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2. 20. 브런치 무비패스 #1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러나 관람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이 글은 원작 만화와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4, 2015, 두 차례에 걸쳐 개봉)를 배제한 채로 작성되었다. 또한 무척 길고 긴 글이 될 것이니 미리 양해를 밝히는 바이다. 원고지로 약 70매 정도에 해당한다.
<리틀 포레스트> - 환상이 일렁이는 마법의 숲
1. <리틀 포레스트>와 원작
『리틀 포레스트』는 일본의 작가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애프터눈’ 잡지에 연재했던 만화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이 만화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2014), <리틀 포레스트 겨울과 봄>(2015)가 개봉했다. 그러니까 『리틀 포레스트』는 횟수만 따지고 보면 이번이 무려 세 번째 영화화인 셈이다. (이하 동명의 일본 작품은 끝에 … 삽입 처리함)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영화를 마주하게 된 것은 처음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어쩌면 한국에 있는 이 영화의 원작 만화 팬은 이 영화가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을지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있을지도 모른다. 원작 만화의 방대한 분량을 최대한 담아내고자 비발디의 사계처럼 계절마다 한 시간씩을 할애해 땡볕 아래의 청춘을 세심하게 담아냈던 일본의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점은 그 영화가 ‘최대한’ 노력해 방대한 분량을 두 차례에 걸쳐 스크린에 올려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이야기라는 점에 찍혀야 한다.
왜냐하면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원작 만화가 탄생한 배경이 일본의 사회 현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만화는 2002년에 처음 등장했고 그 시기의 일본은 이른바 ‘유토리’라고 불리는 공교육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른바 ‘유토리’ 세대라는 현재 일본의 청춘들, 아마 뉴스나 대중문화에 관심을 둔 독자라면 어렴풋이 들어 보았을 단어다. 혹은 ‘유도리 있게 행하라’라는 속어를 들어본 적이 있다면, ‘유도리’가 일본어로 ‘여유’를 뜻하는 ‘유토리’의 잔재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유토리’라는 공교육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이른바 ‘탈주입식’ 교육이었다. 그 의도는 좋았으나 어쩐지 결과가 좋지 않게 되어 세계 역사에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남게 되어버렸다. 숱한 연구사례들이 유토리 세대(87년~99년 출생)에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타인에게 의존하려 하는 책임감의 부재. 둘째, 책임보다 권리를 우선시한다는 이기주의적 성격. 셋째, ‘유토리’있게 행동하려는 생활 양식.
그렇다면 아마 당신은 이 부분에서 이 만화가 2002년에 처음 등장했음을 지적할 것이다. 유토리 세대는 2003년~2009년 까지 중등 교육을 받았던 세대이니 만화가 등장하고 난 후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 말이 맞지만 이 글이 말하려는 것은 바로 그 이전 세대에 관한 것이다. 이 만화는 유토리 이전 세대, 주입식 교육이라는 강박적 삶에서 벗어난 귀촌향도의 여유를 품었다. 높고 반짝이는 세련된 빌딩 숲은 정작 그 속에서 비좁아 터진 지하철을 타고 아침 9시 정각을 향해 달려야만 한다. 반면 누렇고 칙칙해 보이는 ‘리틀 포레스트’를 쉼터로 둔 시골은 ‘몸이 고되지만 마음이 편안한’ 곳에 해당한다. 시골과 도시라는 명확한 이분법은 그들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을 원했는지를 곧바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만화를 보는 독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그 만화가 왜 인기를 끌었는지는 지금의 우리 또한 나지막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만화의 등장 후 ‘유토리’가 등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만화가 영화화되고 난 이후의 차이점이다. 원작으로부터 십여 년이 흘러 등장한 일본의 <리틀 포레스트…>는 당연하게도 시대의 반영이 이루어진 모습을 보인다. 바로 그것이 ‘유토리’ 세대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작이 유토리 이전 세대의 모습을 다룬다면 작품의 영화화는 ‘유토리’ 를 다룬다. 그러니까 우리가 <리틀 포레스트…>를 볼 때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차이점을 중점으로 둔다면 아주 흥미로운 감상법이 될 수 있다. 그 영화에서 인물은 유토리 세대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토리 세대의 일원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겪는 사회적 차별을 피해 귀촌 향도한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꼰대’라는 잔인한 단어는 유토리 세대에게 낙인을 찍는 무차별적 성인들에 대한 미사어구였던 것이다. “너는 ‘유토리’니까 일 처리도 잘 못 하는 구나’라는 식으로 말이다. 한자마다 음차가 달라 그에 대한 교육이 필수적인 일본, 당연하게도 그것을 여유라는 이름으로 생략해버린 유토리 세대는 선배들보다 미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건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지 유토리에게만 통용되지 않을 물음, 자신이 왜 김씨 일가의 자식이어야 하는지처럼 부모에게 원망을 품어본 독자도 몇몇 있을 것이다.