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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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장례식장의 소리와 곡성이라는 지명. <곡성>은 전자를 택했다. 후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사뭇 다르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장례식장을 가득 메운 소리, 말하자면 공간을 가득 메운 소리다. 따라서 전자의 곡성(哭聲)은 후자의 곡성(谷城)이 있어야만 한다. 공간이 있어야 소리가 있다. 그런데 <곡성>은 후자에서 이루어지는 전자의 이야기다. 종구의 울부짖음, 일광의 굿소리. 공간 밖으로 울려 퍼진다. 영화 밖의 관객에게 전달된다. <곡성>이 가지는 힘은 그것이다. 공간을 담은 영화의 제목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 그것이 틈을 비집는다. 불쾌하든 뭐든 간에. <곡성>을 보며 느끼는 것, 그것을 애타게 부르짖어야 한다는 점. 외면하면 곧 사라지기 때문에. 영화의 제목, 그 이름. 잊지 말아야 할, 잊지 않아야 할 이유. <곡성>에서 곡성은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화장된 고인의 육신처럼 곡성(哭聲)은 허공에 흩뿌려진다. 곡성(谷城)은 신적인 무언가로 해체된다. 작품에서 종구는 딸 효진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다.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달린다. 곡성(哭聲)을 외면하던 종구는 그것이 자신에게 오자 비로소 소리를 낸다. 신음 비슷한 무언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늘어진 소리. 아니면 위기에 내몰린 동물의 소리. 괴성. 곡성(哭聲)을 낸다. 소리는 빛보다 느리지만 빛처럼 주변을 채운다. 소리와 감정, 공포와 현상, 그 부질없는 곡성(哭聲)은 인물 간에 전이된다. 그것을 따라가는 관객은 허공에 손을 뻗는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로 묶어보려 애쓴다. 일식 중의 태양을 보듯이, 장례식장의 소리는 새어나온다. 스크린 밖으로 새어나온다.


종구는 평범한 경찰이다.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밥은 먹고 다니는 불량 경찰이다. 종구에게 곡성(谷城)은 삶의 터전이다. 근무지이자 집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정작 마을 사람들의 이름은 모른다. 이름 세 글자는 알아도(중간에 까먹기도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모른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실존은 알지만 본질은 모른다. 서로 소통하지 않고 소외된 모습은 도시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빌딩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분명 그곳에 있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것, 어쩌면 신과 비슷하기도 한 그것.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음속에, 믿음 위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의 죽음도 그렇다. 얼마 되지 않는 이웃이 죽어나가도 심드렁하다. 그런 종구에게 죽음이 닥친다. 원을 그리며 집으로 다가오던 곡성(哭聲)이 효진에게 온다. 효진은 미친 듯이 울부짖는다. 무엇이 중하냐며 종구에게 따진다. 그 순간 종구는 깨닫는다. 인간은 삶에서 무엇을 중요히 여기는가. 죽음 이전에 삶을 향해 발버둥치기 마련이다. 종구가 외면하던 것은 이제 그를 달리게 한다. 자기 이름 석자를 내보이기 위한 뜀박질. 우리가 익숙히 여기던 것. 이름은 대상을 실존하게 한다. 이름을 불러야 객체로서 다가온다. 군인에게 인식표를 달아주는 것, 혹시 모를 죽음 이후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인식, 실존, 이름. 장례식은 그것이 사라지는 장소다. 망자가 되어 이승을 떠날 때 그것들이 함께한다. 곡성(谷城)은 그곳이다. 세 가지 증명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 우리는 <곡성>을 추모해야 한다. 여기서 추모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스크린 너머로 본다. 기억한다. 부른다. 슬피 운다. 단지 그것이면 된다. 우리는 이름을 안다.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 종구, 효진, 이삼, 박씨 아저씨. 그런데 이름이 없는 두 존재가 있다. 무명과 외지인, 인간보다 우월한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에게 이름이 없다. 단지 그들뿐만이 아니다.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부처님은 왜 부처님일까? 예수님은 왜 예수님일까? 사실 그들에게도 이름은 있었다. 고타마 싯타르타, 나사렛 예수. 신은 이름을 감춘다.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존재,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같이. 그게 바로 곡성(哭聲)이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생전의 이름으로 불리느냐 혹은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리느냐. 작중의 두 신에게는 호칭이 주어진다. 무명은 ‘이름 없음’이 이름이며 외지인은 ‘타지에서 왔음’이 이름이다. 그 뒤에는 <곡성>의 내포한 두 가지가 있다. 이름과 장소, 곡성(哭聲)과 곡성(谷城). 우리가 추모한다는 행위는 전자, 무명을 지지하는 것과 같다. 전자는 후자를 가득 매운다. 작중에서 신출귀몰하게 나타난다. 종구가 거대한 흐름에 휘말리기 시작할 때, 닭이 울기 전에 집으로 달려가며, 박춘배와 힘껏 싸우고 돌아올 때. 또한 곡소리도 여기저기 터져나온다. 일련의 죽음들, 이어지는 곡소리. 곡성(谷城)은 하나의 거대한 장례식장이 된다.


