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달은 노래할 수 있어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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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한 개념을 설명하기란 무척 어렵다. 특히나 그게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대중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초 가구야 공주!>도 그런 작품 중에 하나이고, 이 글은 작품이 다루지 않는 비타겟층을 위해 쓰였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작품이 처한 배경적인 상황 때문이다. <가구야>는 작품이 넷플릭스에 공개됨과 동시에 소설이나 굿즈 등의 파생상품이 실시간으로 해금되면서 작품 자체가 하나의 ‘상품’임을 보여줬다. 팔기 위한 작품일 뿐이라는 게 아니라, 제작 단계에서 이미 ‘상품화’가 결정됐다는 점이다. 그말인즉 이미 기획에서 진행까지 모두 상품적인 면을 고려했으며 이 점에서 <가구야>는 한 편의 영화이기보다는 아이돌과 같은 ‘실황계’ 상품에 가깝다. 오리지널 IP를 새로 런칭하는 플랫폼으로 넷플릭스를 선택해 화제를 모은 후, 기세를 몰아 주변 굿즈를 판매하는 식이다. 이는 특히 특정 IP의 파생상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본류 IP가 되는 작품군에서 자주 쓰이는 방식인데 최근에는 <리코리스 리코일> 같은 애니메이션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런 방식은 대개 애니메이션이 원작 작품을 가져오는 식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기에 시장에서도 자주 찾기 힘들다. 참조할 만한 사례가 많이 없으니 분석하기도 어렵지만, 바꾸어 말하면 매 작품들이 그대로 하나의 레퍼런스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품으로서 <가구야>는 보컬로이드와 버츄얼 스트리밍을 두 축으로 삼는다. 정확히는 후자가 전자를 수행하지만 등장 시기를 고려하면 보컬로이드 문화를 버츄얼 스트리밍에서 이어가는 쪽으로 이해되기에, 이 안에서는 일종의 문화적 계승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사이에는 보컬로이드 곡을 부르는 ‘우타이테’와 이들이 다시 물리적인 아바타를 만들어 진출한 ‘버츄얼 스트리밍’ 시장이라는 연결고리가 있다. 작품 안에서는 묘사되지 않지만, 이를 대신해 보컬로이드의 대표격인 하츠네미쿠의 대표곡을 ‘라이버’가 부르게 함으로써 일부는 이 계보를 이어간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두 개 소재가 작품 안에 기용된 순서다. 감독의 설명을 따르자면 작품을 처음으로 구상할 때는 이 ‘라이버’를 먼저 떠올렸고, 이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게 할 것인지를 두고서 우타이테를 비롯한 보컬로이드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말인즉 오늘날 일본에서 버츄얼 스트리밍이라는 행위는 어느 정도 보컬로이드 문화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아지는 면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구야>는 두 개 문화를 적절히 섞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상당한 정도의 덕력을 요구한다. 작품 자체가 레퍼런스로 가득 차 있다고나 할까. 물론 메인 요리가 인물 간의 관계성이라는 점에서 레퍼런스를 알지 못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게 관계의 시작이기도 하지 않던가.


확실한 건 ‘스트리머’가 아니라 ‘라이버’라는 용어로 실황을 대체함으로써 작품의 전반적인 기조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스트림’이 연속성이라는 의미를 갖고서 방송 활동을 이어간다는 점에 중점을 둔다면, ‘라이버’는 자신의 활동이나 동작을 직접 시연한다는 점에 강조선이 있다. 그러니까 한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의 직업의식이나 사명 등을 이어가는 게 스트림이라면 ‘라이버’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더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라이버’라는 용어의 사용은 어떻게 바라보아질 것인지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가령 야치요가 “자신과의 공연은 ‘라이버’만 가능하다”고 말할 때 이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존재가 되어달라”는 말로도 해석된다. 언뜻 보면 권위를 갖기 위해 그와 동등한 수준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직접 마음을 쟁취해보라는 무언의 암시에 가깝다. 무대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무대에 서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말은, 바꾸어 말해 자신의 이상향을 꿈꾸기만 하지 말고 그런 삶에 도달해보려 노력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우타이테 가수가 버츄얼 스트리밍 시장으로 옮겨올 때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얼굴을 공개한 쪽도 있었지만, 대개는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했던 이들이 실황에 등장할 수 없다고 보았을 때 그와 같은 ‘얼굴’이 되어준 게 바로 버츄얼이었다.


