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밴드물을 생각해보던 중 일본 애니메이션의 밴드물에 대해 써줄 수 있겠느냐는 요청을 받았다. 음악에는 조예가 깊지 않으니 조금은 망설였지만, 느낀 그대로를 써보기로 하고 수락했다. 무엇보다 근래 존 카니의 <씽 스트리트>를 다시 떠올리며 음악을 듣던 터라 개인적인 궁금증이 들었던 것도 한몫했다. <씽스트리트>는 전작인 <원스>와 <비긴 어게인>과는 다소 결이 다른 작품이다. 두 작품이 서정적이고 복잡한 남녀관계를 다룬다면 <씽스트리트>는 조금 더 ‘락 앤 롤’(이하 락)에 가깝다. 음악의 장르적인 혼성이 시도되는 오늘날 ‘락’은 초창기의 거센 이미지를 벗어나 드럼, 베이스, 기타, 보컬이라는 네 가지 타입을 충족하기만 하면 시도 가능해졌다. 이에 매체에서도 락 밴드를 다루는 일이 흔해져, 여고생 락밴드라는 기묘한 조합에 이르게도 된다. 가령 <봇치 더 락>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락을 표방하고 있다. 아시안-쿵푸-제너레이션(이하 아지캉)을 모델로 한 네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락’은 주인공인 봇치가 자신의 성격을 바꾸며 조금은 더 사교적인 성격으로 탈바꿈하는 일에 결합한다. 바깥 세상을 향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락’이지만, 이 락이 저항하는 건 어떤 위계나 질서가 아닌 ‘나 자신’이다. 마찬가지로 <싱 스트리트>의 마지막 장면은 음악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가정사에 대한 반발로서 마무리된다. 주인공은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바다에 배를 몰고 나가 폭풍우를 마주하는데, 이 결말이 의미 있는 건 휘몰아치는 파도의 흐름에 ‘저항’한다는 점이 잘 표현되기 때문이다.
‘락’은 역사상 저항정신을 상징해왔고 동시에 그러한 이미지가 대외적인 콘셉트로 소비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매체에서 ‘락’은 일종의 저항정신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학교라면 무언가 얌전하지 못한 학생으로 그려지거나 사회인이라면 부적응자 등, 다양한 면에서 외부에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락’은 세상에 저항하는 게 아니라 그 세상에 적응하는데 저항(=어려움)을 느끼는 이미지로써 소비된다. 힙합하면 무언가 돈다발을 뿌리며 금목걸이를 휘두르거나 하얀가루를 소비하는 모습이 연상되듯, 저항의 아이콘이 도리어 하나의 이미지로 소비되고야 만 셈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락’은 단순히 무언가를 상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이룰 수 있었다. 한 세상에 저항하는 건 그런 세계가 없을 때 목적을 잃는다. 이미 ‘큰 이야기’가 사라졌다고 말해지는 이 세계에서 음악을 통해 반전 메시지를 전하거나, 독재에 항의한다거나 하는 일은 더는 보기 어려워졌다. 몇 년 전 퀸의 일대기를 다룬 <보헤미안 랩소디>가 한국에서 인기를 끈 것도 어느 정도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독재정치가 끝난지 아직 50여 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시대를 잃고 있다. 2016년과 2024년 겨울에 움츠렸던 에너지가 잠시 부활했지만, 그것도 잠깐뿐이다. 퀸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다룬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람들은 퀴어 서사의 프레디 머큐리, 그리고 회사에 거절당했던 명곡 ‘보헤미안 랩소디’의 부활 서사를 겹쳐보았을 것이다. 락의 저항정신이 다시금 개인에 복속하며 부활하는 대목인 셈이다.
