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영화의 가족애에 관하여

by 수차미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인용구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이 인용구는 가족이라는 단어의 힘을 잘 드러낸다. 이것을 굳이 단어로 칭하는 것은 정말로 피가 이어지지 않은, 이른바 유사 가족의 형태에도 끈끈한 가족애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나 현실 세계에서 그들은 마치 처음부터 같은 가족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듯 진한 우정을 나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삼국지 속 도원결의부터 홍콩 영화에서 나타나는 두 청년의 담배 연기까지, 그들의 우정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기 속에서 밝게 빛나는 듯하다.

그만큼 밝기에 그것이 무척 당연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어떤 영화들은 이야기의 주요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설명, 이른바 당위성을 '혈맹의 위협'으로 짧게 대체해버리곤 한다. 이를테면 <테이큰> 시리즈 속 아버지는 딸을 구하려 머나먼 모험을 떠난다. 그런데 그 영화의 러닝타임이 두 시간여에 이름에도 고된 여정의 원동력은 아주 찰나의 순간으로 언급된다.

물론 자기 딸이 위험에 빠졌는데 가만히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단지 아버지의 고군분투를 보여주기 위해 가지각색의 이유를 대며 딸을 납치해간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다면 그 딸의 자리를 다른 것으로 치환해보자. 평생 모아온 돈을 몽땅 털어가 놓고 불을 붙이기 전에 서둘러 오라는 전언을 받은 아버지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역시 이 경우에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구해야 하는 대상이 딸일 때보단 그 설득력이 약할 것이다. 심지어 관객 중에는 그 아버지를 돈에 미친 것으로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 진행의 편의성으로 가족이라는 소재는 널리 사용됐다. 일단 작품의 발단과 전개에 있어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고, 그것은 그 후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보여줄 시간이 많아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뮤지컬 영화라면 춤과 노래일 것이고 액션 영화라면 거침없는 전투 장면일 테다. 그러나 막상 가족이라는 이름에 치중한 나머지 그들 이야기의 축, 하체부실로 인해 영화 전체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런 영화에 좋은 평가를 하기는 아무쪼록 힘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IE002288416_STD.jpg 영화 <토이 스토리 2>의 작품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위에서 언급한 것은 이른바 기초, 스테레오 타입이니 그러한 서사를 가진 작품은 정직하거나 비겁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야기의 토대인 만큼 많이 사용됐으니 그 설정의 안정성이 무척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발전의 과정이란 돌연변이와 같이 소소한 진보적 발자취를 남기며 나아가는 것이다. 가족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그러한 토대로부터 수도 없는 변형을 거쳤다.

가족애가 빠져나가고 가족이라는 이름만이 남은 공허한 앞마당을 가진 오즈의 집, 늘 항상 한결같던 앞마당에 비가 오고 먹구름이 끼고 그런데도 결국 환하게 웃고야 마는 히로카즈의 집, 마치 아파트처럼 층마다 다른 느낌의 구성원이 살아가는 디즈니-픽사의 집.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영화에서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고는 한다. 어딘가 모르게 점점 흐릿해져 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일체의 괴리감이나 모종의 단절감마저 느껴진다.

당연하게도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나아가는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발전하며 가족은 기능을 잃어가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보호의 기능이 어린이집으로 이관되고, 교육의 기능이 학교로 양도되고, 식사는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면 그만이다. 언젠가 당신이나 당신의 자녀들은 그 낡은 둥지를 떠날 테고, 명절이라는 민족의 축제는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구닥다리 풍습으로 치부될 것이다. 당신은 몰라도 당신의 자녀는 당신이 나이가 들었을 때 지금의 당신만큼 부모를 자주 찾아오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그 외로운 사회는 마침내 가족이라는 정서, 가족애의 마지막 향기가 사라진 삭막함만이 감돌 테다. 이것에 대해 혹자는 퇴화라는 단어를 고집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발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분명 가족의 해체는 다시 새로운 형태로 뭉쳐질 수 있다는 일련의 믿음이 있다.

하지만 믿음은 믿음일 뿐이고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 우리는 그런 냉정함을 조금이나마 따스하게 품어보려는 몇몇 영화들을 알고 있다. 이를테면 픽사의 <토이 스토리> 시리즈가 그런 예에 속한다. 워낙 알려진 영화라 여태껏 많이 다루어진 이야기이지만, 아주 사소하게 다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진다.

