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는 언제나 올바른 길을 비추고 있어

<초 카구야 공주!>(2026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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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가구야 공주>는 인터넷 서브컬처 미디어 문화의 한 면을 가져와 만든 작품이다. 보컬로이드와 메타버스, 버츄얼 스트리밍을 서로 섞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건 단연 팬문화에 대한 향수다. 이를테면 작품이 큰 줄기로 삼는 플롯은 가구야 공주가 달로 돌아가기까지의 기간이다. 버츄얼 스트리머의 활동 종료가 달로 돌아가는 날로 정해지면서 작품은 가구야의 ‘졸업’을 지구에서의 마지막 말로 탈바꿈시킨다. 이는 버츄얼 스트리머의 다수가 RP를 수행하면서 지정하는 배경 세계와 함께, 이들이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졸업’이라는 중대사를 상기시킨다. 버츄얼 스트리밍을 간단하게라도 접해본 이라면 이들 업계에서 말하는 ‘졸업’에 다양한 감정이 들 것이다. 기업세로 데뷔한 게 아니라면 대개는 제반에서 스트리밍을 계속 이어가기 어려운 환경일뿐더러, ‘성과’가 없으니까 감정적으로 지쳐서 금세 자리를 뜨는 경우도 태반이다. 단순히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스트리밍을 계속 이어갈 만한 동력이 되지 못한다. 눈높이가 높아진 시청자들 앞에서는 아바타의 기술적인 품질, 현실 장비의 유지 및 보수 비용, 방송인으로서 갖춰야 할 예능감까지 다양한 분야에서의 조건이 필요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버츄얼 스트리밍을 하는 일은 일정 부분 사업을 운영하는 것과도 같아서, 이 자영업자들은 어렵게 등장해서 쉽게 망한다. <가구야>가 원전을 재해석한 점 중에 흥미로운 대목은 이렇게 “N일 후에 달로 돌아가야 하는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버츄얼 스트리머의 ‘졸업’에 빗대어 진행한다는 점이다. 짧게 줄인다면 “내 오시 졸업하지마 엉엉”정도가 아닐까. 많은 리스너는 항상 ‘졸업’을 마음 한구석에 대비한다. 이별에 놀라지 않도록 말이다.


버츄얼에 관해 조금 더 말을 이어가보자. 대중일반이 상상하는 버츄얼과 서브컬처에서 말하는 버츄얼은 한 가지 특성에서 차이가 있다. 서브컬처에서 말하는 ‘버츄얼’은 현실의 공간을 가상으로 옮겨두는 게 아니라 자신이 현실의 특성이나 되고 싶은 모습 등을 조형하는 곳에 가깝다. 이는 캐릭터 산업의 특성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는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다”는 초월의 욕구에 근간한다. 더 나은 곳을 향해가는 건 인류의 공통된 마음이지만 여기서 버츄얼이 개입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서브컬처의 버츄얼함은 현실이 보이더라도 의도적으로 그걸 피해 가는 쪽에 가깝다. 버츄얼 스트리머의 성별이나 주거지, 나이가 대략 추론되더라도 이에 침묵한다고나 할까. 속마음과 겉마음이 서로 다르다면 마찬가지로 현실과 버츄얼의 정체성도 다르다. 이 둘을 별개의 존재로 취급하면서 양자를 공존가능한 존재로 보는 게 바로 ‘서브컬처가 말하는 ‘주변부’의 의미다. 일본식 결투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를 먼저 밝힌 뒤에 칼을 빼 드는 쪽이라면, 버츄얼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리스크에 대한 분산이 이루어진다. 노드 사이로 연결된 관계에서 익명은 대상을 단순히 가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에 연결함으로써 어느 하나로 특정될 수 없게 한다. 그런데 중앙이 없고 주변부만 있다면 반대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 이 문제에 관해서는 주변부에 가두어진 곳이 바로 중앙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것을 말할 때, 내면의 중심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현재 연결되어 있는 주변부에서부터 차분히 접근한다. 이 작품의 ‘보카로’는 그런 접근을 대변한다.