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이 영화에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이 작품을 본다면, 좋아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가 처음인 경우가 더 많을 테다. 아무래도 원작 『리틀 포레스트』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상대적으로 그럴 테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일본의 원작과 한국의 영화를 상세하게 비교하지는 않을 예정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만큼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일본과 한국의 유사점 혹은 차이점에 관한 이야기다. 평소 인문학이나 시사 문제에 ‘바삭한’ 독자라면 알듯이, 일본과 한국은 약 십 년의 차이를 두고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를테면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말할 때 십 년 뒤의 한국도 실제로 불경기를 맞이했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유토리 세대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겪던 사회 문제가 한국에도 통용되지 않으리라는 말은 없다는 뜻이다.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 될 수는 없겟으나, 현재 우리나라도 2016년부터 ‘자유학기제’라는 이름으로 ‘탈주입식’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유토리 세대가 사회에서 겪던 문제처럼 ‘열정페이’나 ‘꼰대’라는 이름의 탈권위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기쁘게도 현재 일본은 일할 사람이 없어 구직자를 모셔가고 있다고 하니 지금의 우리도 십 년만 기다리면 구직이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어찌 됐든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 또한 그러한 문제, 유토리와 비슷한 현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 또한 직접적인 대응이 불가하나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유사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단 영화의 직접적인 컨셉이 ‘힐링’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단지 그것이 ‘농촌체험’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테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가 이곳으로 왔고, 어떤 감정과 마음가짐으로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힐링이라기보다는 도피에 가까운 영화다. 일반적인 힐링 영화가 우리가 흔히 이룰 수 있지만 막상 하기엔 약간의 각오가 필요한 것들을 다룬다면, 이 영화는 애초에 출발선부터 손에 닿지 않는 꿈의 섬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관한 논의는 다음 파트에서 다시금 하도록 하고, 일단은 이것 하나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일본의 영화보다 한국의 영화는 보다 현실적인 것에 무게가 실려 있다는 점이다.
2. <리틀 포레스트>와 전반부와 후반부
『리틀 포레스트』의 컨셉은 어떤 일로 고향에 내려간 주인공의 일 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자연 풍경보다는 소꿉친구와의 관계, 그리고 멋진 요리 장면이 주가 된다. 재밌게도 우리가 농촌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농사 이야기는 어쩐지 뒤로 밀려나 있다. 일본의 영화는 한 계절에 한 시간을 할애해 러닝 타임이 길었으나 한국의 영화는 2시간에 못 미치는 러닝 타임을 지녔다. 이에 대해 임순례 감독은 한국의 관객이 짧은 리듬의 영화를 좋아하기에 그랬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사계절을 다루고 있기에 리듬이 짧을 수밖에 없으나 오히려 그러한 부분에서 어느 정도 이득을 본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영화가 길고 느린 호흡으로, 이른바 짐 자무시의 <패터슨>처럼 한 편의 풍경에 대한 시(時)를 써 내렸다면 한국의 영화는 짧고 굵은 직설화법을 사용한다. 말하자면 하고 싶은 말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했다는 뜻이며 반대로 말하자면 많은 것을 비워 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비워낸 것 중에는 여름과 가을의 이야기가 크다. 이 영화는 인물이 귀촌 향도하는 겨울에서 시작해 한 바퀴를 돌아 다시금 겨울에서 결말을 맺는다. (일단은 말이다) 즉 겨울이 작품의 초반이며 여름과 가을은 중반이고 봄과 겨울은 결말에 해당한다. 그 말인즉슨 겨울이 두 번 등장하는 만큼 무척 중요한 계절이라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는 겨울이란 무척 고되고 차가운 느낌이다. 특히나 시골에서라면 농사짓는 시기가 아니니 더욱 쌀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영화 초반에 언급되는 주인공 ‘혜원(김태리 분)’이 임용고시에 실패해 충동적으로 고향에 내려왔다는 사실과 결합해 그녀의 기분을 직접 언급하는 표지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그 겨울이라는 계절의 심상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작품의 상영시간 100여 분 중 초반 30분은 겨울인 상태로 진행된다. 이것은 이 영화가 주인공과 그의 주변 인물 재하(류준열 분)와 은숙(진기주 분)을 설명하는 동시에, 주인공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를 관객들에게 아주 깊숙하게 인지시킨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그러한 겨울의 반복을 따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전반부가 인물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후반부는 그 치유의 흉터를 닦아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앞서 말했듯 계절이 주는 효과가 크다. 