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사를 꼽으라면 이런 게 떠오른다. 탄지로와 무잔이 대치하는 최종국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희들 귀살대가 모두 정신병자이기 때문이지.” 사실 주인공의 시점으로 봐서 그렇지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면 만화에서 이상한 건 한둘이 아니다. 폐도령 이후에도 여전히 검을 차고 돌아다니는 무장집단, 이상할 정도로 비효율적인 입단 테스트 등. 현실감이 없어지는 요인임에도 사람들이 지적하지 않는 건 이 세계가 이미 잔혹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채찍질하면 어느 순간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 마음 한구석에 깔렸다. 모든 잔혹함은 제로 퍼센트에서 출발하지 않으며 마음 한구석에는 상황이 심각해지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잔혹하다’는 건 이 세계를 가속했을 때 벌어지는 ‘극단’이기에 암묵적으로 동의되어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잔혹하다’는 건 단순히 고자극의 콘텐츠인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 현실적이거나 실리적으로도 보이는 면이 있다. 마음 한구석에 이 세계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면, 반대로 이 세계가 어느 순간 망쳐질 것만 같은 마음도 있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세계의 화약고, 날을 세운 두 국가정상의 말싸움 같은 부류가 그런 불안을 자극한다.
이런 뜻에서 <체인소맨>을 돌아보면 무언가 느끼는 바가 크다. 굳이 따지면 <체인소맨>은 정상과 비정상중에 후자에 가깝다. 주인공은 시종일관 한심하고 제대로 되먹은 인간 같지가 않다. 남성 캐릭터로 보면 무언가 매력을 느낄 만한 요인이 적거나 부족하며 애초에 이곳 세계 자체도 이상하다. 세계도 완전한 판타지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현대와 어울리기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악마의 존재가 자유롭게 펼쳐지는 세상은 독자로 하여금 우리 현실에 그런 개념을 대입해보게 한다. 마키마의 말처럼, 세상을 아프고 슬프게 하는 것을 말끔히 소화해버렸으면 좋겠다. 아프거나 고통스러운 이곳에서 ‘삼켜져 버리고 싶다’. 구체적으로 짚자면 <체인소맨>의 배경은 소련 붕괴가 엇나간 1990년대 후반의 어느 날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무언가 역사가 뒤틀려 소련이 건재한 세계는 여타 매체에서도 자주 다루는 설정이지만 <체인소맨>에서는 무언가 또 다른 속내가 있다. 소련이 살아있는 세계는 역설적으로 이 세계가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미국과 소련, 양측으로 뚜렷하게 진영이 구분됐기에 서로 합을 주고받는 것으로 균형이 완성된다. 이런 곳에서라면 무언가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불길하다’는 쯤으로 얼추 앞으로의 전개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이 없는 이 세계는 점점 더 결말을 알 수 없게 된다. 무언가 기댈 벽이나 서 있을 바닥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베트남이나 이라크에서 미국과 소련이 서로 균형을 맞췄다면 소련 해체 이후의 미국에서는 9.11처럼 불특정다수로부터의 공격이 벌어진다. 동시에 미국이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게 됨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점진적으로 철수, 도날드 트럼프의 자국민 주의가 새로 대두한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감정이 ‘오늘날’인 셈이다. 이 세계에는 더는 확실한 게 남아있지 않다. 자신조차도 확언할 수 없고, 간단한 마음이라도 신뢰할 수 없다. 세계를 향해 열린 거대한 외부가 도리어 사람들 간에 공포를 심어준다. 네트워크의 광대함을 동경하던 때가 있었다면 반대로 네트워크가 광대가 되어버린 세상이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체인소맨>은 대략 이들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한다. 소련이 아직 건재한 이 세상에서 삶의 이유라든가 마음의 불안이라든가 하는 건 아직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악마만 없으면 무언가 이를 실리적으로 해치우거나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악마들은 마치 불면증을 앓는 것처럼 계속해서 이 세계를 일깨운다. 꿈의 세계에 잠들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허락되지 않는다.
