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애니메이션이 방영을 마쳤다. 만화가 끝난 건 꽤 됐지만 애니메이션도 비교적 빠르게 원작 진도를 따라잡았다. 주변에서 만화에 관한 반응을 들었을 때 의아했던 건 작품의 감정선이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들은 주인공이 자신을 적대하던 친구인 바쿠고와 주요 대립선인 시가라키를 용서하는 일이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주인공이 자신의 처지에 이입해 상대방을 ‘또 다른 나’로 정의하고, 이를 구함으로써 자기를 용서하는 식으로 이어지는 서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작품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는 건 자신이 동경하던 히어로를 스승으로 두고, 그의 이념을 따라 ‘모두를 구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설사 악인이더라도 무언가 사연이 있으면 이를 분리해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인공은 믿는다. 이 주장은 소위 ‘악인의 서사’를 근간에 둔 몇몇 반대논리에 부딪히는데 여기서 자유로운 건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끈 <귀멸의 칼날>이다. <귀멸>은 혈귀 자체를 악인으로 분류하지는 않지만, 그들 개인의 사연을 ‘악행’을 보여주는 것에 치중함으로써 개인의 서사가 곧 악인을 완성하는 구조로 짜여있다. 이 안에서 피를 먹을수록 강해진다는 설정은 ‘약한 혈귀=사람을 해치지 않았음=비교적 초기 단계의 혈귀로, 아직은 피해자에 가까운 상태’라는 공식을 성립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약한 혈귀에 ‘동정’을 보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나히아>에서 이들 집단은 서로 같은 종이면서 동시에 ‘개성’이 다를 뿐이다. 개성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이 만화에서 ‘강함=파괴력’이 아니다. 오히려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닿을 수 있는지가 강함의 척도가 된다. 가령 시가라키의 능력만큼이나 에리의 개성도 절대 다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으니, ‘강하다’고 보면 사실 두 사람은 엇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무엇보다, 작품이 추구하는 ‘강함’은 이를 통해 무엇을 해낼지에 달렸으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싸움’으로는 볼 수 없으며 아마도 이게 작품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주된 이유인 듯하다. 주인공이 닮고 싶은 ‘강함’은 자신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하는 스승의 모습이었다. 스승인 올마이트는 매번 등장할 때마다 “~내가 왔다”라는 멘트를 하는데 이는 곧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문제를 해결하는 부류의 ‘사건’은, 이후에도 ‘하지만…’이라는 정도의 말이 나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문제를 종결한다. 이 ‘하지만’은 문제를 확장해서 사건을 이어가는 부류의 여운이 아니라 한 세계를 매듭짓는 부류의 수사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을 기약할 수 있고, 또 뒤를 돌아볼 수 있다. 시야가 이동하지 않으니 자신이 앞 뒤로 바라보는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잃는다. 주변이 흐릿하고, 사건이 계속되니 무언가 안심할 겨를이 없다.
