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멸의 열정: <체인소맨>이 삼키고 뱉어낸 세계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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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투라에 올라온 제20회 평론상 당선작 “『체인소맨』이 삼켜버린 모든 이분법에 대하여”를 읽었다. <체인소맨>을 다룬 이 글에서 특기할 만한 건, ‘체인소맨’이라는 텍스트를 당선작으로 꼽았다는 점이다. 체인소맨이 삼킨 것들이 개념적으로 ‘상실’된다면, 이 글의 제목은 어떤 이분법의 부존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분법이 없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더라면 하는 상황이다. 가령 이분법이라는 개념이 부존재할 경우, 우리는 특정한 상태에 곱하거나 빼는 식으로 세 가지 값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세계관에서는 마르고 뚱뚱한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가거나 멈춰있는 사람, 뒤로 가는 사람” 같은 식의 서술이 가능하다. 이 논리의 연장선에서 바라본 영화는 더 과장된 현실과 현실, 빈 곳이 들어선 현실 같은 식으로 분류되는데 이런 경우 ‘영화’는 어떠한 고정된 값이 아니라 하나의 지향에 가깝다. 그런 것들을 생각나게 해서 체인소맨이라는 소재 선정이 재밌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현실과 나누어진 어느 곳이기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더하거나 덜한 쪽으로 이해돼야 마땅하다.


다른 한편 <체인소맨>은 작품 외적으로도 특이하다. <체인소맨>은 만화로 연재돼 인기를 얻었지만 애니메이션으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었다. 이후 극장판으로 나온 <레제편>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독자들이 <체인소맨>을 비롯한 전작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렇게 재밌는 작품을 만들었다면 다른 비슷한 작품을 더 보고 싶기 마련이니까. 흥미롭게도 이 모든 일의 시작에는 영화로 가장 처음 개봉했던 <룩백>이 있었다. 아트하우스 영화에 가까웠던 이 작품은, 개봉 당시에는 <체인소맨>의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점이 주목받지는 않았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사실 <룩백>은 <체인소맨>과 너무 결이 다른 작품이어서 기존에도 인기가 있던 기성작가라는 점 말고는 별다른 연계가 없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레제편>이 개봉하면서, 타츠키에 대한 트리비아가 다시금 떠올랐다. 작품의 주인공인 ‘덴지’의 캐릭터성을 닮은 성격이 트리비아로 전파되기에 딱 좋았던 것이다. 작가의 이미지가 작품에 투영됐다는 점을 알게 된 독자들은 그와 같은 작품들을 소화해내는 사람으로서의 ‘타츠키’에 주목했다.


개인적으로는, <룩백>을 비롯한 여러 단편에서 보여줬던 천재성이 천재에 대한 괴짜 이미지와 섞인 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괴팍한 천재의 일화는 이미 업계에서는 흔하디 흔하지만 그중에서도 타츠키는 가장 ‘젊은’ 축에 속한다. <건담>의 토미노와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는 이 글을 작성하는 기준으로 모두 정년퇴임을 한 나이다. 반면 타츠키는 1992년생으로, 넓게 잡아도 20대에서 40대까지를 포괄할 수 있는 수준이다. 즉, 문화적으로 보면 젊은 세대에 의해 말해지고 옹립됐다는 점에서 타츠키는 지역구 작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세대가 무자비한 이분법에 의해 피해를 봤던 점을 고려하면, ‘재난’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룩백>과 부존재로서의 <체인소맨>이 서로 악세서리처럼 공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적으로 젊은이들의 세계를 대변하는 작풍이라고나 할까. 이 안에서 송사리를 먹었다거나 하는 기행은 천재성을 뒷받침하는 일화로 소비될 뿐 정말로 그것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애초에 별개로는 의미를 갖지 않던 것이라도 한 화면에서 소화될 때 미장센이 된다고 보는 게 타츠키다.