단순히 1차 세계대전에서 2차 세계 대전 사이의 혼란기를 언급하기에는 맞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체인소맨>의 흥미로운 점은 한 세계가 잠들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벤야민이 영화와 전쟁을 연결하며 꿈의 세계를 언급했다면, 여기서 영화는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장치다. 그러나 <체인소맨>은 영화를 다양한 형태로 보여주지만 반대로 꿈에 들기를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덴지와 포치타가 처음으로 만났을 때 포치타는 “덴지의 꿈을 나에게 보여줘”라고 말한다. 덴지의 꿈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고, 포치타는 그런 덴지의 꿈을 이루어주려고 한다. 그래서 덴지의 삶이 더는 평범하지 않게 될 때마다 내면의 체인소맨이 튀어나오는데 오히려 체인소맨의 활약이 인기를 얻으면서 덴지의 삶은 평범함과 거리가 있게 된다. 평범함을 꿈꾸지만 도리어 그런 점이 평범할 수 없게 하는 셈인데, 이런 면은 ‘잠에 드는 상태’가 평범함의 기준이 되어버린 점을 떠올리게 한다. 덴지는 잠에 들고 싶어한다. 이 평범한 꿈을 이루어주려고 포치타가 덴지의 심장이 된다. 만화의 첫 에피소드, 살해당한 덴지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릴 때 포치타는 그런 덴지에게 말을 건다. 이후 덴지가 눈을 뜨면 가슴팍엔 포치타의 꼬리가 작게 나와 그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잠에 들지 않는 세계는 더는 깨어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덴지가 평범함을 동경했던 건 어쩌면 잠에 들고 싶어하는 마음에서였을 수 있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고, 그런 와중에 낮은 머리를 움직이는 일은 생명활동을 지속함에 따른 고통을 안긴다. 덴지는 자신이 한껏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가족에게서 찾았다. 파워를 만나고, 아키와 함께하며 보내는 일상이 세계를 집행하는 원리가 된다. 평소라면 사지 않았을 푸딩도 집에 있을 누군가를 위해 집어든다. 이 행위에서 ‘자기’는 ‘내 것’이기보다 벽에 기대는 쪽에 더 가깝다. 타인에 기대는 일이 아니라면 자신 또한 이곳에 바로 서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체인소맨이 행하는 섭식행위는 그것 자체로 한 꿈을 집어삼키는 일일 수 있다. 체인소맨은 한 사람의 꿈을 이루어지는 존재이기 전에 더는 이 세계에 깨어날 수 없게끔 안락사를 집행하는 존재다. 계속해서 낮과 밤을 오가는 악마들 사이에서 그는 어떤 형태로든 자기로 돌아올 수 없게 한다. 자신이 기대는 벼이 무너져 마음의 재난을 겪을 때 포치타는 항상 등장해온다. 덴지를 지키는 것인지도 불분명한 이 존재는 오히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의 고통이 초과해버릴 때 몸을 무시하며 등장해오는 부류의 힘처럼 보인다. 잠에 드는 순간이 극해 달하면 매우 신경질적으로 변한다고나 할까.
덴지의 삶이 힘에 부칠 때 마다 등장하는 ‘체인소맨’ 변신장면은 일종의 간질발작처럼 보인다. 일시적인 의식소실로 인해 몸의 통제력을 잃는 일은 단순히 몸 안에 깃든 다른 존재에 통제력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주체의 삶을 위해 헌신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몸의 주도권을 빼앗거나(<주술회전>), 존재에 기생하며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어쩔 수 없이 싸우는(<기생수>) 게 아니다. 체인소맨은 덴지의 평범한 꿈을 이루어주고 싶어한다. 덴지는 이 세계가 더럽고 어렵고 추하고 비참한 몰골로만 존재한다고 여겼지만 공안에 들어가 동료를 사귄 후에는 마음이 바뀐다. 속되게 말한다면 이제 덴지에게 낮은 밤에 기대어서만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포치타를 만난 후의 삶은 눈을 뜨는 순간이 비참하게 여겨지지는 않는 것, 여전히 잠에 들지 않더라도 긴 긴 낮을 버티어 내는 재해의 시간이다. 여기서 영화에 대한 덴지의 마키마의 생각이 갈린다. 덴지가 영화를 두고서 길고 긴 하루가 남긴 잔해로 보았다면 마키마는 이를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순간으로 본다. 마키마가 청산되어야 할 것도 있다고 말한다면 덴지는 극장을 삶에 빗대어 이해한다. 불이 꺼지고, 잠이 드는 순간 영화가 시동된다. 이윽고 심장의 고동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여기 이곳에 꺼지지 않는 밤이 시작된다.
덴지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 건 이들이 잠에 들지 못하는 인물이어서가 아닐까? 사람은 배가 고프거나 잠이 부족하면 이성을 잃는다. 꿈을 꾸는 일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라면, 깨어남을 겪지 못한 세계는 항상 근원적인 욕구 아래에서만 자리한다. ‘체인소맨’이 인기를 얻는 작중 세계는 악마와의 전투에서 자신들의 삶이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사람들은 그런 와중 악마인 체인소맨을 숭배하거나 동경하는 식으로 경이를 바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들에게는 이 세계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보다 나빠지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차라리 명확한 악역이라도 있었다면, 격파할 수 있는 마왕이라도 있었다면 이 세계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 테다(<파이어펀치>).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이후의 세계는 ‘아무런’ 것도 아니다. 꿈을 꾸는 사람은 그 자신이 모두가 될 수 있다고 믿지만 반대로 깨어난 이후에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면 아무런 것도 볼 없는 세상에서는 모두가 볼 수 있는 무언가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라면 <체인소맨>은 전작인 <파이어펀치>의 연장선에 있다. 잠에 들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으면 깨어나고 싶어하는 누군가도 있다. 이 세계는 겨울의 한복판에서, 어둠이 내린 장소에서 시동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