시대를 잃은 저항은 이미 음악과 같은 형태로 파생돼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락’을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봇치 더 락>이나 <걸즈 밴드 크라이> 등을 떠올려볼 수 있다. 나이든 오타쿠가 늘어나는 시대에 두 작품은 아무런 생각없이 보기만은 힘든 내용이 된 것 같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작게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하루를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앞서 말했듯 <봇치>는 고등학생 수준으로 볼 수 없는 고급 연주를 묘사하기 때문에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안심하게 되는 면이 있다. 이 현실은 낯선 장소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 현실감이 붕 뜬 서사에서 유일하게 다가오는 무게는 바로 인물의 고민이다. ‘봇치’는 자존감이 낮아 쉴 새 없이 우울감에 시달리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이상하리만치 좋은 사람들이 많다. 이 인력이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도 무언가 좋은 일을 끌어당길 것만 같은 인상을 받게 한다. <걸밴크>는 그와 정반대다. <걸밴크>는 의도적으로 실패를 실현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니나는 쉴 새 없이 손가락 욕을 선보이는 인물이다. 그녀 또한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 밴드를 구성하고, 메인스트림에 편입될 뻔하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이를 망치고야 만다. 여기서 강조되는 건 음악에 대한 자기괴리나 재능이 아니라 밴드를 하지 못하게 하는 가족과의 관계 등으로, 어떻게 보면 돈이나 학업 같은 현실적인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봇치>가 자신의 소심한 성격에 저항한다고 본다면, <걸밴크>는 무언가 자신을 기다리는 앞선 세상에 저항함으로써 잠시나마 숨을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행간을 축약해서 말한다면, 이들 앞엔 <싱 스트리트>처럼 거센 폭풍이 자리한다.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고 도리어 비천한 실패가 기다릴 확률이 크다. 니나는 검정고시를 봐서 졸업장을 따고, 대학에 다니며 평범한 회사원이 돼야 할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 작품의 목표는 ‘밴드’로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만화작가 이종범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 ‘이종범의 스토리캠프’에서 만화 <슬램덩크>를 설명하며 다음처럼 말한다. “이 만화의 결말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건 표면적으로 어떠한 성취를 이뤄내는 게 아닌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내면에서 이전에는 못했던 것을 해내고 싶다는 마음, 라이벌을 이기고 싶다는 의지, 팀원들과 계속 농구를 하고 싶다는 열망 등을 이뤄냈으며 결과적으로 <슬램덩크>는 계속해서 성장한다는 의미에서의 ‘미완’의 작품이다.”(슬램덩크 디지털판 기념 설명회) 같은 의미에서 <걸밴크>의 결말은 다소 이상하게 보이지만, 니나의 자기 성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든 ‘락’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슬램덩크>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10-FEET가 참여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에서는 다루지 않던 송태섭의 개인 서사를 그려내며, 태섭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형을 그리워한다. 여기서 형에 대한 그리움은 농구를 하는 자신의 성장과 연결된다.
태섭은 농구를 하는 내내 형의 손목 밴드를 차고 있다. 어려서 형의 그림자처럼 살았던 태섭은 경기에서 승리해, 형이 이루어내지 못했던 영역에 도달한다. 실력적으로 형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된 태섭은 자신을 사로잡은 과거에 ‘저항’해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아예 일본 밖으로 넘어가 미국에서 활동하기도 하는데, 이 연출은 바다로 간 태섭의 형이 돌아오지 못한 것과 대비돼 태섭의 모습을 마치 사후세계처럼 느끼게 한다. 소위 바다를 넘는다는 건 멀리 떠났다는 뜻이 있어서, 미국으로 떠난 태섭도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건 마치 <싱 스트리트>에서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다로 떠나는 장면에서 끝나는 이 영화는 철저하게 현실의 벽 안에 머무르려 노력하지만 <슬램덩크>는 이를 뛰어넘고, 바깥에 다다른다. 이 과정에서 10-FEET의 거친 락 음악이 등장해 태섭의 탈출을 돕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달리 표현하면 여태까지 설명한 작품, <봇치>나 <걸밴크> 등이 그럼에도 ‘미완의 결말’로서 삶을 긍정하는 반면 <슬램덩크>의 결말은 어딘지 모르게 ‘결말’을 내고 태섭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는 물론 은유다. 만화판의 열린 결말이 성장가능성에 대한 작품의 태도라면, 영화의 결말은 태섭의 내적 성장과 여정이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차이가 앞서 말한 <봇치>와 <걸밴크>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어주고 있다. <봇치>가 자신을 바꾸고자 과거로 돌아가려는 힘에 저항한다면, <걸밴크>는 과거를 바꾸고자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힘에 저항한다.
단순히 이런 것만으로 ‘락’에 대해 서술하기란 어렵다. 음악은 개인 취향이고, 락의 스펙트럼은 무척 넓어서 락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서로 말이 통한다는 보장이 없다. ‘레드 핫 칠리 페퍼’의 ‘Can’t Stop’을 듣는 사람과 마이 케미컬 로맨스의 ‘Welcome to the Black Parade’를 듣는 이의 취향은 서로 다르다. 아지캉의 ‘Re:Re’를 듣는 사람과 켄스케 우시오의 ‘Amen, I’m Going Somewhere’를 듣는 사람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실리카겔의 ‘Neo Soul’과 넬의 ‘기생충’도 서로를 나란히 하기 힘든 곡들이다. 대충이나마 두서없이 나열했지만, 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건 단 한 가지다. 만약 매체에서 등장하는 ‘락’의 모습이 무언가에 저항하는 이미지로 소비된다면, 음악을 듣는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어떤 종류든 우리는 락을 들음으로써 자신이 처한 상황과 골머리를 앓는 것들에 저항할 수 있다. 이때 저항하는 일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깨부순다고 해도 이미 우리는 나머지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머리로 천장을 들이받는다고 해서 그게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 세계는 여전히 아름답고, 그것들을 쟁취하려면 어느 정도는 추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자신의 추함을 견디지 못해 이를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박하사탕>의 주인공처럼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에서도 그렇고, <귀멸의 칼날>의 코쿠시보처럼 무언가 가벼운 이야기에서도 그렇다. 락의 종류가 다양한 것만큼이나 ‘저항’의 기준도 가지각색이니,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락’을 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