연출면에서도 ‘타츠키병’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런 건 창작자에게 영향을 줄지 몰라도 독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한국에서 비슷하게 ‘홍상수병’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런 것들이 ‘병’으로 취급되기만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작법이 아니라 세계를 의식하는 방식에 중심이 있으니까 아무리 기술을 따라 해도 느낌이 통하지 않는다. 어떤 때, 어느 순간을 정확히 보는 법은 모두 개인의 몫으로 남으니 아무리 해도 그걸 따라갈 수는 없다. 화장대 위에 어떤 물건이 올라와 있을지를 제안하는 방식, 알다시피 딱히 정답은 없다. 아무런 인과나 의도 없이, 그저 우연히 한자리에 모인 이들이다. 같은 뜻에서 타츠키에 대한 젊은 세대의 생각은 서로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부작위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서로 벽이 세워진 듯 다른 세상을 살아왔지만 그런 벽 사이에 자리하는 물질이 같다. 무언가 특정한 사건을 ‘콕’ 집어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한 사건에 의해 특정되는 경험이 여기에 있다. 이는 고속도로 위에서 모두가 같은 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자동차는 모두 다른 곳에서 왔지만 결국 비슷한 시기에 분기되거나 또 체증이 해소된다.


오히려 ‘타츠키풍’이라는 화법이 아니라, 어느 것을 걸쳐도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이 된다는 점이 이들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무언가를 입거나 걸치기 위해서는 ‘형체’로서의 몸이 전제돼야 한다. 예를 들어, 몸에 걸치는 것들은 대개 자아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고는 한다. 귀걸이나 반지, 모자처럼 자기를 표현하는 액세서리가 있다. 이들은 착용하는 즉시 몸의 일부가 되는데, 그 말은 액세서리가 어떠한 조사로만 사용될 뿐 하나의 객체가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안경을 낀 사람에게 ‘안경’은 몸의 일부에 속한다. 안경은 그 자체로도 사물이지만 반대로 얼굴에 착용할 때와 책상에 올려져 있을 때와 그 의미와 뜻이 다르다. 안경은 시각을 교정하는 ‘도구’이며, 인간의 시각에 부가로 덧붙여지는 형식을 취하기에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액세서리는 각자 다른 외견이나 형태 등을 취하기에 별개의 존재로서 인정받지만, 몸에 걸쳤을 때는 반대로 그 자신의 의미를 잃는다. 정확하게는 한 주체에 존재가 ‘입혀지기에’ 일시적으로 존재가 본체를 양위한다고 볼 수 있다.


의복도 비슷하다. 의복을 걸치는 일은 자기 몸의 정체성을 확장하는 행위다. 자신을 설명하는 데 따라붙는 ‘조사’로 취급되는데 가령 무언가를 더 잘 기능하게 하는 ‘작업복’이나, 개인의 신분을 드러내는 ‘단체복’ 등이 있다.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복장들은 외관상으로 구분되는 표식을 지정해주었으며, 이는 마치 개인의 이름에서 성이나 중간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의례와도 유사하다. 타츠키병이 작가들에게만 통용된다고만 봤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옷이 자신을 드러내는 요인이 된다면 그런 옷을 사입는 건 아무런 문제도 없다. 하지만 “그런 옷을 입어야만 작가가 될 수 있다면” 그건 문제가 크다. 이른바 ‘이름’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름’이 온전히 자신을 대변한다면, 이에 따라오는 나머지 것은 자신을 세상에 분리해 바라보려는 시도일 뿐이다. 고유의 자신이 있다면, 이를 다시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 위에 다양한 의복이나 액세서리를 걸치며 이는 곧 이름에 붙이는 ‘성’과 같은 역할을 한다. 같은 이름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정체성을 입음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교정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떠한 도구나 의복 자체에 의미가 있는 때다. 오타쿠 문화에서는 가방이나 의복 등에 자신이 덕질하는 대상의 캔뱃지 등을 잔뜩 달아두는 게 있다. 이와 같은 ‘자기소멸의 패션’은 덕질의 대상을 외부에 전시함으로써 ‘나’를 일종의 마네킹처럼 사용하는 형태로 이해된다. 마치 런웨이의 모델이 옷을 ‘전시’하기 위해 ‘나’로 인식되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한편으로는 ‘이타샤’처럼 자동차나 바이크 외부를 캐릭터의 일러스트 등으로 래핑하는 것도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을 몸의 내부에 체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입거나 걸치기 위해서는 ‘형체’로서의 몸이 전제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약지에 낀 반지는 그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대변하기에 ‘그’의 대리물이 되는 것이지 그게 어떠한 ‘내부’로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 도넛 형태의 구조물은 인간의 몸에 씌워져야 하기에 항상 내부를 비워두고는 한다. 타츠키의 작품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비어있었다’. 그러니 계속해서 이걸 입고 싶었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작가 자신의 이름이 없었다는 점일 뿐이다.