IE002288417_STD.jpg 영화 <토이 스토리 3>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이 스토리>와 가족의 형태

장난감이라는 명사에는 장난을 치며 노는 도구가지라는 뜻이 있다. 그 단어의 의미 뜻만 놓고 본다면 그저 장난 거리에 지나치지 않으니 무언가 하대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타인에게 도발을 걸 때 "넌 내 장난 거리도 안돼!"라고 으름장을 놓는 게 그 예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장난'이라는 명사가 서로 간의 대화와 소통을 의미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의 세계에는 무엇이든 살아있는 것, '인칭 대명사'로 불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문을 보며 반갑다며 끌어안기도 하고 혹은 메마른 침대보를 조심스레 쓰다듬기도 한다. 인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 내어 허공에 대화하기도 한다.

아마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도 있을 것이다. 가상의 친구는 자신에게만 보이므로 자신이 아니면 타인에게 말을 건넬 수 없다. 결국 자신은 가상의 친구와 현실의 친구, 그것이 가족이든지 반려동물이든지 다른 사물이든지 간에 서로를 매개하는 중재자의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러한 중재자의 위치란 분명 가장 중립적인 것이고, 가운데라는 어구를 붙일 수 있을 테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지나쳐 버리기엔 성인이 된 우리도 가운데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운데, 그 어중간함이란 득이거나 실임이 분명하다. 흔히 여기저기서 피터팬 증후군이라 떠들어 대는 그 단어는 '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치 일부러 성장 속도를 늦추는 것이 일종의 '낙제'처럼 여겨지는 그 단어에는 지금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하대하고 업신여기는 듯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그것이 낙제라고 단정 지을 만한 근거는 없다. 추억이라는 것, 시간이라는 것, 그러한 시간의 발자취는 금세 사라져 한 번쯤은 되짚어 돌아가고픈 어딘가를 '더는' 비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그 누구도 과거의 어딘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단지 여기에서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한 추억은 인간이 시간 안에 존재하는 이상 영원히 생성될 것이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추억 하나쯤은 가슴 속에 품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과거의 어느 한때를 현재처럼 기리는 피터팬에게 '낙제'라는 딱지를 구태여 붙여야 할지는 의문이다.

IE002288418_STD.jpg 영화 <토이 스토리 3>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피터팬에게는 하늘을 나는 마법의 힘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피터팬 파생작에서 '어른이 된' 피터팬은 그 마법 같은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그 마법이란 것은 순수함에 해당하는 무언가일 것이다. 이때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장난감이라는 것의 의미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장난감이란 어른이 되면 하대당하는 무언가이고 피터팬 또한 어른이 되면 하대당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터팬을 어른의 상징이 아니라고 여기고는 하는데 사실은 수많은 어른이 피터팬을 꿈꾸고 있다는 것에서 그 역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피터팬과 장난감은 일련의 맥락을 공유하고 있으니 사실상 어른들도 장난감을 좋아한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키덜트라는 신조어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결국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어른이나 아이나 같은 꿈을 꾼다는 것, 혹은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신체적이거나 사회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 본성에 관한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현실의 벽에 부닥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어린 시절 가상의 친구에게 말을 걸 수 없다는 뜻이다. 가상의 친구는 여전히 자신 마음속에 있지만 단지 주변에서 이상하게 본다는 것만으로 티를 낼 수 없다.

