도 판도를 바꿀 수 없다는 게 <샤아>에서 증명되지 않았던가.


<샤아>의 결말은 두 명의 뉴타입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거나 하는 식의 무용론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로가 힘을 내는 가운데, 주변의 사람들이 이에 감정적으로 동화돼 종국에는 지구 전체에 뉴타입의 파장을 끌어내는 일이 핵심이다. 뉴타입의 진정한 의미란 세계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특출난 사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타인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서 종국에는 모두를 연결하는 능력이 있는 존재”다. 이를 영화로 말한다면, 오늘날 뉴타입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시네필과 같은 용어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을 감화하는 능력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바쟁은 완전영화를 두고서 “영화라는 것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영화”라고 진술했다. 영화 안에서도 대중은 각자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서 특정한 입장에 ‘서지만’, 완전영화의 꿈 안에서 대중 일반은 하나의 진리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다. 영화가 특정한 의견이나 주장으로만 해석되는 일은 경계해야 마땅하나, 반대로 특정한 방향으로 주의를 끌어모으는 일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샤아>의 결말은 모두가 아는 액시즈 쇼크로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일어난 것은 아무로와 뉴 건담의 의지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주위의 사념을 비롯한 지구인들의 염원이 한데 어울리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들 모두가 하나의 ‘방향’을 보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지구에 다가온 거대한 재앙은 고개를 돌리기에도 너무나 큰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이 상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모두가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감정이다. 이 점에서 <샤아>에 대한 생각은 깊어진다. 우주세기의 건담이 계속해서 <샤아>를 바라본다면, 어쩌면 이 영화의 결말이야말로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 ‘완전’에 가까운 게 아닐까. 서로 입장을 나누어 싸우던 두 진영이 전 인류적인 사명에 힘입어서 공동의 문제에 대응하는 건, 어쩌면 이미 현실이라 할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하사웨이>의 줄거리는 어딘지 모르게 현실의 외적인 부분을 선보인다고 듯 여겨지는 면이 있다. 이를테면 야마다 사유카는 위 글에서 다음처럼 적는다. “‘역습의 샤아’의 대사들은 애초에 그 영화, 그 시공간에서만 성립하는 기묘한 성질을 지니고 있기에, ‘키르케의 마녀’를 통해 두 시간 가까이 쌓아 올린 하사웨이의 심리와는 괴리된 것으로 강한 위화감을 안긴다. 하사웨이 자신의 고통 이상으로, 건덕의 업을 하사웨이에게 짊어지게 한 듯한 죄책감이라고 할까....”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하사웨이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묘사지만, 한편으로는 샤아의 대사를 아무로가 발언한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곳이 있다, 그 대사가 <샤아>의 당대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하사웨이가 알 리 없는 이 말은 사실상의 ‘외부’를 가리킨다. 작품 바깥에서 이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 의해 발화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하사웨이가 조현병을 앓는다는 점은 이런 묘사에 설득력을 부여하지만 반대로 작품의 시계열이 혼란을 겪는다는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지난해 <지쿠악스>는 작품의 11화를 ‘비욘드’로 마무리함으로써 우주세기라는 오랜 외부를 안으로 들여왔다. 음악이 화면 전체에 울려 퍼지니 사실상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문제는 이 음악이 이야기의 맥락과는 별 관계없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원본 우주세기의 파생상품에 가까운 이 작품은 ‘어떤’ 우주의 퍼스트 건담이 등장해 오리지널 캐릭터를 그 안에 탑승시킨다. 그저 ‘원본’이 등장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오랜 세월에 묻힌 우주세기가 여기 이곳에 다시 ‘움직인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둘 중 무엇을 선택해도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지쿠악스>는 음악과 함께 등장한 퍼스트 건담에 원본 우주세기의 아무로를 연기한 성우를 다시 소환해냄으로써 몰락한 인간의 잔해를 불러낸다.


<지쿠악스>에서 원본 우주세기의 성우를 다수 만나볼 수 있었으나, 실제 현실에서 추문을 일으킨 아무로 레이의 담당 성우만큼은 공식적으로 언급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관측창 바깥의 퍼스트 건담을 상대하는 마츄에게 말을 건네는 아무로(지쿠악스)의 목소리는 무언가 ‘영혼’이 ‘육체’를 상대한다는 느낌이 든다. 바꾸어 말하면 이미 영혼이 말살된 채로 껍데기만 남은, 비대해진 몸에 응징을 가하는 이 모습은 그야말로 ‘조현병’이 아니라면 불가하다. 사실상에 자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샤아>의 결말이 지구(모성)인들이 힘을 모아 자신들 인류가 떠나온 별을 힘을 합쳐 지켜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 경우 인류가 모성을 버려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온 샤아의 의견은 전형적인 ‘조현병’인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원본 우주세기는 집이 있으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마치 몸보다 시야가 더 먼 곳을 바라보듯, 인간의 몸은 중력에 사로잡혀 이상과는 항상 괴리를 겪는다. 같은 의미에서 <하사웨이>의 극장판에서 샤아의 최후를 목격했던 하사웨이가 테러리스트로 변모한 일은 단순히 ‘범부’라거나 하는 말로만 치부될 게 아니다. 사실 완전함의 기준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일에 대한 묘사가 바로 ‘조현병’에 다름없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옳고 그름을 잴 기준이 들어올 구석조차 허락하지 않으니, 그 내부는 혼란스럽고 자폐적인 게 될 수밖에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반대로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고 여길 발판이 되어주기도 한다. 예컨대 이 혼란스러운 내부는 들뢰즈적인 의미에서 전형적인 ‘소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시계열의 혼란이 점진적인 파괴를 가리킨다면, 시점을 분간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과거가 현실을 참조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현화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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