이 영화에서 계절이란 인물의 감정선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 감정의 영원회귀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상에서 계절의 진행에 따라 회상 장면의 ‘파편’으로 간간히 등장하는 단서를 조합해보면 그녀의 상처가 단순히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의 초반, 그 길고 긴 겨울은 단지 그녀가 임용고시에 실패해 내려왔고 같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남자친구는 합격한 상태라는 것을 알려준다. 단지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무려 연인 사이임에도 아무 말 없이 고향으로 내려와 연락 두절 상태로 일 년을 나는 그녀의 모습이 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때, 그녀의 주변 인물 재하도 그저 회사를 그만두고 귀촌을 했다는 말과 은숙은 이곳 지역 농협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 간소하게 언급될 뿐이다.
그러한 파편의 가장 큰 조각을 가지고 시작한 영화는 계절 어딘가에 흩뿌려진 그들의 심상, 흩어진 감정선을 서서히 모아두려 한다. 여기서 감정선이란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그것이 아니라 영화 속 그들의 감정선이다. 봄이 되면 농촌의 ‘새 학기’가 시작되고 그들의 얼어붙은 감정도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여름이 오고 태풍이 오면 어쩌다 잊은 그들의 상처가 살며시 드러나며, 다시금 겨울이 오면 덮어둔 듯 하던 상처가 찬바람에 얼얼거린다. 결국 그 사계절이란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 혹은 그러한 사건이 앞으로의 인생에도 주기적으로 찾아올 것이라는 필연성과도 같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재하의 대사 “자연은 정직하다”라는 것은 바로 그것을 뜻하는 것으로, 정직함이란 제 뜻을 굽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의 신념에 정당함과 필연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며, 오직 진실한 것만을 추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연이란 그 모든 것을 소유한 존재이기 때문에 농촌에 속한 그들의 삶은 자연을 따라가는 것이 된다. 어떻게 보면 도피, 하지만 분명히 그 도피 속에 ‘이겨낸다’라는 뜻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름과 가을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의 메시지가 나뉜 것은 아주 아름답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인물은 주로 왼쪽을 향하고 있다. 자전거를 타는 장면에서 인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오며, 카메라 또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회전한다. 인물의 대화 장면에서 숏과 리버스 숏의 왼쪽에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리 잡는다. 그것이 단지 주인공 혜원뿐만이 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위치성을 통해 이 영화에서 왼쪽이 치유를 뜻하고 있으므로 어렴풋이 눈치채고야 만다. 그런데 그 여름의 논밭을 가로지르는 자전거가 가을이 되면 오른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인물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며, 카메라 또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회전한다. 그리고 인물들의 상처가 단순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 짤막한 회상장면이 점점 많아지며 ‘흉 진 마음’을 제거하는 그 의미가 오른쪽에 있음을 전반부에 대비시켜보게 된다. 봄에서 여름까지 더워지고 가을에서 겨울까지 추워지듯 그 온도 차가 무척 확실하고 상처의 그것 또한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재밌는 포인트는 이 영화의 결말에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도 혜원은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자전거를 타는데, 여태까지의 자전거 타기가 모두 합쳐진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던 자전거와 카메라가 어느 회전길을 돌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뀐다. 즉 지금까지의 방향성, 왼쪽과 오른쪽이 한 장면에 합쳐지는 기념비적인 숏인 것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사계처럼 혜원이 특정 방향성을 지니지 않고, 다시 말해 고난과 역경을 반복할 것이라는 뜻이다. 봄의 심상이 그런 것이며, 결정적으로 영화 마지막의 재하의 대사가 그것을 의미한다. 양파는 겨울에 미리 씨를 뿌려 놓아야 더 단단하고 맛있다는 말, 그것은 굳이 힘든 길을 택해야 그만큼 보상이 돌아온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그렇다. 말하자면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그 외에도 이 영화는 마치 인물이 아니라 관객을 향해 그러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한 대사와 장면이 많다. 