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나선 건, 상처받을 준비를 위함

<리틀 아멜리>(2026)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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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난 아멜리가 자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언급한 게 바로 ‘시선’이다. 그는 시선이 나머지 후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에 비해 동적이라고 언급하는데, 실제로도 그렇다. 표정에서 가장 많은 점을 차지하는 게 바로 동공이며, 그래서 서양에서는 눈을 마주하는 게 서로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2살까지 아무런 시선을 주지 않던 아멜리는 세상을 신뢰하지 않던 것일까? 아멜리는 할머니를 만나 자신이 태어났다고 말하며 다시금 시선을 말한다. 다른 가족이 자기를 하나의 객체로만 대할 때 그녀만이 하나의 존재로서 바라보아주었다고 말이다. 이를 따른다면 ‘시선’은 존재를 발견하고 또 인정하는 능력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샤를 보들레르는 시선을 던지는 일을 두고서, 한 세계의 지속을 돌려받는 행위로 여겼다. 그의 산문시인 ‘창문들’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닫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사람만큼 많은 것을 볼 수 없다.” 보들레르는 닫힌 눈을 통해 한 세계를 보는 일을 즐겼으며, 이때 중요시되는 건 ‘시선’을 던지는 능력이다. 안에서 밖으로 투과하는 시선은 계속해서 세계를 탐험하려 들기 때문이다. 특히 시선은 세계를 탐험하는 시작점이 된다는 점에서 모든 시인이 가져야 할 미덕이다. 영화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관객이 된다는 건 스크린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부를 탐험하는 여행가로서 인식하는 일이다. 관객은 영화를 단순히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시선을 보내 자신이 서고자 하는 특정한 ‘입장’을 선택해야만 한다. 단순히 주어진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발을 디뎌 살아가고 싶은 세계를 선택해야 한다. 아멜리도 이와 같은 처지에 있다. 벨기에 사람으로 살거나, 일본인으로 살거나. 아멜리는 자신이 탐험한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을 슬퍼하지만,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는 온 가족이 자리를 뜨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멜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이 세계는 다시금 그 자신이 이야기를 가꾸어가기를 바란다.


<리틀 아멜리>에는 어린 아멜리가 니시오와 함께 비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비를 맞아 축축해진 아멜리와 니시오는 창문 한편에 ‘비’를 한자로 적는다. 여기서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바깥의 풍경은 아멜리가 자신을 일본적 풍경 안에 기입해넣는 계기가 된다. ‘비’에서 자신을 발견한 아멜리는 이름을 돌려받는 상황을 즐거워하면서 일본인이 되겠다고 말하지만, 양친은 단박에 이를 부정하며 아멜리는 벨기에인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작품에서 비가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아멜리가 비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는 중반부의 사건 이후, 영화의 중요 장면에는 대개 비가 오고 있어서 그때마다 아멜리의 지평도 넓어진다. 해변에서 죽을 뻔한 때와 자신을 구해준 오빠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던 때, 니시오가 집주인과 갑론을박을 펼치며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전하던 때 모두 비가 온다. 비가 아멜리를 대변하는 장치임을 고려하면 아마도 이 땅에서 유래한 아멜리의 정체성은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존재가 있다는 일본식 신토에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가령 신토의 주요 의례적 통과물인 도리이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시선을 받아들이는 장치다. 현실과 신의 세계를 잇는 이 경계는 두 세계를 분단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통과해가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같은 의미에서 ‘시선’은 주체가 속한 세계와 그가 응시하는 곳을 서로 다른 곳으로 다루기보다 자연스럽게 이행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그러니까 아멜리에게 비가 내리는 순간은 한 존재가 이 세계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흐름으로서의 ‘적응’을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건은 조금 더 앞쪽에서 벌어져, 아멜리가 호수에 잉어밥을 주러 가며 도리이를 지나쳤던 그 순간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아멜리는 이 세계가 지정하는 플롯과 줄거리를 벗어나 자신이 새로 쓰는 이야기의 흐름으로 진입한다. 이 안에서 아멜리는 자신이 설 수 있는 특정한 ‘입장’을 만들고, 이를 통해 현실에 적응한다. 동시에 아멜리는 자신이 특정한 것에 정체되지 않고 흐를 수 있는 ‘일본’을 사랑했다.