버츄얼은 소위 ‘가상’이라는 의미로서 무언가 동굴세계의 그림자처럼 여겨지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집약해놓은 쪽에 더 가깝다. 가면을 쓴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평소보다는 속 시원하게 말하거나 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외부에 ‘감정’이 노출되는 일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귀인한다. 이 점을 간단히 “자신이 ~ 된다”로 축약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서 우타이테 가수에게 ‘버츄얼’은 하나의 대안적 위치로 받아들여졌다. 특히나 목소리와 노래로 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조악했던 초창기 아바타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뿐더러, 이미 보컬로이드 등을 통해 ‘노래’하는 이로서의 ‘강조점’으로 아바타를 이용하는 것은 시장의 적응에도 몹시 수월했다. 원칙적으로는 보컬로이드와 버츄얼 스트리머는 모두 온라인 상에만 존재하기에 서로 구분되지 않는 게 정상이지만, 버츄얼쪽은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즉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어느 정도 수행은 하더라도 그게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결정 내린 것이라는 점에서 버츄얼은 ‘존재’한다고 보여진다. 이때 ‘안의 사람’은 그와 같은 물성을 강조하고자 몸의 상처나 현실지리, 개념 등을 자주 강조하게 된다.


‘버츄얼’로서 <가구야>는 일정한 내러티브가 있지만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의 이야기는 ‘너’와 ‘나’라는 두 인물의 일상이 중심이 되며, 이 안에서 플롯은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세계가 두 사람을 위해 봉사한다는 느낌마저 드는데, 단언컨대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곧 장르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있는 그대로 읽을 수도 있지만 내적으로는 특정 장르의 팬이 읽어낼 수 있는 기호를 곳곳에 설치해 장르의 팬들에게 ‘독해’의 재미를 준다. 손동작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몇몇 장면이나 최애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서로에 눈짓하며 말을 주고받는 장면 등이 그렇다. 여기에 대외적으로는 야치요와의 라이브를 성사시킨다는 당위가 있지만, 내적으로는 두 이로하와 가구야 두 사람의 연애전선을 돕게 되는 이로하의 오빠 등, 어떤 것을 함께 보고 듣고 경험하는 과정이 작품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이건 일종의 콘테스트로 포장된 ‘사건’에 가까운데, 지금의 두 사람이 미래에 이어지기 위한 분기점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로하와 가구야 두 사람이 목표로 하는 야치요와의 라이브는 사실 미래의 가구야인 야치요가 자신의 과거에 습득한 ‘노래’를 수행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이 경험하는 ‘사건’이 곧 확정된 미래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므로, 겉과 속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으로도 볼 수 있다.