한국의 모 보험회사 광고에서 묘사되듯, 그것은 일종의 '걱정 인형'으로서 우리의 고민을 듣고, 울고, 웃고, 지쳐 쓰러진다. 그 걱정 인형이라는 이름에는 걱정을 대신 해주는 인형이라는 뜻이 있고, 그건 사실상 어른이 지닌 현실의 의무를 대신해줄 가상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IE002288419_STD.jpg 영화 <토이 스토리 3>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우리는 낙제라는 불편한 말보다 대리인이라는 곱상한 단어를 붙여보고 싶다. 거기에 '망상 대리인'이라는 재미있는 명칭을 붙여보자. 과연 그 단어에서 어느 쪽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망상을 대리하는 것인지 혹은 그 대리인 자체가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디즈니 픽사의 <토이 스토리>란 그런 것을 말하는 영화다. 인형들에게도 하나의 인격이 있다는 사실, 사람의 입장에서 인형에게 말을 거는 게 '망상'처럼 보일지 몰라도 인형들은 정말로 살아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털어놓는 고민은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그 안에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그러한 보존의 가능성은 마치 현대의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을 애써 무마해 보려는 몸부림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공동체의 보존, 작품 속 그들은 마치 하나의 '유사 가족'처럼 보인다. 장난감들의 태생은 공장이기에 당연히 '피로 이어져'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느 곳에 동떨어진, 어느 곳으로 보내진 갑작스러움에 긴밀하게 대응한다. 협동과 협력에서 대가보다 정을 중시하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족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필멸자와 불멸자의 상하관계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그것은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가족이 해체되는 모습까지도 닮아있다. 첫째로 그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 불멸자다. 장난감의 주인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에서 벗어나 어느덧 대학을 가게 될 나이로 훌쩍 자라버린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장난감 공동체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 변하기는 하는 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처음에는 앙숙이던 우디와 버즈의 관계는 점점 끈끈해져 마침내 가족을 넘어 한 몸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째 틈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관계는 수직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인이 두 장난감을 사이좋은 것으로 엮어내자 그들은 정말로 친해진다. 세월이 흘러 장난감에 흥미를 잃은 주인이 눈길 하나 주지 않아도 그들은 여전히 주인을 그리워한다. 누가 그들에게 무어라 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주인에게 종속된 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 "우리의 집"이라는 발언이 그것을 보충한다. 그들의 집, 마음의 고향은 주인의 그것과 밀접하게 엮여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는 것, 자라온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걱정을 대신한다는 것이며 더는 망상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는 필멸자의 숙명이다.

필멸자는 망상에 빠지곤 한다. 현실의 벽,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정체되고 그렇다면 뒤처진다. 그것은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아가는 것과 같다. 운동으로서의 런닝 머신은 적절하게 몸을 단련하는 효과를, 노동으로서의 벨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돈 낭비에 불과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돈을 쓰는 것과 버는 것의 차이다. 말하자면 불멸자인 그들 장난감들에게 앤디의 존재는 런닝머신과 같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며, 그들은 멈춰 있어도 버림받을 뿐 죽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결국 시간 아래에 살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는 단초가 된다. 그들은 스스로 장난감에게는 주인이 있어야 한다 말하지만, 사실 그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 이유가 주인이라는 사실뿐이다. 만약 주인 대신 의존할 삶의 의무를 찾는다면 더는 주인을 찾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장난감들은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는 듯하다. 반복해서 말하듯 장난감의 세계는 이미 가상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IE002288420_STD.jpg 영화 <토이 스토리 3>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이 스토리>의 2편에서 우디는 박물관에서 일생을 보낼 것인지 3편에서처럼 주인에게 외면받을 것인지를 택하게 된다. 그 장면은 단순히 3편을 위해 연출된 것이라기엔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어느 유명한 프렌차이즈의 상품이었던 우디는 마침내 그가 속해야 할 진짜 가족의 품에 안기게 된다. 단지 공장에서 양산된 제품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디라는 이름과 외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 가족에 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사 가족에서 벗어나 진짜 가족을 꿈꾸는 것이고, 그 갈등은 진짜 가족의 품에 남는 것으로 기울어진다. 그런데 진짜 가족은 박물관으로 보내져 영원한 시간 속에 살게 된다. 그들은 장난감이기에 사실상 죽지 않으므로 그렇다. 우디는 금세 분열될 유사 가족의 형태와 그나마 각종 굿즈로 뿌리라도 남아있는 진짜 가족의 형태에서 고민하게 된다. 어찌 됐든 사실상 '진짜 가족' 구성원들도 '피'가 아닌 '이름' 뿐이기에 해체의 수순을 밟고 있다.


그러니까 우디의 선택은 그러한 해체의 수순에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에 대한 물음이다. 마치 그들이 주인의 품을 벗어나지 않는 걸 의무로 여기듯이, 마치 그들이 가족의 품을 벗어나지 않는 걸 의무로 여기듯이. 두 이질적인 집단에서 단 한 명의 반대파만 빼고는 서로 합쳐져 가족이 확장된다. 그러니까 애초에 어느 집단이든 간에 손쉽게 변형될 수 있는 것이니 정말로 가족은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 방향은 우디와 함께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동반자 관계는 다시금 흘러가는 시간 속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마주한 <토이 스토리>의 3편은 끝내 지금껏 우리가 토의했던 사실들을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뻔한 이야기가 곧 우리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난감들의 주인, 앤디의 부모는 앤디를 떠나 보내며 일종의 푸념을 늘어놓게 된다. 그것은 지금껏 자라온 방에서 자식이 이탈한다는 것, 이때 자식이라는 존재는 가슴속 한 구석에 들어앉은 가족의 무게와도 같다.