곡성(谷城)이라는 공간을 창조해낸 외지인의 존재는 미지수다. 일본인이라는 것 말곤 주어진 정보가 없다. 심지어 악인지 선인지도 불분명하다. 곡소리를 나게 했으니 악이 아니냐고? 아니다. 사람은 이유 없이 죽는다. 사람이 죽는 것에는 순서도 이유도 없다. 외지인이 행하는 주술들은 그를 절대 악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직접적인 관계는 찾을 수 없다. 단지 의심으로 이루어지는 인과관계다. 우리는 죽음을 의심한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이렇게 데려가십니까.” 누군가의 죽음 앞에 신을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장례식이라는 것은 망자를 떠나보내는 것이지 원망하는 자리가 아니다. 이승의 업을 훌훌 털어놓고 가볍게 저승으로 간다. 그때, 이름은 남겨진다.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은 그렇게 망자를 추모하는 방법이 된다. 그런데 망자를 기억하면서도 신의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신은 신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장례식은 이름을 기억하는 동시에 잊는 장소이다. 잊지 말아야 할, 잊지 않아야 할 이유.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여긴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영화에 현혹되고 만다. 현혹되어 그를 악이라 단정한다. 신의 이름을 잊었기 때문에. 외지인의 이름이 없기때문에. 당연히 외지인이 장례식을 만든 ‘신’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영화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이분법에 따라 규정지었을 뿐이다. 전제부터가 잘못되었기도 하다. 무명은 정말 종구를 돕고 있는가? 무명 또한 이름이 없다. 당연히 외지인과 같은 범주에 넣어야 하며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둘은 이름을 앗아가는 존재다. 그렇게 본다면 외지인과 무명은 한 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익숙히 둘을 갈라놓는 건 이분법이다. 여성과 남성. 내부인과 외지인. 한국과 일본. 각자가 가진 단어는 어느 한 쪽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약하고, 외지인을 배척하고, 한국사람끼리 뭉친다. 영화는 그렇게 무명을 무명(無名)으로 만든다. 단체 속의 개인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거기, 너, 아저씨, 아줌마. 그래서 무명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녀는 이름이 없는 동시에 이름을 앗아가는 무언가가 된다. 마치 장례식처럼, 그곳에서 비롯된 소리는 마을 전체를 휘감는다.


두 존재가 왜 그곳에 있느냐고 묻느냐면 사건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것을 통해 전파된 질병이 마을에 퍼진다. 그 병은 온몸에 두드러기를 일으키고 사람을 광인으로 만든다. 게다가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까지 한다. 그 병은 마을 전체를 떠돈다. 곡성(哭聲)과 함께 떠돈다. 그 사이 외지인이 들어온다. 무명도 온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사실 사건 이전에 그것이 의문이다. 무명이 토속신이라고 추측하는 글에는 그것을 확정 지을 근거가 없다. 삼베만 입으면 한국인인가. 그녀는 산을 타고 넘어왔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어디에서 왔는지다. 그들에게 부여된 이름의 의미가 태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름을 받거나 주거나 둘 중 하나인데, 무명은 주는 쪽일 테고, 외지인은 받는 쪽일 것이다. 동시에 무명은 어느 순간 나타나며 외지인은 확실히 외부에서 왔다. 그러니 적어도 겉으로는 외지인이 저승 쪽에 가깝다. (죽음 후에 이름을 받아갈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승(갑자기 나타난)을 꿈꾸지 저승(외부에서 온)을 원치는 않으니 말이다. 무명은 종구에게 기회를 준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그곳에 가지 마라. 그것을 어긴 종구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때 이름을 지키려던 무명의 노력은 허사에 가깝다. 이승은 그렇게 사라진다. 그런데 저승(외지인)이 딱히 나쁘다고 할 이유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것은 피할 수 없다. 흐르는 시간, 소리, 빛을 막을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이 당연한데 외면하는 것이 희한한 일이다. 그것을 부정하면 곡성(哭聲)을 외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곡성(谷城)이 부닥친 것은 불가역적인 사건이다. 왜? 어째서? 이유는 모른다. 일단 마을에 역병이 돌고 있다는 사실만이 있다. 양 극단에 있는 두 신적 존재는 그것을 관망한다. 마치 인간의 죽음충동을 가지고 힘겨루기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무명은 외지인을 겨냥하고, 외지인은 무명을 겨냥한다. 어느 쪽이 악이느냐고 묻는다면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 간절히 살고자 하는 사람도 있으며 때로는 죽음이 삶보다 나을 수도 있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았다면 그것이 주는 어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왜 삶을 포기하는지 어떨 때 포기하는지. 과연 힘들게 사는 이들을 보며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을 살아갈 능력이 없음에도 계속 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게 보면 삶은 상투적인 단어다. 하지만 의지나 의욕이 없다고 해서 일어설 수 없는 건 아니다. 몸과 마음이 핍진해도 결국 산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행해진다. 종구는 그 사이를 헤매고 있다. 곡성 속에서.


