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언노운에서 진행하는 ‘뉴웨이브 전초선 선언’을 보았다. 처음에 관련 이벤트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정작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무언가 드는 생각이 있었다. 누벨바그와 공동체를 한 자리에 엮는 일에서 시네클럽을 창안하는 건 당연하다. 이날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영화 상영 공동체였고, 아마 이는 한국의 영화 문화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일 것이다. 다만 이 자리에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네필, 그러니까 특정한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구조 자체가 시네필이 되는 사례가 있다. 가령 익스트림 무비나 시네스트, 디시인사이드에 개설된 ‘누벨바그 갤러리’를 떠올려보자.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네필 집단은 아니겠지만, 커뮤니티는 특정한 여론을 형성하거나 잘 휘둘린다는 점에서 하나의 인격으로 취급되고는 한다. 구성원이 어떠한 소속감을 갖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와 같은 ‘정체성’이 나의 것이 아니라 외부에 외장형태로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공동체를 어떻게 현실에 불러낼 것인지를 고민하는 이 자리에서, 시네필의 형태를 어떻게 공유할지를 고민해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상상가능한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아는 것을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인지가 주된 의제로 설정된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분위기’를 읽고서 정체성을 계속 바꾸는 일이 중요하다.
애초에 시네필이란 게 상상된 개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생각은 무리가 아니다. 상상된 만큼이나 그 형태를 구성하는 일에는 별다른 제약이 없다. 가령 영화를 촬영하거나 공부하는 곳에 가면 생각보다 사람들이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교과서에서는 <시민 케인>과 로즈버드를 가르치지만 현장에 가면 고전영화를 잘 챙겨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 영화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화를 많이 보지만 정작 이론이나 역사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이들 모두가 서로 같은 영화를 본다고 할 수 있을까? 시네필이라는 말은 이들을 다시 상상된 개념으로 돌려놓아 서로를 느슨하게 연결한다. 이런 뜻에서 시네필은 하나의 민족지적 개념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민족이라는 말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국가의 형태에 대한 인식이 합의됨으로써 생겨났다. 모두가 하나의 시스템을 공유한다는 인식 아래, ‘영토’가 아니라 형태에서 공통점을 찾게 된 것이다. 비슷한 뜻에서, 시네필이라는 말은 영화가 예술로 넘어가는 시점인 ‘뉴웨이브’ 시기에 탄생했다. 영화를 배급하는 시스템이 본격화할 무렵, 서로 각기 다른 영화를 구상하는 이들이 모여 ‘시네마테크’를 결성했고 이 안에서 장소는 서로 다른 영화를 상상하는 이들이 모이는 교통로로 사용됐다.
이를 종합해서 말하자면, 이들 장소는 곧 ‘영화’를 구상하는 형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가 영화를 달리 생각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들 ‘장소’가 서로를 느슨하게 해주었기에 별다른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을 알았다. 이를 통해 ‘장소’는 별다른 분쟁 없이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됐다. 오늘날 영화를 말하는 자리가 시네마테크의 기능을 계승한다고 보면, 중요한 건 이들 장소의 목적이지 형태가 아니다. 그러니 ‘누벨바그 갤러리’에서 누벨바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한들 이상할 게 없고 유튜브 한복판에서 누벨바그를 말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중요한 건 자신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을 때 이를 함께 이야기할 사람들이다. 바로 그 사람들이 한데 모일 곳을 만드는 게 공동체의 참된 의미이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에서, 영화를 트는 소규모 집단이나 문화, 운동만을 ‘시네필’로 본다면, 이런 개념은 너무 협소한 게 아닐까. 여전히 영화를 트는 이들만큼이나 영화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영화를 상영하는 건 안건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집약적이지만 반대로 우연성은 배격하는 경향이 크다. 리처드 로티를 인용하자면, 결국 ‘영화’는 우연함의 산물일 때 더 큰 연대와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그래서 이들은 영화가 기존의 것이 아닌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특정한 공동체를 선언할 때는 다른 존재 방식들을 배척하는 방식, UN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같은 형태의 모임은 지양돼야 한다. 