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추억과 다가오는 죽음을 향해

by 수차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의 영화감독으로, 어느 일본 감독보다도 한국의 관객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 인기가 많지는 않다. 한국에서 개봉하는 일본 영화는 100편 중 1편 정도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에 앞서 한국 영화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높은 내수 점유율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일 년 동안 개봉하는 영화의 절반이 자국 영화이고, 이것은 할리우드가 전 세계 영화 시장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방어율이 높은 편에 속한다. 그러니까 한국 시장은 의외로 '자국산'의 텃세가 있는 편이고 관객들의 수준도 그만큼 높다. 즉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한국에서 인기를 끈다는 것은 그러한 관객들에게 어필할 만큼 영화가 좋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현대 일본 영화 시장이 과거에 비해 안타까울 정도로 부진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옛 일본의 거장 감독 오즈 야스지로를 떠오르게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가족의 형태를 조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그런 면에서 거장의 힘을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사실은 그가 가족 이야기에 힘을 쏟기 전에도 이미 유명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이 없다. 그의 초기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9)나 <환상의 빛>(1995)을 보면 아무렴 따듯한 이야기이기는 하나 분명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족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된 것은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언급된 바가 있다. "일 때문에 바빠 집에 자주 못 들어갔었는데, 집에 들어가자 자식이 '아빠 또 오세요'라고 말하더라"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였고 그 작품은 병원의 실수로 뒤바뀐 자식을 마주하며 고민하는 어느 가장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한국의 '고레에다' 팬들이 늘어났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관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레에다의 영화가 예술 영화로 분류되어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가 없기는 하나 그 작품을 기점으로 적어도 10만의 관객석을 확보하고 있다. 어찌돼었든 간에 그 영화를 통해 고레에다는 가족 영화의 정수를 지닌 것으로 재평가되었고 이 글은 가족 영화 이전에 있었던 히로카즈의 본 모습, 혹은 다른 재능이라 부를 만한 <원더풀 라이프>를 리뷰해보려 한다.

IE002292330_STD.jpg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재개봉 포스터ⓒ 라이크 콘텐츠



가족 이전에 세상을 이루는 것들, 존재 이유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죽음 이후의 공간인 '림보'에서 일주일간의 유예기간 동안 삶을 성찰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 림보의 일주일 동안 인물들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무엇인지 하나를 고르고, 림보의 직원들은 그 추억을 영화로 촬영해 모두의 앞에서 상영한 후 '영원'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다. 다시 말해 림보라는 곳은 단지 기독교의 내세인 천국-연옥-지옥에서 연옥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승이라는 공간의 끝없는 여백을 잠시나마 붙잡아 놓는 곳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림보는 우리의 현실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인물은 생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낡은 건물은 일본식 가옥 풍을 유지한다.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이미 죽은 인물들이 죽음에 슬퍼하는 모습도 없다. 그러니 이 영화는 죽음 이후의 모습을 그리기보단 현실의 연장 선상에서 그 끝자락을 바라보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현실의 연장 선상이란 현실의 재현이라는 역할을 지닌 영화의 본질적인 속성에도 일치한다.

영화의 기능이란 현실을 재현하지만 동시에 현실이 아닌, 지나간 시간을 그리는 것이다. 필름 속에 담기는 현실의 모습은 금세 '과거'로 변해버리며 그때 필름 속에 담긴 것은 과거, 우리가 보는 영화는 '현재에서 존재하는 과거'가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림보의 직원들이 망자를 위해 찍는 영화란 '메타 현실'이거나 '메타 기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과 림보의 관계가 바로 그러한 것이므로 사실 림보라는 공간 자체가 '영화'라고도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림보의 인물들이 촬영하는 영화가 어쩌면 스스로를 구축하는 행위이거나 발자취를 기리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현재에서 존재하는 과거'란 림보에서 존재하는 과거라는 말도 되므로 그렇다. 그렇다면 망자들은 과거의 존재일 것이며, 그것은 위의 문장을 뒤집어서 '과거가 현재에서 존재하는 법을 찾아내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이 영화는 죽음 이후의 삶을 이승과 저승이라는 이분법으로 그리고 있지 않고, 그 영원이라는 특정 공간을 통해 죽음이란 삶의 연장선임을 말하고 있다. 이때 그 삶의 연장선이란 과거가 현재를 부여잡는 형태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모든 시간이 끝없이 이어지듯이 현재 자체를 모두 취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정말로 필요한 단 하나의 추억만을 지녀야만 한다. 즉 이 영화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만을 가지고 삶을 이어가는 것, 반대로는 불필요한 추억을 지워내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만약 단 하나의 순간만을 간직하고 영원 속에 살아야 한다면 당연하게도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기억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IE002292333_STD.jpg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한 장면ⓒ 라이크 콘텐츠