이를테면 재하가 태풍 속에서 살아남은 사과를 던져주는 장면이나 어렸을 적 어머니가 먹고 남은 토마토 머리를 아무 데나 던지면 그 자리에서 새싹이 돋는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리틀 포레스트>인 것은 바로 그런 점을 보조하거나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숲이란 그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보물의 은유이거나 혹은 어머니 자연으로 묘사되는 ‘폐’의 입지를 지닌다. 반대로 숲은 그 방대함에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장소, 그런데 그 헤맴 속에서 동화 속 인물들은 아름다운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미녀와 야수도 그러했고 헨젤과 그레텔도 그러했으며 라푼젤도 그런 이야기다. 숲이란 푸르고 넓고 방대하지만 반대로 그 오래된 고목들의 우직함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반대의 의미가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리틀 포레스트, 작은 숲이란 그런 기능들의 작은 집합체를 의미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작은’이라는 명사란 그 기능의 축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위험성 또한 축소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그곳은 낙원일까 아니면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 집일까. 인물의 마음 자체를 곧바로 은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제목이 영화와 무관하게 보였던 것은 왜일까. 이 영화에 ‘숲’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니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숲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제야 숲이란 직접적인 표지가 아니라 은유적인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자연 앞에 작아지는 인간, 등장인물을 나타내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나무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처럼 인물들이 모인 마을 공동체라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오갈 곳 없이 고향에 정착한 그들의 가능성, 방대함, 헤맴을 뜻하는 것이기도 할 테다.
3. <리틀 포레스트>와 명확한 대비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비가 있고, 그것은 작품의 주요 미쟝센에서도 잘 나타난다. 숲이라는 이중적인 단어와 계절이라는 명확한 대비는 집과 야외가 번갈아 나타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작품에서 조명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그 조명이 무척 대비가 심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체적으로 어두운 집안에 창을 통해 태양 빛이 들어오는데, 그 창문이 무척 넓음에도 집안 전체가 환하지는 않다. 오히려 인물의 이목구비와 옷차림에 음영이 생길 정도이며 그 과정에서 마치 얼룩말과 같은 대비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그 대비의 심함이란 육안으로 곧바로 확인되지 않을 정도다. 말하자면 유심히 쳐다보아야 하며 우리가 그것을 직접 확인하게 되는 것은 실내와 야외의 색차이다. 야외가 나오는 장면 다음에는 반드시 실내가 위치하며 그때 인물은 대부분 정중앙에 자리 잡는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하나는 왜 집안에서만 정중앙에 자리 잡으며 둘은 그러한 대비를 통해 무엇을 얻느냐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물음, 정중앙이란 아무래도 풀기 쉬운 숙제인듯하다. 신화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집은 중심이라 말한 바 있는데, 말뜻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가 사는 그 집이라는 명사부터 인간이라는 소우주, 자연의 한복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용하는 표지가 바로 엘리아데의 집이다. 그 집의 정중앙에 위치한 혜원과 그녀가 행하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그러한 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를테면 극 초반에 떡을 만들기 위해 음식을 사전 조리하는 장면에서도 찹쌀을 믹서기에 넣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믹서기는 명확하게 가운데에 중심을 두고 거세게 돌아가는 장비다. 계절 음식의 조리가 자주 등장하는 영화의 특성상 이러한 중심성은 수시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중심성에 일일이 의의를 둘 필요는 없겠으나 그 중심성만큼은 유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서 음식이란 주인공 혜원과 어머니, 말하자면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집안의 중심이었던 어머니와 그녀가 남긴 음식이 ‘중심적인 취미’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연결고리 혹은 기둥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 영화에서 음식이란 그녀의 자아, 주체성을 뜻하는 것이며 이때 그녀의 고향 집은 ‘정말로’ 그녀가 주체성을 찾는 장소가 된다. 그 때문에 그녀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친구들은 그녀의 중심 곁에 있으며 정작 그곳에 있어야 할 남자친구가 그녀의 음식을 거절했다는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주체성을 잃게 하는 표지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서 그녀가 남자친구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언급되는 단 하나의 장면이 바로 ‘그’ 거절 장면이라는 것은 아주 합당한 이유가 된다.
