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의 삶, 한 번만의 지금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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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연구하는 사람이 비평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영화를 비평하는 이들은 무언가 이론을 더 공부하고 싶어하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연구’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잘 없다. 사실 이건 연구 자체가 무언가를 아는 상태에서, 다음 단계를 이행하는 일을 따라 진행되는 탓이 크다. 한번 연구를 시작한 사람은 지금 따라가는 길이 다음 선택지를 보여줄 때 어디를 가야 할지를 잘 안다. 비평이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아무런 지식이 없을 때 오히려 길을 잃기 쉽다면, 연구는 주어진 길을 충실히 따라간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런 우려가 없다. 물론 연구자의 길도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지만 오히려 따라갈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비유하자면 학제를 따라가는 방식과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를 조합하는 정도의 차이라고 할까. 이처럼 러프한 스케치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결과적으로 연구와 비평이 하나의 출발선에 있다는 점이고, 한번 길을 나선 이후에는 맞은편에 있는 길을 엿보는 정도의 간단한 차이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요한 건 지금 자신이 길을 걷고 있는지, 여행을 떠났는지일 뿐이다. 다만 앞서 연구가 마치 더 편리한 선택인 것처럼 묘사했으므로 다시 돌아와 이를 짚어내 보려 한다. 왜 연구자는 비평을 엿보지만 비평가는 연구를 넘보지 않을까? 아마도 그건 비평가는 특정한 규칙 안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어서일 테다. 연구자가 앞서 놓인 규칙을 따라 이야기를 진행하는 게이머인 반면, 비평가는 자신이 세운 규칙 안에서 세계를 부분적으로 개변하는 플레이어에 가깝다. 연구자가 세계 안에서 자신을 고민한다면 비평가는 영역을 세워 그 안을 거대한 자아로 채우는 쪽에 가깝다. 어떤 규칙을 따를지가 주요 안건이므로 세계의 규칙을 유린하는 비평가는 연구에 관심을 갖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문학비평에 대해 공부할 때, 나 스스로도 매번 고민하고 학생들과도 자주 토론하게 되는 주제 중 하나는 이론의 효용에 관한 물음이다. (…) 설마 이 많고도 복잡한 이론을 다 섭렵해야 문학 작품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뜻일까?” 비평가가 규칙을 이용하는 방식은 사실 연구자의 행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평가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자기만의 영역을 몸에 두르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규칙들이 자신의 영역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예견해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규칙들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며 0점 시험지를 작성하기 위해 답을 맞춰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 그러니까 앞서 연구와 비평의 차이로 규칙을 따르는 방법을 지적했다면, 후자는 전자를 잘 모르거나 의식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규칙을 따르기를 싫어하기에 연구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비평의 핵심은 자기를 중심으로 영역을 구성하고, 이를 따르는 세계를 자연스레 분단하는 것에 있다. 이를 따라 자신이 세운 영역 안에서는 기존의 규칙들이 재배치를 경험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어떠한 영역 자체가 아니라 이를 재단해 바로잡는 일이다. 주어진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서 무엇을 주고 싶은지를 고민하는 일, 이는 난봉꾼이 되어 질서를 해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자기만을 내세워 세상을 지배하려 했다면 세상 전부를 자기로 채웠겠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외부에 말을 전할 방법이 없어지므로 항상 상대해야 할 외부를 남겨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결국 왜 비평이 필요한지로 귀결된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지켜야 할 영역이 있는 이의 태도는 일종의 우산 같은 게 되지 않을까? 자기를 중심으로 어떠한 폭풍을 막아내는 천사의 모습처럼 말이다. 멋진 생각이지만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방어가 아니라 공격의 모습이 바로 비평의 태도라고 지적해두고 싶다.


