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있는기가

<좀비 랜드 사가: 유메긴가 파라다이스>(2026)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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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라면 으레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외계인의 모선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된 후, 장면이 전환되어 세계 각국의 랜드마크가 보인다.외계와 지구가 싸우는 이런 장르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다지 새로울 건 없다. 어차피 외계는 안전하게 때려눕힐 타자를 형상화하는 것이니 말이다. <유메긴가>에서 눈 여겨볼 만한 건 바로 이 장르가 어떻게 변주되고 묘사되는지다. 이를 위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초반 시퀀스를 살펴보자. 프랑슈슈가 격렬한 아이돌 활동을 하는 가운데, 지구 각지의 화면에는 정체불명의 예고가 전시된다. 방송 영상의 발화를 조합해 만들어진 이 메시지는 마치 괴도가 보낸 예고장처럼 음성을 알 수 없게 해체돼 있다. 그들이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나, 언어체계를 지구의 ‘음성’으로 재현할 수 없는 탓이다. 이처럼 타자를 말하는 건 서로 다른 언어체계를 전제한다. ‘타자’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생각을 하는 법이 다르니 애초에 말이 통할 리가 없다. 그래서 이 설정은 바꾸어 말해 그런 생각을 해보게도 한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이 ‘외계’를 뜻한다면 우리 인류가 외계를 탐사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가 관객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주는 건 우리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갖기 때문이다. 영화의 언어는 우리의 것과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이언 보고스트의 『에일리언의 현상학』은 사물에 내재하는 자기소통의 논리를 이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는 좀비가 인간과 비슷한 외견을 공유하지만 그 내부를 이해할 수 없으며, 이를 위해 대상을 직접 축성하는 것과 같은 행위에 나서야 한다고 적는다. 이는 물론 장르적인 의미에서의 ‘좀비’와는 다르나,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가령 서로 다른 언어체계를 지닌 타자는 그들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화성음과 발음, 화법 등을 이해함으로써 영화 본연의 ‘존재’를 볼 수 있다. 현실이 영화가 될 수 없다면, 반대로 영화만의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의 도입부로 돌아가자. 영화의 시작 시퀀스는 타에가 외계인의 우주선에 끌려가는 일과 연계된다. 기억을 찾은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여전히 동물적인 면을 유지하는 그는 멤버들로부터 어떠한 ‘객체’로서 이해되고 있다.


타에는 극장판의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키맨이다. 우연히 우주선에 끌려간 타에가 돌을 삼켜 각성하고, 이를 토대로 우주선을 격파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까지가 플롯이다. 사람들은 말을 하게 된 타에에게 그동안의 마음을 묻고 소통하려 하지만 그녀에겐 이전까지의 기억이 없다. 이제 막 대화의 길이 열렸는데 서로 마음을 터놓을 방법이 사라진 셈이다. 이 설정은 영화에 관해 아무런 배경도 모르는 우리가 어떻게 영화를 대해야 하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영화가 하나의 객체라면 우리는 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영화 밖의 현실, ‘시점’에 고정될 가능성이 크다. 한 시선이 초점을 맺으려면 대상을 고정하려는 시도가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고정점을 객체의 자리에 두어보려 하지만, 앞서 말한 언어나 사고체계 등의 차이로 인해 이 시도는 좌절된다. ‘영화’란 우리와 생긴 게 비슷하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존재다. 카메라가 어떠한 현실을 재현해내더라도 우리가 아는 어떤 것은 그 안에 없다. 그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방식으로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같은 의미에서 멤버들에게 타에가 그런 존재였다고 감안하면 ‘타에’의 각성은 영화가 말하는 법이거나, 존재를 언어화하는 방식에 관한다.


