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를 잃어가는 내부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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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추천받아 읽게 된 책은 『이종교류회』는 여러 작가들이 참여한 단편집이다. 모 리뷰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평균 별점이 낮았는데, 의문을 품고 리뷰를 읽어나가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표지에는 훤칠하고 멋진 퍼리 캐릭터가 나오는데, 정작 내용에는 단편 중 하나로만 수록된 것이다. 멋진 퍼리를 기대했는데 정작 내용에 없다면, 누구라도 화가 날 것 같기는 하다. 다만 이 일화는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이종을 다루는 작품군에서 핵심이 되는 건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상대방을 하나의 객체로 인정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그와 올바른 소통이 되는 지다. 대개 이 둘은 서로 같은 결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소통이 되지 않아도 상대를 존중하는 경우가 있으니 서로 별개라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이종 간 교류에서 가장 처음으로 지적되는 게 바로 언어다. 자신에게는 우호의 표시가 상대에게는 적대의사로 받아들여지면서 벌어지는 일화 등, ‘착오’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들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 생겨난 지연이 다시금 파급력을 갖고 돌아오는 게 이런 작품군의 주된 표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이종의 범주를 더 넓혀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개 이종이라 하면 외관이나 습성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곤 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이 단어의 뜻이 넓어진다.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일이 잦아지는 요즘, 같은 말이 상대에게는 어떻게 전달될지를 깊이 고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런 것도 있다. 각자 한 대상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를 다루는 법도 다양하니 집단이 세분화한다. 이렇게 같은 세상에서도 뭔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집단이 출몰하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이종’이 분화하는 듯 느껴진다. 이들은 플랫폼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데, 이게 마치 일종의 ‘지역’처럼 느껴지는 데다가 고립된 영토를 토대로 언어와 문화가 달라지니 더욱 이종처럼 느껴지는 감이 있다. 더욱이 새로운 곳에 가면 분위기 파악을 먼저 하라는 취지의 ‘닥눈삼’이라는 표현이 관습으로 자리 잡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게 흥미로운 건 인터넷이 처음 등장하던 시기 온라인이 오프라인의 연장선에 있던 점을 연상케 해서다.


인터넷 초창기에 온라인은 오프라인을 완전히 대체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온라인을 일종의 ‘광대역 연락망’으로 이해했다. 전화통신이 처음에 올바른 주소로 연결을 보내는 ‘교환원’을 요구했다면 온라인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연결망을 이루는 곳이었다. 이 점에서 일종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있었고, 동시에 하나의 장소로 기능했다. 연결을 바라는 이들이 한데 모이는 곳이자, 동시에 다시 현실에 돌아오기 위한 게 바로 온라인이었다. 하지만 이후 온라인이 별개의 세계로 기능하게 됨에 따라 온∙오프라인 간에 정체성이 서로 다른 일이 흔해졌다. 이제 온라인은 출입 기록을 남기지 않으며, 도리어 SNS와 같은 것으로 두 장소 간에 동기화를 진행해야만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이른바 온라인은 ‘은폐’를 전제로 한 공간이어서 지금 만나는 이들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왔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고향이나 출신지는 철저히 가려졌으며 사람들 간에 통성명하는 일이 우호의사를 표시하는 게 됐다. 즉 온라인은 사람들이 다른 출신일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뒀던 셈이다.