완고한 규칙들이 사로잡은 세계를 중화하는 건 비평만이 지닌 고유의 기능이다. 규칙을 따르는 일은 효율성과 공정성을 동반하지만 이따금 서로 다른 규칙이 충돌하거나, 규칙 자체로 인해 상한과 하한이 나뉘는 때가 있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자문하면 처리할 방법이 없어서 그런 일을 구제하기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의 ‘직관’은 문제를 대하는 한 가지 태도가 될 수 있다. 행동의 초법적 능력에 관한 숙의가 따라야겠지만 대부분의 사례에서는 다양한 형태에서 오는 관계를 추론하는 이 능력이 유용하다. 그러니까 이성의 기능이 도덕이라고 가정한다면, 비평의 역할은 멀티’모랄’일수도 있다는 소리다. 칸트는 인간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명령이 인간에 내재해 있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들, 소위 도리에 관한 이야기지만 우리의 여정에서는 다르다. 절대적인 필연성과 타당성은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 도달하게끔 하나, 세계가 분단을 경험하면서부터는 그런 일도 불가해진다. 한 결론을 미리 받아들인 상황에서는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기에도 벅차서 더는 사고가 유연하지 않고, 또 규칙을 이해하는 것도 힘들다. 비평의 직관은 이처럼 미리 엿본 미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아니라, 그러한 지점들에 반하는 방법으로서의 자기를 설계하는 일이다. 이 ‘자기 설계’의 영역은 뇌의 정밀성이 사적인 규칙을 지배하는 ‘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세계를 감각할수록 더 많은 경험이 생겨난다. 이 경험은 우리를 하나에서 둘로, 셋에서 다섯으로 나누며 더 많은 분단을 가꾼다.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을수록 아픔에 무뎌지지만 동시에 이들을 뛰어넘는 무대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몸은 다름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 다르지 않은 삶을 꿈꾸는 곳이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비평가가 대학에 적을 걸어 두고, 연구와 평론에서 이론의 칼을 똑같이 휘두르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문학과 삶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 없이 작품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사고하면서, 비평을 연구의 부업으로 삼는다는 지적은 그래서 뼈아프다. 삶에 대한 비평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에 대한 비평조차 희소하고 절실히 요구되는 실정이다.” 생물학적으로 몸은 한 생명체의 시작과 끝이 담긴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정의되는데 이곳에서는 무엇보다 뇌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는 서로 다른 감각 수단을 하나로 통솔해 처리하는 ‘분기’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즉 연구란 시야와 삶이 서로 다른 곳에 자리함을 가리킨다. 이처럼 무언가를 보고 들으며 연구를 진행하는 일에서는 자신이 바라보는 시점에서 멀어질수록 그때와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를 느끼게 되는 ‘시차’가 자리한다. 이 시차를 바라보는 일은 우리가 과거의 한 때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과 함께 이 세계가 약하지만 굳은 연결점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특히나 반복되는 것들은 대개 때마다 일정한 차이를 동반하므로 이런 간극을 인지하는 게 연구자의 주된 의무가 되곤 한다. 미약한 오차들이야말로 도리어 방향계가 되어준다고나 할까. 하나의 올곧은 이성은 뇌를 따라 멀티모랄로 합쳐진다. 이 안에서 감각은 자신을 속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세계를 살만한 곳으로 위장하는 역할도 한다. 몸에는 선택적으로 물질이나 감각을 투과하는 거름망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안구의 시각 데이터나 콩팥의 여과 기능, 피부 감각의 예민도 등이 있다. 연구의 역할은 고통의 근원에 다가서며 이를 본질에서 치료하는 것이며, 비평의 역할은 이 세계가 어떻게 서로를 마주하며 또 다른 본질을 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돌아보는 일에는 항상 오차가 자리하기에, 우리는 작게나마 이를 수정함으로써 매일에 나아가고 있다.


이처럼 연구자가 앞을 보며 나아가는 일에서 겪는 시차가 주된 논제로 설정된다면, 연구의 어려움이란 자신이 겪은 아픔에 관해 이름을 붙여 스스로 설명할 방법을 알아내는 일이다. 무엇을 빌려 이를 묘사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항상 과거에서 현재를 따라가게 되지만 어떤 방식으로 현재에 이르게 됐는지를 추론하는 건 길을 걸은 이들의 경험을 따라 항상 낯선 세계를 동반한다. 마치 늘 어느 곳에 카메라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한 발자국 물러나 여기 찍힌 사진을 소환했을 어느 시선을 굳게 상상하고는 한다. 차분히 세계를 배워가다 보면 끝내 이 세계에는 알 수 없는 미지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직 못다한 일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를 기다려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고통이나 아픔은 난제로 남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평의 태도는 세상을 바로 보지 않는 것이다. 가령 누구나 도덕에 대해 논할 수는 있지만 이를 말하는 법은 서로 다르다. 이는 각자의 상황이나 위치, 걸음 폭이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모두가 화합을 말할 때 그 성질이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면, 이곳에서 앞을 본다는 건 착실히 앞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그저 더 큰 종언에 삼켜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회집의 장소가 우리의 길과 여정이 합쳐지는 곳이다. 만약 연구가 단순히 타당함을 따라가기만 하는 작업에 그친다면 이는 분명 ‘옳은 것’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를 환대하는 ‘미래’에 가깝다. 그러니 어쩌면 이와 같은 길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발적으로 현실을 떠나는 게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이 이주야말로 우리가 아는 두 현실이 서로 다른 길에 서 있다는 걸 눈치채게 해주기에, 우리는 안도감을 갖고 분기에 나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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