그러니 그 무게감이 덜어진 마음속에는 공허함이 맴돌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과정은 수직에 걸쳐 반복된다. 앤디의 부모는 앤디에게, 앤디는 장난감들을 떠나 보내게 된다. 그것은 곧 가족을 떠나 보내는 과정, 혹은 어린 시절 겪었던 걱정들을 비워낸다는 것, 그리고 가족과 이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재밌게도 그들의 관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반려자와의 유대가 역전되어 있다. 보통 우리가 반려동물과 함께한다고 하면 그들의 수명은 우리보다 적은 것이 대다수이고, 그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들의 짧은 삶을 마주하며 슬픈 눈물을 흘리게 된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십오 년 정도를 살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니 일생 단 다섯 마리와의 유대만을 선택해야 하는 셈이다. 혹시나 거북이나 해삼처럼 사람보다 오래 사는 동물은 잠깐 접어두시길,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려동물에게는 우리가 불멸자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불멸자인 우리는 필멸자인 그들을 거두어 살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필멸자인 그들은 불멸자인 우리를 부러워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반려동물이라는 주인종속적 위치의 인형들이 불멸자이며 반대로 주인은 필멸자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에서 서사를 진행하는 인형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니, 사실상 필멸자의 입장으로 불멸자를 대변하게 되는 셈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불멸자가 되어 필멸자와의 착실한 유대를 쌓아 나가게 된다.


IE002288421_STD.jpg 영화 <토이 스토리 3>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마치 가족과도 같은 반려동물은 그 필멸성에 있어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테면 안타까운 일을 겪지 않는 이상 어머니는 자식보다 세상을 먼저 등지게 되어 있다. 자식은 그러한 어머니를 우러러보다 어느덧 어머니가 더는 높아 보이지 않을 때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이토록 작았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필멸자란 불멸자에 우선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여기서 우리가 ‘포스트휴먼’을 논할 때 익숙하게 말하곤 했던 논의가 수면 위로 부각되는데, 인간은 죽음으로써 그 존재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을 회피하려 하며 불멸자, 이를테면 로봇이나 자아를 네트워크에 업로딩 하는 행위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순간 그는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탈인간화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죽음이란 무척 숭고한 행위이며 따라서 영화 속의 인형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의 반려 관계의 우위가 영화상의 그것과 달라지는 이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인간의 죽음이 인간성을 증명하는 표지라면, 다시 말해 필멸성이 우위를 지닌다면 우리의 반려동물은 우리보다 높은 지위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현실의 우리가 기본적으로 불멸성을 우위에 두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매체에서 나타나는 포스트 휴먼의 꿈은 바로 그것을 우리 앞에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하지만 이 영화 <토이 스토리>는 인간의 죽음이 숭고하다 말하며 그 불멸-필멸 간의 수직관계를 인형이라는 반려적 도구를 통해 은유하고 있다.


그들의 관계를 앞서 말한 가족에 비유한다면 인형들은 늙지 않는 부모님 주인공 앤디는 커가는 자식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실의 그것과는 달리 인형 부모님은 전혀 늙지 않고 오히려 낡아가기만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함께할 했던 자식의 빈자리를 보게 될 시점, <토이 스토리3>가 오자 인형들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인형 부모님뿐만 아니라 현실의 부모님에게도 있다. 단지 차이라면 불멸과 필멸이라는 주어진 시간의 차이다. 본디 부모는 자식보다 일찍 죽기 마련이지만 인형 부모는 자식이 죽고 손자가 죽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테다.


바로 그것, 이 영화는 가족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테제를 하나의 선상에 올려놓으며 두 단어 사이의 유화점을 찾아내고 있다. 영화에서 인형들은 자신은 주인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좋은 박물관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던 우디는 끝내 주인의 품에 돌아가고 만다. 2편에서 우디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3편의 내용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충직함, 회귀성이 이 영화 시리즈를 견인하는 요소임이 명확하다. 그리고 그 충직함이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 안에 있다. 가족이라는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과 신뢰를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떠오르기도 하고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야기를 길게 할 수는 없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전자는 기른 정과 낳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이 있고, 후자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틀 안에서 다시금 결합되는 화합의 결과물이 있다. 그것은 마치 <토이 스토리>에서 보여지는 우디와 버즈의 성장담,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버려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험담을 애니메이션 밖에서 현실적인 모습으로 재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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