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지에 서다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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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짜증 나는 녀석들의 이름을 외우는 동안, 이와쿠라는 친절을 베푼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했다.”(<스킵과 로퍼>)


오늘날 시네필이라는 말은 무언가 ‘영화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예를 들어, 오타쿠 중에서도 무언가 시네필스럽다는 표현이 오가는 일이 있는데 이는 대개 영화에서 나올 법한 영상이나 음향, 공간 등에 행해진다. 어쩌면 시네필이 하나의 신분이 된 것 같기도 한 이 현상에서 생각해볼 법한 건 시네필의 정의다. 새삼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적인 것에 대한 발견과 유통의 경로가 시네필이라는 점에서 이 호칭은 부지런한 고고학적의 면모를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영화적’이라는 말이 통용된다면, 시네필이라는 말은 ‘발견’을 넘어선 ‘발굴’을 해내는 이로서 단순한 산책자 그 이상의 존재일 수 있다. 그리고 시네필은 이를 그냥 보고만 넘어갈 수는 없는데, 가령 건물을 짓는 현장에서 문화재가 나온다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보자. 이미 알아버린 이상 이를 다시 모른 체하는 건 어렵다. 마찬가지로 시네필들은 자신이 작품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영화’를 모른 체하지 못한다. 또한 이런 경험을 하면, 영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작품을 보면서도 혹시나 영화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놓지 못하게 된다.


아마도 이 경험은 일상의 어느 순간에 깊이 연결돼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시네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질 때는 영화가 남긴 강렬한 흔적에 사로잡힐 때다. 대개 이 경험은 억압돼있는데, 이는 자신이 영화에 대해 알기 이전에 했던 것이기에 그렇다. 인간의 경험을 초과하는 것들은 몸에 축적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배출되는 경우가 잦다. 이처럼 몸과 섞이지 않는 물질은 말 그대로 몸의 ‘내부’에 머무르지 않기에 위상학적으로는 외부에 있다. 영화란 일종의 이물질인 셈이다. 이는 방사능처럼 인체와 섞이지 않고,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분해되므로 그저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다. 영화를 자신의 기억으로 삼는다는 건, 진주조개처럼 이를 자신의 것으로 덮는 일에 불과해서 결과적으로는 무언가를 소화해내기보다 잠시 ‘다루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즉, 영화란 주체의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 자리하는데 이런 관점으로 보면 관객은 처음부터 영화에 소속되거나 이를 한 세계로 거친 적이 없다. 신분으로서 ‘관객’은 어떠한 공간이나 상황이 아니라 자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에 가깝다. 무엇보다 ‘관객’은 자신이 영화를 다루고 싶다는 걸 잘 아는 상태에 관한 자기진술이다.


영화는 그 자신을 주체의 안으로 투사하는데, 이는 바깥을 말하는 간접기능을 갖는다. 가령 길을 가다가 총알을 맞았다면 이를 발사한 누군가가 지근거리에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총알이 발포된 이후로는 대상이 표적에 적중하지 않는 한 행방을 찾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게 된다. 영화를 경험하는 이들은 이들 순간이 비롯된 곳을 찾아 떠돌게 되며, 이와 같은 상태를 바로 ‘관객’이라 부른다. 그러니 영화를 보며 무언가 기억에 남았다면, 그 기억은 우리 몸이 아니라 이 세계의 어딘가에 남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영화가 남긴 것이 아니라, 영화가 남은 곳을 가리키는 편이 더 적절하다. 다른 한편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 눈앞의 것에 대한 감각은 더욱 선명하다. 그게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인식은 이를 선험성을 초과해온 무언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소위 인식의 밖에서 안으로 찢고 들어오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외계에 대한 인식을 심어준다. 그래서 영화가 잠시 내면을 거쳐 간다고 가정할 때 관객은 영화가 열어준 외부를 통해서만 바깥을 들여다보게 된다. 한 영화를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 삼고, 동시에 세상에 통하는 길로 기능하게 되는 셈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이 느낀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는 것처럼 첫 영화 경험에 대한 기억은 자신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조차 잊혔을 수 있다. 또한 지금의 영화를 알지 못하더라도, 희미하게 남은 한순간만큼은 존재한다. 자신이 영화에 대해 알지도 못했던 때, 희미하게 남은 한순간으로부터 지금의 영화가 시작된다. 시네필이 바라는 건 아마도 이런 것일 수 있다. 관객 일반이 이 세계에 무언가 바깥이 있다는 점을 인지할 때 시네필은 이 세계가 처음 태어난 순간을 궁금해한다. 이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미지가 결코 존재한 적 없는 경험은 아니라고 믿는다. 중요한 건 이곳에 무언가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출구는 자신이 이곳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때와 장소를 잃어버린 이 경험은 자신의 삶을 증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는 한 순간은 이를 촬영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새로운 기억은 이후 하게 될 모든 경험들의 선행지표가 된다. 한번이라도 영화를 경험해본 이들은 빛이 들어오는 천장을 다시 잊지 못한다.