무엇이 영화인지를 규정하기보다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옴베르트 에코는 중세가 매혹으로 가득한 시기였다고 설명하면서 그에 대한 이유로 지연을 든다. 같은 것이라도 사람이 보기에 따라 서로 달리 해석될 수 있고, 또 이야기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각기 다양한 경로로 전달됨에 따라 의미의 해석양상에 ‘지연’이 생겨난다. 이로 인해 의미는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정보를 낳으며, 이는 곧 정보가 교차하는 지점에 사람이 모일 아고라를 형성한다. 이 관점에서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받아들이는 쪽이 의미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각자 여행에 이르는 길이 그에 영향을 미친다. 아직 합의되지 않은 이곳에 우리가 다가서야 할 의미가 있다. 이런 느슨한 관계들이 한데 모여 커뮤니티의 외양을 결정하게 되고, 이 울타리가 다시금 공동체의 ‘이름’을 획득한다. 이 과정에서 의미의 지연에 따른 왜곡은 피할 길이 없겠으나, 어쩌면 이 지연은 우리가 서서히 다가서게 될 죽음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카포>에 관해, 세르주 다네는 카메라가 여정의 끝에 다다르지 않기를 바랐다. 결국 그 길을 걸으면 영화가 어느 무언가로 변모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뉴웨이브가 영화의 변혁을 상징한다면 뉴웨이브의 정신은 만물에 대한 적응과 변화다. 그렇다면 뉴웨이브에 대한 정의도 계속해서 바뀌어야 하며, 이 경우 하나의 특별한 외견에서 출발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특히나 시네필에 대한 이미지가 특정한 시기에 얽매인다면 시네필이 되려는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사상이나 이념, 국적처럼 소모적인 주제가 될 것이다. 만약 영화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시네필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이 정의는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네필이 영화를 믿는 이라면 마찬가지로 영화를 믿는 사람은 ‘시네필’이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일전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문자를 모르고, 교육받은 적이 없는 이들’에게서 받은 편지가 그 무엇보다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를 공부한 이들에게 <전함 포템킨>은 숏과 문자의 결합이지만 절대다수의 이들에게 영화의 장면들은 어떠한 결말로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방어흔에 가깝다. 즉, 무언가를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끌어안기보다 공동이 지닌 문제와 외부, 바깥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시네필’은 하나의 내부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이른바 누벨바그가 영화와 공동체가 한데 결합한 단어라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커뮤니티는 그 모두가 누벨바그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두고서 단어의 어원을 완전히 무시한 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리듬을 타는 일에서 중요한 건 이전의 화음을 어떻게 변형하고 또 배치할 것인지다. 그루브와 블루스가 없는 세계에 비틀즈는 탄생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열려라 참깨’처럼 똑같은 멜로디를 불러야만 넘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변형을 말할 때는 단기적으로는 균열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지연된 의식이 메시지를 후대에 전달한다는 점에서 이점이 크다. 만약 노래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보면 여기서 중요한 건 의미이지 형식은 아닐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누벨바그와 시네필의 관계는 의미가 고정되지 않게끔 이를 계속해서 이탈하게 하는 분탕과 자신을 행위의 중심에 놓으면서 영역을 설계하려 하는 트롤과 같다. 누벨바그는 하나의 장소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에는 이를 수호하려는 이와 파괴하려는 이가 한데 모여 끊임없이 회전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게 보면 마치 콜로니끼리 서로 동맹을 맺어 합을 겨루는 듯한 이곳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뿐이다. 이 푸른 별에서 우리가 사는 곳이나 성별, 인종이나 사상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같은 곳을 보게 된다. 이런 생각들의 연장선에서 전초전에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이마이시 히로유키의 <프로메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