이때 가치란 단순히 긍정이나 부정에만 속하지 않고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단 하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혹은 없기를 택해야 한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나 현재에 행복하다면 현재가 아니라 고난과 역경에 처했던 과거의 순간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즉 존재의 이유란 간단하게 말하기 어려운 단어다. 불어로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로 칭해지는 이 단어는 숱한 철학자의 손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온 바가 있고 그 물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 영화가 존재 이유에 대해 묻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관객이 이 영화를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님을 깨닫는다.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야 메시지가 완성되는 여타 영화들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끝까지 형식부터 방식까지 모든 것이 그 물음을 던지기 위한 초석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가 마치 다큐멘터리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지적해볼 수 있다. 영화의 초중반부에 걸쳐 림보의 직원들이 망자에게 추억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는데, 인터뷰어의 모습이 묘사되지 않고 또한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촬영되었다. 그 외에도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마치 하나의 인격을 가진 개체처럼 인물들을 보여준다. 이른바 객관적인 시선이라 볼 수 있는 그것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중간에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핸드헬드로 찰영되어 마치 그들 그룹의 곁에 달라붙은 어느 누군가를 상정하는 이 카메라는, 항상 인물들 사이에 있어야 할 어느 인물의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여러 명이 앉은 회의장면에서는 그 인물들이 않지 않은 빈자리에서 대각선으로 반대편 인물을 촬영하고, 특정 시퀀스의 처음에서 설정 쇼트로 장소의 전체 모습을 보여준 다음 그 장소의 입구에 카메라를 위치시키고는 한다. 즉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내부자인 동시에 목격자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망자인 그들 사이에서도 카메라라는 가상의 망자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느낌은 관객이 이 영화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게 되는 단초가 된다. 관객은 카메라라는 가상의 인격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리는 림보로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과 영화의 존재론, 푼크툼이라는 향수

이 영화의 필터도 그것을 보조하는 면이 있다. 이 영화는 1999년에 촬영되었다는 것 말고도 전체적인 영화의 색조가 칙칙하고 뿌연 편이다. 그것은 곧 빛바랜 사진을 떠오르게 하고, 그것은 다시 '오래된 추억'이라는 것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바르트가 말했듯 오래된 사진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바로 그러한 것이 이 영화에도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노인일 뿐이지만 자신에겐 유년기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든 유대를 함께했던 그 압축된 추억이 날카롭게 관통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관통이란 모든 시간, 지금까지의 과거와 존재할 수 있었던 어느 미래에 걸친 추억을 하나로 축약해 놓은 집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시간대를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집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시간대를 공유할수록 집점을 뚫는 힘은 점점 커지게 되며, 그때 비좁은 집점을 관통하며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다시 말해 누군가와 추억을 쌓는다는 것은 남겨진 자가 남겨진 시간을 되돌아볼 때의 고통을 쌓아두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과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상정하고 미리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조절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이 영화에서 우리가 믿지 않던 사후세계가 정말로 '림보'라는 형태로 존재하듯이, 우리가 모르던 그 고통의 존재는 홀로 남겨진 이후에야 비로소 알려지기 때문이다.

IE002292335_STD.jpg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한 장면ⓒ 라이크 콘텐츠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단 하나의 행복을 찾으며 과거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그러한 고통 속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치 순례자가 경건한 마음으로 가시밭길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그곳까지 이르는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나 마침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영원 속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그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듯하다. 무덤덤하게 자신의 추억을 하나 둘 읊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왠지 모를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추억이란 그리움의 표지이기 때문에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작중에는 림보에 온 사람들이 모두 평등하니 생전에 악인이었든 선인이었든 간에 추억만큼은 공평하다는 뉘앙스의 대사가 있다. 그것은 곧 죽음 이후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스크린 밖의 우리를 림보로 인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공평, 평등함이 추억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어느 추억은 기쁠 것이고 어느 추억은 슬플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추억의 가치가 모두 공평한 것이라며, 그 공평한 장소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껏 말했던 것이 틀린 것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망각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면 틀린 것만은 아니다. 망각이란 말하자면 기억의 풍화라 말할 수 있을 터인데, 풍화란 어떤 사물이 시간이 흐르며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것이며 서서히 깎여 나가는 그것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므로 어쩌면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시간'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고 그것은 곧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이유다. 버스 창가에 앉으면 창밖의 풍경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분명 그들이 가만히 있고 우리(버스)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시간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만히 있고 우리가 움직인다 말하는 게 맞다. 그렇다면 시간을 따라 이동하는 추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온전히 있다. 단지 우리가 너무 멀리 왔기에 보이지 않을 만큼 축소되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희미해지기에 공평하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으며, 그 공평함의 장소인 림보는 다름 아닌 '시간'이 된다.