자신을 바라는 모두가 거울 앞에 서기만 하는 건 아니다. 어떤 경우 삶은 천장에 스며들어온 작은 빛을 바라보거나, 낮은 무대에 올라 외로운 쇼를 이어가는 것일 수 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시선을 앞으로 옮기는 연습을 하게 된다. 이는 당연하게도 눈을 감으면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해서 이 세계에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다. 눈을 감아도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라면, 영화를 보는 일은 시작과 끝을 잇는다는 점에서 어떠한 태도를 요구한다. 이는 자신이 배경으로 둔 세계를 전방으로 보여주는 ‘출구’가 되어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유년기의 경험에서 얻으려는 건 자신이 보는 이 세계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다. 기억의 정밀도가 아니라 언젠가 총성이 울려 퍼졌고, 그게 자신의 뒤에서 앞을 향했다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몸을 넘어선 기억이 마음을 넘어 행동할 때 영화는 희망을 틔운다. 일상에서 영화를 발견하고 찾아내는 일은 ‘그곳’이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몸을 살펴보는 사람이 있다. 그는 모르는 세월이 기록돼있지는 않을지를 고민하며 언제 경험했는지도 모를 기억들을 향해 나아간다. 한 영화를 어렴풋이 떠올리는 건 마음을 그곳에 둔 게 아니라, 우리가 있을 몸을 잃어버린 쪽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 순간을 좀 더 들여다보려 한다. 마음이 머무는 곳에는 이유가 있고, 반대로 마음이 떠난 몸이 살아남은 것에도 이유가 있다. 시네필이 바라는 건 이런 생각 사이에서도 살아남은 순간에 관해 이유를 얻는 것이다. 이따금 영화적 순간은 마치 우리 삶이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순식간에 자기 몸의 주인 위치에서 내려온 우리는 존재 일반으로 격하돼 지금 이 순간이 어떤 과거인지 아니면 시작되지 않은 미래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차라리 어떤 시간에 속했더라면, 적어도 마음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이 돌아갈 바로 그 시간들을 찾아 선다. 이 경험에 대해 생각하면, 시네필은 자신을 진정으로 대하고 싶은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자기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있게’ 말하는 것은 주저한다.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말하더라도 살아가는 자신에는 서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어느 곳을 바라보는 것일까? 우리는 몸에 속해있지만 반대로 몸을 등지고 서지 못한다. 아무리 세게 달려도 결과적으로는 몸이 정한 자리에서 시야를 다루게 된다. 어떤 곳에서 ‘영화적’인 것을 발굴하려는 욕망은 그와 같은 몸이 서는 장소에서 벗어나 보려는 시도와 같다. 지금 자신이 사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오래된 몸이 보여주는 낯선 순간에 머물고자 한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잃어버린 순간이 우리의 나머지 삶을 영화로 만들어주지 못하듯 이런 것들을 본다 한들 이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한계를 자책하게만 될 뿐이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런 점에서 ‘시네필’은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분과에 속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관객이 들여다보는 것을 염두에 두지만 반대로 어떻게 빠져나올지를 미리 설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삶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영화를 찾아다니는 시네필의 심리는 어떠한 태도에 서고 싶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에 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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