반면 온라인을 또 다른 세계로 바라보게 된 근래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하는 특성을 보인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리지만 하나씩 풀어보면 이렇다. 온라인만의 정체성이 있는 한편, 오프라인에서의 신체는 온라인의 그것과 동일하게 존재한다. 즉 불꽃이 서로 다른 형태로 변화하더라도 그 안의 심지는 여전히 곧다. 이 점을 전제로 오늘날 버츄얼 스트리머와 같은 존재기술이 성립하는데, 이 콘텐츠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존재자’를 사고하는 방식이다. 버츄얼 스트리밍의 세계는 대개 다양한 롤플레잉을 전제로 진행되지만, 공감대를 얻는 한계상 우리가 사는 곳의 어딘가를 가정하게 된다. 가령 일본을 유니콘나라로 치환하거나 한국의 어느 장소를 시골과 도시라는 러프한 체형으로 다듬는 등이다. 이 안에서 언어는 서로 달라지지만 결국 개념적으로 그게 우리가 아는 무언가라는 점을 잘 알기에 이들 간에 상호대화가 성립한다. 결국 이세계나 이공간이라는 컨셉은 하나의 ‘합의’를 거쳐 ‘언어’로서 번안되는 셈인데, 이 점은 우리가 ‘다른 것’을 대할 때 응용하기 유용해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단순히 이들을 취향으로만 소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우리가 이종을 대하는 일은 대개 ‘이세계’와 같은 키워드와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이종을 다루는 장르는 등장인물이 이세계로 넘어가는 일을 전제하곤 한다. 현실에서는 주류 종인 인간을 배제하기 어려워서일 테고, 이세계로 가면 그곳만의 문화를 따로 설계할 수 있으니 ‘이종’을 설명하기 더 수월한 면도 있다. 문제는 단순히 이종들의 세계로만 가면 소수 종인 주인공이 차별받는 입장만을 보여줄 뿐, 무언가 근본적인 환경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차별받는 개인을 보여줌으로써 바깥의 독자도 무언가를 느끼며 행동하기를 바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이종에 대한 이해는 현실 사회의 몇몇 집단으로만 국한될 뿐이다. 쉽게 말해 단순히 대입해 치환하는 것만으로는 인간 사회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단순히 외피만 바꾸어 표현하는 일은 인간 사회를 비판할 때는 유용하지만 반대로 초점이 이종에 있을 때는 무언가 이상해진다. 인류를 두고서 서로 다른 종이라고 여기는 일은, 인종이나 성별 간의 ‘차이’가 정말로 ‘이종’간의 그것인지를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종을 다루는 장르는 무언가 ‘다르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에만 그치는 듯한 인상이 있다. 차이를 다루는 게 아니라 차이의 위를 달리면서, 끝내 내부를 획득하지 못하는 채로 남게 된다면 이게 정말로 ‘세계’를 다룬다고 볼 수 있을까? 인간에 의해 쓰여 인간을 말하는 작품은 무언가 인간주의적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힘들다. 우리들 자신을 말하기 위해 타자가 필요할 뿐이라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안에 타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자를 포함한 채로 세계를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깜깜한 내부에만 머무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사람들의 출신이나 배경은 여전히 은폐돼있지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이 공간이 자신을 닮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의견이 소수가 아닌 주류라고 여기면서 생물학적인 분류군을 특정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자신을 한 종으로 분류하는 일은 결국 자기를 닮은 어떤 특성들을 받아들여 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종으로 이해될 공산이 크다. 자기를 중심으로 영역을 전개하면서 외부를 내부로 환원할 뿐인 거대한 자폐원돈과를 형성하게 된다.


물론 이는 나이브한 비판론에만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이 만든 건 인간 사이를 중재하기 위한 도구에 그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이 멋진 세계를 살아가는 건 결국 이 세계에 바깥이란 없고, 눈앞에 보이는 것도 자기에 드리워진 거대한 자아에 불과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이종을 다룰 때는 이들을 벗어나 보려는 경향이 있어서 이들을 계속해서 안으로 집어넣는 일이 문제의 최중심에 선다. 인간 사회가 갇힌 사고에 대응해 바깥을 모색하려 노력한다면 이세계는 이 안에서 절대적인 바깥의 지위에 선다. 우리는 끝내 이 그림자의 세상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종은 우리를 사고하고 진보하게 하는 부류의 인외가 아니라 단순히 자기를 나서기 위할 뿐인 것에만 그친다. 갇힌 내부 회로 안에서 상상하는 바깥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미숙하게 재현할 뿐인 ‘유사’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이종으로 지칭하는 일이 한편으로는 정말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종이라는 하나의 판타지에 불과한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종은 말 그대로 상상불가한 게 돼야만 한다.


물론 이종에 대한 상상은 결국 자신이 바라는 정체성의 한 면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인 것인지에 있다. 캐릭터의 외모를 둘러싼 논점은 그보다 나중의 문제인 것 같다. 단순히 인간이 아닌 것만으로도 좋다고 하면 왜 사람들이 계속해서 인외에 인간의 특성을 섞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인외가 되었을 때도 인간이었을 때의 행동양식을 이어가고 싶어서다. 자신을 숨기며 아예 다른 모습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를 이어가고자 하는 신체적 ‘확장’의 의미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종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점에서 결국 인간으로 귀결된다.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라는 말은 인간의 편리함이 아니라 ‘인간’ 화자로서 이어갈 수 있는 경우의 수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이종이라는 판타지는 서로를 다르게 대하는 법이 아니라 어느 곳, 어떤 것에서도 자기를 버텨내야만 하는 이유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이종은 무언가 의도적으로 다뤄지는 ‘바깥’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내부’의 세밀한 가공이 아닐까? 그래서 점점 형체를 잃어간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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