그리고 최근 <체인소맨>의 2부가 마무리됐다. 인기가 많은 작품인 만큼 저마다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데, 아직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지금 시점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은 선택이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글을 적는 건 흥미로운 생각을 떠올려서다. 2부의 결말은 체인소맨 상태의 포치타가 자신의 심장을 삼키면서 맺음된다. 체인소맨의 능력이 삼킨 대상의 개념을 지우는 것이어서 동시에 체인소맨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이어서, 체인소맨이 없으니 애초에 체인소맨이 됐던 1부의 사건도 사라져 역사 자체가 개변돼버리고야 만다. 이 과정에서 파워는 덴지와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을 지키며 1부의 포치타 포지션을 대체한다. 이후 공안에 입사한 덴지는 이미 역사에서 사라진 마키마를 대신해 등장하는 나유타를 만난다. 전기톱을 무기 삼아 활동하던 덴지는 어느 날 평범한 소녀인 아사를 구하게 되고, 그런 덴지에게 아사는 “톱으로 활동하니까 체인소맨”이라고 말한다. ‘대상의 개념을 떠올려내는 것’으로서 체인소맨의 부활이 암시되며 작품이 끝난다.


‘삼키고, 떠올려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크로노스는 농경의 신과 원초적 개념이었던 크로노스가 서로 합쳐진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들에 의해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두려워하며, 자식들을 족족 삼켰다. 이후 크로노스는 최근에 삼킨 순서에 따라 다시 아이들을 토해내는데, 그리하여 가장 막내에서 맏이가 된 게 바로 제우스다. 이 이야기는 무언가를 먹고, 토해내는 일이 주가 되는 <체인소맨>에도 유의미한 화두를 던진다. 흔히 체인소맨은 무언가를 먹음으로써 개념을 지우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반대로 무언가를 새로 태어나게 할 수도 있다. 이 점이 공언된 건 2부의 노화의 악마 에피소드다. 노화의 악마에 납치당한 덴지는 느린 시간과 노화의 두려움이 결합한 이 장소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구토’를 택한다. 덴지가 나무가 된 누군가를 뜯어먹으면, 바깥세상에 있는 체인소맨의 입에서 그것들이 다시 빠져나온다. 아마도 이 순간은 체인소맨의 입이 명시적으로 기능하는 유일한 장면이다.


무언가를 먹기 위한 입에서 무언가를 말하는 ‘기관’으로의 입으로. 전자가 원시적인 형태의 입이라면, 후자는 지능이 발현하는 고등 단계의 입이다. 덴지는 먹거나, 잠을 자는 등의 기본적인 행복에 굶주렸던 사람이었다. 이 과정을 충족하며 다시 자신을 성장시키는 게 1부 공안편의 내용이라면, 2부는 ‘무엇’을 말할 것인지가 주된 내용으로 다뤄진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며 줄곧 꿈에 대해 묻지만, 장래희망에 무엇을 할지조차 적지 못한다. 덴지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당장 하지 않고 있는 일이 도리어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점? 무언가를 삼키고 뱉는 일은 개념의 순위를 바꾼다는 점에서 자신의, 본심을 배반하게 한다. 가장 마지막에 할 말이 가장 처음으로 해야 하는 말이 된다. 하기 싫어 미뤄둔 일은 당장에 해결해야 하는 일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작품의 결론은 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곳이 된다. 1부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이야기라면, 2부는 천국을 빠져나오는 이야기다.


덴지는 체인소맨 교회를 마주하거나, 이 세계에 필요한 건 공언된 ‘악마’에 대응하는 ‘천국’의 존재라는 점을 내내 주입받는다. 그러나 핵병기의 악마가 부활하고 전쟁이 힘을 얻으면서 세상은 오히려 더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솔직히 말해 2부는 어디에 끊어도 이상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마치 내일 죽을 사람처럼 종잡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일련의 흐름을 따라 반전하는 이 이야기는 먹고 뱉는 일의 반복처럼 보인다. 물론 여태까지 내용이 모두 쓸모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픽션에서 주인공이 성공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실패’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이 이야기에서 더 들여다보고 싶은 건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반전들이 계속 이어질 뿐이라는 점이다. 성경의 일화처럼, 두 번째 배신 이후에는 세 번째 배신이 있으니까. 이 세 번째 배신의 독자의 몫이라면, 이곳에서 부활하는 것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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