IE002292338_STD.jpg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한 장면ⓒ 라이크 콘텐츠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사진에서 과거와 미래를 망라하는 시간의 집합체를 보며, 그렇다면 림보란 시간의 집합체이므로 사진의 기능을 하게 된다. 그래서 림보란 여기-이곳에서 저기-그곳을 떠올리는 특수한 장소일 수밖에 없다. 마치 영화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서 추억을 떠올리지 못해 끝까지 남은 노인이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자신의 삶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보는 것은 단지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비디오 테이프와 영화는 모두 영상 매체이고 아날로그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이 영화가 나올 당시에는 그것들이 최신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아날로그가 우리로 하여금 이 영화에 추억을 새기게 하는 것에 일조한다.

존재 이유와 영화적 형식

결국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것은 모두 그러한 추억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건 되도록 객관성을 유지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것은 감정의 이입을 억제하는 동시에 그 감정을 영화 밖으로 배출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신파란 영화 속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 신파는 다름 아닌 우리의 추억이며 따라서 이 영화 혹은 우리의 영화는 우리라는 주인공이 있다. 그때 그 주인공의 자리가 바로 존재 이유다. 또한 이 영화의 필터와 비디오 테이프, 필름이라는 아날로그성이 우리의 향수를 자극해 추억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그 자극은 이 영화가 지닌 다큐멘터리성과 대비되어 더욱 강렬한 이미지를 준다. 겉으로는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하나 그 속에는 따스한 감정선이 흐르고 있다.

또한 인물의 구성 또한 그것을 보조하는 면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망자를 돕는 림보의 직원들은 단 하나의 추억을 떠올리지 못하거나 혹은 고르는 것을 거부해서 이곳에 남은 것이다. 즉 림보의 직원들은 이전에 이미 선택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여기서 전자는 무의식 속에 갇혀버린 추억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며 후자는 의식 위에 떠오른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굳이 추억에 손을 대서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며, 후자는 어느 것에 손을 대도 고통을 느끼거나 혹은 그러한 고통을 받아서라도 추억을 되살릴 의향이 없는 것이다.

IE002292339_STD.jpg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한 장면ⓒ 라이크 콘텐츠



그렇다면 그들은 공통적으로 고통을 회피하게 되는 상황이며 그것은 곧 존재 이유가 고통이라는 뜻과, 존재 이유를 회피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 말인즉슨 그들은 지나온 삶에서 주인공이기를 포기했다는 것이며, 이 영화의 마지막에 림보의 직원 중 하나가 칠십 년 만에 영원 속으로 떠나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느 망자가 자신의 옛 추억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망자가 '사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말하지 않은 건 자신을 위한 배려인 게 아니냐'고 묻는 편지를 보며 이렇게 한탄한다. "나 자신과 마주하기 싫었다" 그것은 곧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체로 바로 서지 못한다는 것, 인생의 타자화를 뜻한다. 그는 자신의 삶임에도 객관성을 유지하며 가상의 제 3인물, 림보의 직원으로 살아왔고 그것은 그가 이른 나이에, 추억을 쌓던 중에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존재 이유가 주체 밖으로 이탈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요 논고는 바로 그러한 것을 말하려고 하는 듯하다. 영화 중후반에 존재 이유를 말한 망자들을 영원 속으로 떠나보내기 위한, 영화 촬영을 준비하는 장면에 나오는 대사가 있다. 비행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비행기와 그 앞에 구름이 다가오는 효과를 준비하는 두 스태프의 대화다. "그럼 구름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군요" 이것은 앞서 우리가 말했던 이 영화의 추억과 시간에 관한 비유다. 존재 이유란 불현듯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덧 생겨나 지나간 다음에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추억이며 시간이다. 또한 그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죽음은 문득 지나쳐 가지만 추억은 순간 다가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지금 이곳의 추억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그야말로 환상적인 삶, <원더풀 라이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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