앞서 임순례 감독의 발언을 언급한 바가 있는데,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그 장단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인물의 마음, 그 감정선을 아주 간결하게 ‘필요한 만큼’만 치고 빠지는 것에서 평자마다 평이 갈리게 될 듯하다. 과연 일본의 영화처럼 자연이라는 그 풍요로움을 시적인 느릿함으로 표현했어야 했는지 혹은 한국의 영화처럼 자연보다는 인물의 회복 자체에 중점을 둘 것인지에 대한 갈림길이다. 물론 그 두 가지가 모두 표현되기는 하나 어느 쪽에 무게가 실려 있느냐는 뜻이다. 바로 이 부분이 위에서 말하다 만 부분을 잇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차이점, 중점은 일본과 한국의 같지만 다른 점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영화가 요리와 자연 풍경에 중점을 둔다면 한국의 영화는 여주인공의 내면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인물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소모적으로 사용한다는 비판일 수도 있는 이 중점은 사실상 이 영화의 주요 관객층에 하고 싶은 말처럼 보인다.
임순례 감독은 2008년에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를 만든 바 있고 이것은 여성 핸드볼팀을 다루는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와 그 영화는 ‘여성’, ‘비주류’, ‘도피’, ‘관계’라는 점에서 여러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면의 극복과 성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것을 염두에 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단지 느낌에만 불과한 것은 아닐 듯한데, 이 영화는 아주 분명하게 여성 관객들에게 어필할 요소들을 강하게 드러 내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여자 둘 남자 하나의 구도로 시작하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연애 얘기는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라 직접 말해준다. 혜원의 친구 은숙은 재하를 보며 자신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건네지만 혜원은 딱 잘라 거부한다. 실제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인물들의 입을 빌려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연애에 관심이 있는 것은 은숙밖에 없을 것인데도 그녀는 재하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지는 않는다. 마치 이 시골 풍경에 동화된 듯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 셋은 소꿉친구였으니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연애 요소가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연애에서 벗어나고 싶은 해방심리가 기저에 깔렸으니 여성 취향의 반(反) 청춘 영화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어쩌면 <델마와 루이스>의 아주 먼 친척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평범한 소재에 속하며, 여기서 평범함이란 그냥 사람들이 그냥 나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원래 이런 영화가 많이 나왔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평균만큼 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구어도 있듯이 그런 평범함은 요즘에 와서야 한국 영화계가 응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년에 개봉했던 <꿈의 제인>은 바로 그런 평범함에 가까워지려 했고, 이 영화는 어쩌면 우리가 흔히 알던 청춘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으니 ‘여성 취향’이 아니라 그저 반(反) 청춘영화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의 반이란 부정적인 표어가 아니라 비(非)를 뜻한다.
4. <리틀 포레스트>와 청춘의 목소리
그리고 이러한 청춘 같지 않은 대답은 이 영화의 여러 설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분명히 일종의 판타지에 해당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모 연예인이 나오는 프로그램들이나 SNS를 보면 타인이 거니는 자연 풍경은 무척 아름답고 쉬이 접근할 수 없는, 특별한 자만이 출입 가능한 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매체를 보며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그곳, 귀촌 향도를 꿈꾸고는 한다. 시골 태생이 아님에도 시골로 복귀하고자 하는 꿈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시골의 한쪽 면만을 보고 있기에 판단을 보류해야 할 것이다. 마치 부동산 매물 사이트에서 원룸 사진을 보면 좋아 보이지만 직접 가보면 그다지 별로인 것처럼, 그 한쪽만을 본다는 것은 장점 외에는 보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작품 내에서도 그것에 대한 대학 친구들의 짧은 언급, 벌레가 많아 불편하겠다는 것이 나온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혜원은 그녀가 시골에 동경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고향이 그곳이기에 내려간 것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위에서 언급했던 논고를 다시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데, ‘단지 그곳’이라는 것은 유토리 세대의 일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둘은 ‘타인에게는 불편해’ 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편하고 어쩔 수 없는 고향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다시 말해, 일본 영화가 유토리 세대를 겨냥하고 있다는 말과 한국 영화가 그 기조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혜원은 이른바 ‘판타지’ 속 인물이다. 우리가 꿈꾸는 농촌의 환한 면이 아니라 그 고된 역경, 농사짓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에 영화가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소꿉친구 모두가 도시를 버리고 농촌으로 내려와 아주 훌륭하게 농사를 잘 지어낸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농사는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반 청춘 기류가 영화에 흐르고 있는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현실에 반발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반발이란 무언가에 반한다는 느낌보다는 마치 극이 다른 자석들처럼 현실에 둥둥 떠다닌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비자발적으로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그 곁을 빙빙 돌고야 마는 것이다. 마치 유토리 세대처럼, 한국의 청춘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것에 대한 이유는 이 영화의 판타지성이 바로 그러한 자기장을 만들어내어 마치 ‘잃어버린 세계’를 곧바로 보여준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세계, 지구의 중심에는 바깥과는 온도 차도 극명하고 살기 좋은 곳이 있다는 ‘미신’이 있다.