좀비 아이돌을 테마로 한 이 작품에서 ‘좀비’가 외계의 존재를 가리킨다면, 외계인이 이들 좀비를 분간하지 못하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살아있는 생물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에서 자연의 범주에 속한다. 반면 이들 좀비는 인간의 입장에서 상대 외계인을 이해하려 시도하는데 이 점에서 ‘좀비’는 ‘외계인’과 서로 다른 결을 지닌다. 외계의 객체는 상대방의 언어와 사고체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통해 인간 주체에 편입된다. 마찬가지로 프랑슈슈의 좀비 멤버들이 동물에 가까운 타에를 이해하고 소통했던 일은 이들 존재를 단순한 타자이자 객체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좀비이면서 인간인 것과 좀비이자 동물인 것을 구분하기보다, 이들 간에 어떠한 ‘삶’을 가정하고 이를 전제 삼아 언어화의 틀을 구축한다. 그러니까 좀비에 대한 상상은 어떠한 체계가 있으며, 이것을 소통 가능한 수단으로 ‘번안’하는 기능 추구가 가장 중요하다. 엄밀히 말해 이 작품에서 ‘좀비’는 무한의 생명력을 지닌 존재에 가까워서 외모나 언어 모두 다른 외계인과 같은 맥락에 둘 수 없기도 하다만, 적어도 어떤 것의 이전과 이후를 토대로 내부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외계’는 분단이 아니라 이해의 소재이니 말이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이를 눈 여겨보게 되는 건, 작품이 자체적으로도 타자에 대한 담론을 계승하고 또 수행하기 때문이다. 가령 작품의 도입에 외계인들이 사가현을 침공하는 장면 중에는 박람회 어딘가에 세워진 모형 에펠탑이 있다. 이후 장면이 전환돼 세계 각지에도 동일한 침공이 벌어지려는 찰나의 모습들에는 사가현의 시뮬라크르적인 모형이 아니라 실제 파리의 에펠탑도 있다. 이를 어떠한 재난 세계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포스트 3.11적인 맥락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포스트 에반게리온적인 점을 더 신경 써서 들여다보고 싶다.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다카포>에는 파리의 에펠탑이 임팩트를 맞아 박살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전편인 <Q>에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배경음악을 재사용한 점과 더불어 해당 작품을 오마주한 것으로, 마찬가지의 제안이 <다카포>에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 핵심은 <나디아>에서 해당 장면은 악당 세력이 세계를 침공하려는 대목이었다는 점이다. 네오 아틀란티스의 부활을 선언하는 이 장면은 작중 악역이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나디아>는 아직 냉전 분위기가 남아있던 1990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감독의 의지에 따라 이후의 이야기는 <에반게리온>과 그 리메이크작인 <신극장판>으로 이어진다. 특히 전쟁과 평화에서 인간의 화합으로 옮겨가는 관심은 두 작품 간에 에펠탑이라는 공통된 연결고리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에반게리온>은 존재의 고독과 타자와의 진솔한 대화를 소재 삼은 작품이었으며 이는 옴진리교 사건 당시 일본 사회의 심리테라피적인 요소를 담아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후 동일본 대지진이 벌어진 2011년 이후 제작된 세 번째 시리즈 <Q>다. 심리치료가 필요한 때가 다시 돌아왔지만, 예전처럼 인간의 고독을 말해야 할 때는 아니었다. 옴진리교 사건이 테러의 성격으로 바라보아지며 인간에 대한 불신을 퍼뜨렸다면 지진의 경우는 자연재해로서, 다음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가 더욱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무방비한 인간의 모습을 타자에 대한 무제한의 환대로 탈바꿈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결과 <신극장판>은 더는 예전 같은 노선을 택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니까, 어떠한 재난이 마치 ‘좀비’처럼 다가온다면 그 안의 회로를 새기거나 이해하려는 작업이 새로 대두했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유메긴가>의 외계 침공 시퀀스는 <나디아>나 <다카포> 둘 중 어느 하나를 오마주했다고 하기보다는 이들 사이에 있는 담론을 더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타에의 활약으로 세계 침공이 잠시 멈춘 사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사가가 재조명되는데 이곳에서 사람들은 나름의 일상을 지내고 있다. 프랑슈슈와 이들을 알던 인물들이 힘을 합치는 와중에는 프랑슈슈의 정체가 들키는 장면도 있다. 이곳에서 프랑슈슈는 예전에 체육관에 마을주민과 함께 대피했을 때도 들키지 않은 정체를 밝히게 되고, 작품은 어중간한 긴장 상태로 진입한다.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장면이지만 이 갈등이 해소되는 방법을 짧게 기억해두면 좋겠다. 프랑슈슈가 사람들에 정체를 들킬 때 타에는 사람들의 쪽에 서 있지만, 이후 갈등이 봉합되는 지점에서는 진흙투성이의 얼굴이 돼 있다. 이 모습은 애니메이션 본편에 있던 에피소드 중 하나를 직접 언급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와 좀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좀비의 얼굴에는 봉합의 흔적이 있지만, 그 위에 어떠한 표면을 세움으로써 간극이 해소된다. 프랑슈슈는 “가면이 없다”고 프로듀서에게 말하지만, 이 안에서도 가면은 여전히 분단이 아니라 출입구로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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