소위 서브컬처 작품에서는 메타포 등으로 작품의 겉과 속이 서로 달라지는 일이 흔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참조할 만한 흥미점이 하나 있다. 소위 ‘백합’ 커플링을 묘사하는 일에서 ‘겉’ 시간과 ‘속’ 시간이 서로 동행한다는 점이 그렇다. 작품에는 두 개의 시간선이 있다. 하나는 이로하가 가구야를 처음 만난 시간이고 하나는 가구야가 과거로 돌아가 야치요로 등장해온 시간이다. 이 과정은 하나의 환류를 형성하고 있어서 이것 자체로 거대한 내러티브를 그린다. 이 안에서 ‘바깥’으로의 탈출은 이로하와 가구야가 맺어지는 것, 정확하게는 ‘그’가 하나뿐인 당신(ONE)을 알아볼 때 이루어진다. 이로하가 라이버로서의 야치요를 좋아했던 게 그가 미래의 ‘가구야’라는 점을 알아서였기 때문은 아니지만, 반대로 야치요를 좋아했기에 가구야에 끌렸다는 말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반복되는 쪽은 가구야이며, 순서로 보면 그가 이로하가 좋아할 만한 행동이나 성격을 이미 알고서 자신도 그렇게 행동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렇다면 가구야는 야치요의 대용품인가? 이 말은 야치요와 가구야가 동일인이기에 성립하지 않는다. 미래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모방하거나 본능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이 구조에서 두 존재는 주술학적으로 동일인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이렇게 나뉜 시간을 취합하는 존재로서의 ‘관객’인데, 여기서 관객은 수렴하는 ‘미래’로서 자리하기 때문이다.


작품 안에서 야치요의 시점은 정확히 2회차 관객의 그것과 같다. 첫 등장 시점에서 야치요는 이미 자신의 과거를 아는 상황이며, 심지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과정을 스스로 수행해야 하는 처지다. 이를 위해 오랜만에 만난 이로하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서 모든 사건이 벌어진 후에야 비로소 이야기를 꺼낸다. 1회차 관람에서 관객은 이로하를 따라 가구야와의 관계를 중점으로 보게 되지만, 2회차 관람에서는 반대로 야치요의 시점에서 행복한 결말을 따라가는 관찰자 역할을 맡는다. 결과적으로 이 관람 구조에서 행위의 핵심의 주동자가 되는 건 가구야다. 이로하와 야치요가 맺어지는 과정에서 커플러로 사용되고 또 이야기의 진행을 성립시킨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겉’이 이로하와 가구야가 최애인 야치요를 영접하는 이야기라면, ‘속’은 그 최애가 사실은 가구야 본인이었다는 점이 ‘해피엔딩’을 끌어내는 관객의 진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작품 전반에 깔린 셈이다. 정해진 미래를 극복하는 게 작품이 말하는 ‘결말’의 의미라면 여기서 관객의 역할은 결말 자체로서, 자신에 주어진 정보를 취합해 대안적 상황과 코드를 작성한다. 이를 위해 겉과 안으로 나뉜 작품은 사이에 기호를 두고서 그 자신을 조합에 알맞은 상태로 진화시킨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관객의 해석 안에서만 완결성을 갖고서 존재하게 된다.


관찰하는 사람을 따라서만 내부가 성립한다면, 이를 들여다보기 전에는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대개 이런 부류의 작품이란 게 다 그렇지만 독해에 따라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지기에 이미 작품 자체가 특정한 결말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곳곳에 흩어진 기호를 조합함으로써 매 순간 다른 해석의 방향을 갖고 또 그게 언제나 행복한 결말에 도달하게 해주지만, 반대로 정체성의 부존재는 작품을 대하는 방식을 고민하게 한다. 가령 우리가 인격으로서 소프트웨어를 가정하면 이 이야기에서 물리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와 같은 고민이 남는다. 만약 작품이 보컬로이드와 버츄얼 스트리밍이라는 두 개 참조점을 내부에 들여온다고 가정하면 이 안에서 이야기는 바깥이 아니라 내부를 스스로 참조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바로 이 자가증식하는 로고스는 작품을 특정한 흐름으로만 설명할 수 없게 하면서 내부 자체를 참조하게 하고,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빈틈을 ‘해석의 자유로움’으로 이용하는 게 바로 작품 전반의 논리다. 결과적으로 작품의 시간선이 동시에 중첩돼있다는 점을 ‘혼돈’이냐 아니면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로 바라볼 것인지가 주요 쟁점인 셈이다. 이후는 영화팬들이 잘 아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작품 하나만 보아도 본편으로 완결성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는 한편, 게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이야기(Show)는 계속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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