기술적인 면에서 보컬로이드를 설명한다면, TTS를 통해 음성을 구현하고 이를 통해 노래를 부르게 하는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음악에 정통한 기업 ‘야마하’가 2004년 처음 선보인 이 프로그램은 ‘뮤지컬 음성 합성 엔진’으로, 우리가 아는 보컬로이드에 해당하는 건 이 안의 ‘발화자’이다. 요즘으로 치면 네비게이션 음성을 선택하는 것과 비슷한데 마찬가지의 움직임이 당시에 있었다. 말을 하는 존재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캐릭터 산업을 진행해보자는 것이다. 너무 냉정하게 적은 것도 같지만 하츠네 미쿠를 비롯한 여러 ‘보카로’는 라이브러리 판매사의 상품 전략에서 처음 탄생했다. 동시에 서브컬처의 캐릭터 산업의 확대양상을 고려하면 이 ‘노래’를 하는 존재의 상징성은 특별했던바, 단순히 무언가를 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듣는다’는 점이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음악에서의 발화는 언어를 사용하며 대화하는 측면에서의 그것과 상당수 다르기 때문이다. “소리를 내어 말한다”는 발화가 일상에서는 단순히 발음기호나 억양을 정확히 전달하는 점에 그치는 반면, 음악에서의 ‘발화’는 쉽게 말로 꺼내기 힘든 속마음을 ‘전한다’는 점에 초점이 있었다. 이는 수행의 측면에서도 중요했는데, “문장을 발화하는 게 곧 행위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음악의 역사에 따르면 악보의 발명은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졌던 화성 음악에서 대상을 분리해냈다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이는 곧 발화가 일종의 주체를 승인하던 것에서 음악 자체에 수행성을 부여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가사’는 곧바로 무언가를 선언하는 일에서 벗어나 사람들 간에 전파되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악보가 음악을 신체에서 분리했듯, 보컬로이드는 목소리를 육체에서 분리해 완전한 '메시지'로 탈바꿈시켰다. 이들 보카로는 이용자가 손쉽게 가사를 적어 이를 노래로 변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적고자 하는 방향성’을 음악으로 풀어내기에 좋았다. 바꾸어 말해 ‘가사’란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적는 것과도 같았고 ‘노래’는 이것을 [세계]에 연결했다. 노래를 통해서라면 자신의 꿈을 세계에 보이거나 반대로 세계를 짊어지는 식으로 서로에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러니 보카로가 단순한 캐릭터 해석 이상의 문화로 발전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보카로는 동영상 투고 사이트인 니코니코동화와 맞물리며 우타이테 붐을 이끌었다. 보컬로이드의 음악, 혹은 가수의 곡을 따라 ‘불러보았다’는 식으로 진행되는 서사는 단순히 곡을 소화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서 이들 곡이 말하는 ‘꿈’을 따라갔다. 소위 ‘말하고 싶어’라는 행위를 직접 수행하면서 ‘육체-현실’ 에 구애받지 않는 ‘꿈’을 하나의 교집합으로 삼게 된 셈이다. 인간의 관계가 펼쳐지는 장 안에서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서로의 얼굴이 곧 무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무대는 관계 안에서만 펼쳐지는 것으로서, 모두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반대로 사람들 모두에 열린 공간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익명을 필두로 한 버츄얼이 어떻게 사람 간의 연결을 이끌어냈는지를 잘 보여준다. 주인이 부재하는 꿈은 일종의 마을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움을 받아 자라나고 또 공유된다. 단순히 달의 공간이 현실의 뒷면으로만 이해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꿈이 만나는 곳이 되는 것, <가구야>의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현실에서는 허공으로 손실되는 음악들이 이곳에서는 마음으로 울려퍼진다.


‘네트’는 분명 흥미로운 소재이지만, 만들기 쉽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최근 서브컬처 작품군에서는 유튜브와 버츄얼 스트리밍을 다루는 내용도 간혹 등장하는데 이들 내용은 결국 우리가 익숙히 알아왔던 과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잦다. 동영상을 투고해서 더 많은 조회수와 인기를 얻는다는 설정이 UCC 등의 분과에서 유튜브로 발전한다면, 얼굴이나 신상을 가린 채로 온라인 투고 사이트에서 활동한다는 점은 버츄얼 스트리밍에 그대로 계승됐다. 특히 전자가 단순히 현실의 한 조건을 갖고서 “달성하지 않으면 현실의 제반조건이 무너진다”고 말한다면, 후자는 온라인의 성격을 스마트폰과 같은 접속기구를 통해 오프라인으로 확장함으로써 익명의 존재가 보다 일상에 더 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그러니까 우타이테 문화가 컴퓨터와 모니터라는 두 개 조합으로 구성돼 ‘다른 세계’라는 인상을 줬다면, 버츄얼 스트리밍 환경에서 존재자의 출연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가르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들에 대한 음차로서 주변부로의 확장을 이어가는 감이 있다. 보이는 그대로를 읽는 것은 쉽지만 반대로 이를 글로 풀어내는 건 어렵다. 하지만 언어의 목적은 마음을 전하는 것에 있으니 읽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를 말해도 괜찮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서 중요한 건 무엇을 볼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어디를 보고 있는지다. 그리고 음악은 사람들이 서로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는 점에서 “모두가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가구야 공주처럼, 다시 만날 날을 위해 나아가는 일이 꿈을 좇는 일이 된다면 마찬가지로 노래하는 일도 결국에는 꿈에 시선을 보내 이름을 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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