영화는 우리가 한 세계에 적응하도록 돕는다.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건 아니더라도 두 곳을 분단하지 않고서 어느 한 곳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엿본다’는 건 다른 세계의 입장에 ‘선다’는 게 되며, 이와 같은 발견의 순간은 영화의 환경에 대한 ‘적응’을 뜻한다. 이때 영화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볼 만한 건 영화와 관객을 분리할 수 있는가, 즉 ‘국가’와 ‘국민’을 분리해 바라볼 수 있는지다. 영화가 다루는 결 중에는 일본인 집주인이 니시오를 두고서 “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잊었느냐”고 꾸짖는 대목이 있다. 그녀는 전쟁 당시 가족 모두를 폭격으로 잃었고, 그 결과 자신이 아는 세계가 아닌 모든 것을 배척하게 됐다. 벨기에에서 온 영사 가족은 가족 개인으로도 그렇지만 국가로서도 일본과 전쟁을 수행한 바 없으니 미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들 가족은 이야기의 내부에 있지 않으며 전쟁을 수행한 주체가 아니니 서술적으로도 얽힌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집주인인 그녀는 이미 한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한 ‘입장’에 섰다. 그녀는 전쟁의 기억을 끊어내지 못한 채 계속해서 전후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자아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서는 기억이 분단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시선’이 하나의 입장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들 국민은 ‘일본인’이라는 ‘국가’적인 정체성 안에서만 존재한다. 국가와 국민을 서로 분리해보아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는 전 일본민족의 전후 정체성에 대한 동화였다. 이런 일은 전후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녀 자신이 삶을 받아들이는 ‘적응’의 한 형태였을 수는 있지만, 결국 ‘영화’와 ‘관객’을 분리해볼 수 있느냐는 물음을 남긴다. 만약 영화의 앞에 서서 시선을 던지는 존재를 관객이라고 본다면, 이들이 특정한 ‘입장’을 갖게 되는 건 그러한 관점을 강요하는 영화의 직능 때문일까? 영화가 하나의 틀을 갖는다고 해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결정할 수 있을까. 국가와 국민을 분리해 바라보아야 함은 영화와 관객을 나누어 생각해야 하는 것과 그 이유가 같다.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분단하지도, 시선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집주인에 관한 묘사는, 그저 일본의 ‘바깥’으로서 뭉뚱그려 받아들여질 뿐인 이 묘사는 객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이뤄지고 있지 않아서 어떠한 ‘입장’이나 ‘태도’를 갖기보다는 내부로의 응축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아멜리도 두 살까지는 자신을 있게 한 이곳 세계를 원망했었다. 세계를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눈은 자신이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느끼게끔 한다. 마치 영화가 펼쳐놓는 온갖 변화를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아야 하는 관객처럼, 자신이 이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상상은 특정한 ‘입장’을 갖지 못하게 한다. 어차피 이 세계의 참여자가 될 수 없는데 그런 생각은 아무런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멜리는 말을 배운 후에도 자신에게 언어능력이 있음을 숨기면서 세계의 질서 안에 편입되기를 주저한다. 눈을 움직여 이곳에 아무런 시선도 주지 않던 그는, 이내 자신을 특정한 ‘입장’으로 발전시키면서 하나의 주체로 탈바꿈한다. 단지 이 세계의 주민으로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자신이 만날 소중한 순간들을 탐험하려 한다. 그가 이 자리에 나선 건 언제까지고 시선을 보낼 수만은 없다는 걸 알아서였을 수 있다. 영화의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이들에게 ‘영화’는 아무런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만들어가려는 이는 그런 상처 안에서 자신 또한 상처받을 준비를 해야만 한다. 아마도 아멜리는 자신이 무심하다고 여긴 이 세계에 자신이 속할 때, 그 자신이 마주하게 될 감각들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국민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국가의 정체성을 지닐 때는 살아가는 것과 몸에 지닌 것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집주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계가 자신을 그저 관객으로만 남겨두기를 바라지 않았다. 시선은 우리가 속한 곳을 토대로 두 세계를 하나로 잇는 효과가 있지만, 반대로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서 그것대로 유쾌한 감정인 것만은 아니다. 아멜리가 집 안에서 바라보던 바깥의 풍경만큼이나 관객이 바라본 이 세계는 아름답고 또 잔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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