이런 와중에 주인공이 내보이는 헌신은 무언가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주인공은 작품의 시작점에서 이미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인 바쿠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무언가 능력이 없더라도 상대를 구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올마이트와 바쿠고 둘 모두 생각을 바꾸게 된다. 사람을 구하는 일은 개인이 지닌 ‘개성=힘’의 척도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 겪는 고통을 ‘끝낸다’는 것이다. 무언가 자기 손으로 사건을 시작해 완수하지 않더라도 경찰이 오기까지 기다리거나, 피해자가 패닉에 빠지지 않게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도 사람을 ‘돕는다’는 점에 포함된다. 만약 개인의 세계가 정말로 좁다면, 오히려 그렇기에 다른 이를 안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을 불안에서 꺼낼 수 있다. 애초에 이 세계가 정말로 넓다면, 혼자만의 힘으로 모두를 구하기보다 당장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것부터 차분히 일을 시작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적의를 불태워도 모자랄 마당에 무언가 상대방을 ‘구원’하거나 ‘용서’하는 듯 보이는 면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지적도 있었다. 확실히, 요즘 시대는 순간의 실수가 개인에게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낙인을 찍으므로 소위 말하는 ‘나락’의 행동학이 성립한다. 하지만 한번 낙인을 찍는 것만으로 사건을 끝내버린다면 이후 생각을 이어가거나 ‘하지만’ 같은 일을 벌일 수 없게 된다. 사람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싫거나 나쁜 사람이 있어도 아예 대화를 끊어버리면 ‘…하지만’ 같은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작품의 마지막까지 시가라키는 주인공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주인공의 말이 ‘틀렸다’고 여기지 않으며 서로가 추구하는 각자의 이상을 펼쳐보자고 답한다. 일종의 자유주의랄까. 만약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다면 반대로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시가라키에게 세상은 일종의 투쟁상태였던 것 같다. 주인공이 없었다면, 아마도 시가라키는 끝까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시가라키가 지닌 능력의 속성처럼 인접면을 토대로 번지는 붕괴는 일종의 ‘전염’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이나 혐오, 상처와 폭력 같은 면이 전파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끝낼 수 있을까? 고쳐 말하자면 이 이야기를 바르게 마주하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무턱대고 ‘종료’를 선언해버리면 더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이야기를 끝내버리는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여로가 지적한 다음 문장을 인용해두고 싶다. "〈주술회전 회옥·옥절편〉의 말미에, 임무를 수행하던 게토가 고죠에게 묻는다. 아미나이가 텐겐 님과 동화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건지. '그럼 동화는 없다'. 그게 고죠의 답이었다. 게토는 '그렇다면 주술계 전체와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자, 고죠는 '우리는 최강이니까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답한다." 아미나이와 텐겐, 두 존재는 인접면으로 닿아있어서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사건을 끝낼 수 없다. 고죠는 작중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만화웹툰평론가협회에서 진행하는 ‘만화웹툰장르대백과’ 발간에 드라마 장르로 참여했다. ‘드라마’라는 장르에 관해 생각하면, 무언가 할 말이 많아진다. 너무 광범위한 걸 다루는 속성이어서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도 이 장르를 가장 좋아한다. 애초에 좋아한다고나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는 사실 모든 장르의 원형이 되는 장르다. ‘드라마’라는 말은 애초에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극화’에서 출발했으므로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무척 어려울 것이다. 어떤 영화 좋아한다고 물어보면 영화 좋아한다고 답하는 기분이랄까. 다만 드라마의 속성에 관해서는 말해둘 수 있겠다. 드라마는 ‘…하지만’을 주된 정서로 삼는 장르다. 일찍이 오즈 야스지로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다양한 형태의 ‘드라마’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는 많은 모습의 ‘하지만’이 있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학교는 나왔지만 등. 후반에 가면 제목에서는 그런 이름이 사라지지만 내용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 ‘하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과 문맥이 닿아서 인물은 각자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묵묵히 자신이 보는 곳으로 나아간다. 무언가 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딱히 화를 낸다고 해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돌아오지 않을 답변을 기다리며 세상에 물음을 던지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가능성을 제로로 만드는 일과 0.1%라도 남겨두는 일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고죠는 자신이 살아가는 곳이 더 나은 세계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는 사람의 의지와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 주술계에 환멸을 느꼈다. 이후 해당 임무를 진행하면서 고죠는 물리력을 앞으로만 보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도 합하는 일을 습득함으로써 ‘허식’을 할 수 있게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고죠는 밀어내는 것과 끌어안는 것, <귀멸>과 <나히아>의 사이에 있던 존재였던 셈이다. 고죠가 느낀 한 세계의 정상이란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하기보다 그 자신이 사라져야만 비로소 세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지만’이라는 전환점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해결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거나 시간은 결국 흘러간다. 그럼에도 ‘…하지만’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적을 바랄 수는 있다. 아예 시간을 멈춰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으로 시간을 배척하거나 아니면 시간을 따라 행동하면서 그에 동화되는 수밖에는 없다. 고죠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법칙을 거스른다 해도 그것만으로 무언가 인지와 사고가 중단되지는 않지만 더는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어쩌면 주술계와의 싸움에서 자신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스쿠나와의 싸움에서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