그러한 미신은 입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살기 좋은 곳이 실존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실제로 그러한 곳이 바깥 세계에 없는 것도 아님을 고려해본다면 그 미신은 불합리하지 않다. 실제로 있는 것에 도달할 수 없기에 가상의 표지를 설정해 그곳이 실제 도달해야 하는 곳인 것처럼 뒤덮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위다. 그 가상의 표지가 가상인 줄 알면서도, 애초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곳으로 목표를 두면 영원토록 잡히지 않을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만큼은 마음이 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현실에 지친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불합리해 보이는 행위를 막연하게 ‘불합리’하다고 여길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금 언급해야 하는 재하의 대사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편해” 마음이 편하면 그저 괜찮은 건 아닐까?
이 영화의 논고란 바로 그것으로, 일본과는 약간 다른 상황의 한국의 청춘들이 도피해야 할 장소를 바로 이곳으로 지정하고 있다. 작은 숲이란 청춘이 꾸는 꿈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작은 ‘숲’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이때 그 작은 꿈은 그저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귀촌의 삶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다투지 않고 다투더라도 금세 봉합되고 연애는 하지 않고 아무런 사건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상물의 특성을 띠고 있으며, 어쩌면 이것은 현대 한국일본 사회에서 일상물이 유행하는 것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상물이라는 것이 정말로 우리에게 평범한 일상이 더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을 때 유행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일상의 모습이란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이상향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는다면 이 영화 인물들의 모습에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고 현실에 가깝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 괴리감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형국이 될 것이다.
일단 전자를 살펴보면 이렇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했던 작품의 판타지성이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 혜원의 어머니는 딸의 수능이 끝나자마자 가출해 작중 시점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초반에 언급되지 않고, 그 언급이 담겨있을 듯한 어머니의 편지를 주인공 스스로 구겨버린다. 그러나 인물의 흉터를 지워내는 하얀 겨울이 다가올수록 혜원은 그 편지를 주워 읽게 되며 답장을 하게 된다. 그때 영화는 혜원의 회상을 통해 어머니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성 가장의 모습, 홀로 우뚝선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는 혜원의 왕따사건과 그녀의 성격으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가 그동안 못 해보았던 것을 해본다며 여행을 떠났다고 적힌 편지에서 확실시된다. 이 부분에서 이 영화는 여성 주체의 모습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녀에게 감정을 이입할 이 시대의 청춘 모두에게 출마의 변을 고하고 있다.
바로 그 출마의 변이 이 영화가 일렁이는 현실성을 통해 만들어낸 신기루, 그 괴리감이다. 이 영화에는 분명하게도 자기부상열차처럼 현실과 영화 사이의 간극이 있지만 그 열차의 원리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을 통해 나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른바 자기장, <리틀 포레스트>라는 환상이 일렁이는 마법의 숲은 농촌에도 없고 당신의 마음 속에도 없지만 그 외부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기는 하다. 단언컨대 이 영화에서 시청각적인 촉감이 줄곧 강조되는 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현혹하는 것이리라. <리틀 포레스트>는 동계 올림픽의 스켈레톤 경기처럼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나가고픈 청춘의 마음을 대변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