신기하게도 마을 사람들을 저승으로 보내는 외지인은 망자를 이승으로 돌려내고자 한다. 외지인은 춘배를 살려낸다. 비록 영혼 없이 살아나 종구와 일행을 괴롭히지만 떠돌기는 한다. 여기서 의문점. 춘배의 사례를 보면 외지인은 저승에 있으면서도 삶을 되찾아 주는 역할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것일까. 모른다. 알 수 없다. 영화를 설명하려 들면 안 된다. <곡성>은 앞서 말한 것처럼 거대한 장례식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죽음에 관한 건 더더욱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명백해지는 사실이 있다. 외지인이 무명보단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무명은 영화에서 나오는 쇼트도 외지인과 비교하면 적다. 그녀는 항상 뒤에 숨어 몰래 지켜보곤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종구 앞에 나타나 원인 모를 질문을 던진다. 원인도 이유도 없는 질문이다. 앞서 효진이 말했던 것처럼. 하지만 외지인은 최소한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을 한다. 답변도 그렇다. “여행을 왔다.”라는 말의 진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행이 뭔지는 안다. 한마디로 외지인은 무명보다는 사람에 가까운 신적 존재다. 인간처럼 죽음에 가깝다는 점이나 삶의 의지를 보인다는 점이 그렇다. 절벽 아래에 매달려서도, 화를 낼 때도 그렇다. 마지막에 이삼이 악마인지 인간인지를 물을 때 짓던 표정은 그 자체로 인간성을 지닌다. 그것은 감정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신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 마치 무명처럼 신은 항상 인자하다.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언제나 부처님과 예수님은 화폭에서, 마음속에서 웃고 있다. 신이 신인 것은 인간답지 않기 때문이라는 소리인데, 그렇게 보면 외지인은 인간에 가까운 신이다. 인간에 가까우므로 삶(이승)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춘배를 살려낸 것은 욕망에 가깝다.


욕망. 살고자 하는 욕망. 인간은 항상 죽음충동과 함께한다. 죽고 싶다. 죽기 싫다. 양극단에 있는 감정은 어울릴 수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울려진다. 그래서 죽음충동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춘배는 그러한 욕망을 투여받은 존재다. 산 것도 아니며 죽은 것도 아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관장하는 영역에 있지 않다. 이질적이고 경계하게 된다. 그래서 종구와 일행은 춘배를 때려눕힌다. 춘배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친다. 물론 혼자는 아니고 외지인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결국 다시 저승으로 가지만 그렇게 해서 이승으로 와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곡성>은 여지가 많다. 내보이는 맥거핀이 많다. 사실 그것은 삶에서 지나쳐 보내는 무엇이기도 하다. 죽음 이전에 미련은 삶의 맥거핀으로부터 온다. 돌아보면 신경 쓰이는 무엇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아마 <곡성>이 택한 방식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일광이 자동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 <샤이닝>(1980)에서 보았던 그것이다. 관객은 스크린 위에 펼쳐진 누군가의 시선을 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인간은 아닐 테고, 동물도 아니다. 신이다. 그것은 절대자의 시선이다. 절대자, 신은 곡성(谷城)으로 향하는 일광을 주시한다.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굽이굽이 펼쳐진 도로, 이미 곡성(谷城) 자체가 되어버린 존재. 무명과 외지인은 아마 <샤이닝>에서의 호텔처럼 그곳에 박힌 존재다.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외지인은 여행을 왔다는 말로 둘러댄다. 일본인인지도 의문이다.)


춘배는 으슥하고 축축한 종교적 의식을 거쳐 탄생한다. 그가 보여주는 의식은 모두 삶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을 뜻한다. 미련이 남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딱히 할 일이 있어 미련이 있지는 않다. 생존은 모든 생명체의 목표다. 그게 미련이다. 예로, 방안에 붙은 사진을 들 수 있다. 사진은 이름과 역할이 같다. 누군가를 대변하거나 보여주는 것. 어떻게 살아왔는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 말하자면 그의 시간을 온전히 담아낸 그릇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체가 가진 욕망에 귀인 한다. 나를 복제하려고 하는, 자식을 남기려 하는 번식의 의무. 나와 닮은 것을 만듦으로써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것이다. 나는 죽지만 나는 살아간다. 이름은 그렇게 새겨진다. 사진 또한 그렇다. ‘노에마’ 여기에 있었음. 사람은 생각한다. 외지인은 그들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사진을 남긴다. 그래서 그 사진은 영정과 같은 무엇이 된다. 사진을 찍는 것이 저주를 내리기 위한 대상을 찾는다는 말은 어귀가 맞지 않는다. 신은 삶의 어디에도 위치하기 때문에 대상을 찾을 필요가 없다. 소리나 빛은 대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자신에게 오는 그것을 담을 뿐이다. 곡성(哭聲)은 그렇게 전이되고 만다.


종구가 춘배와 벌이는 사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다. 또한 딸이 위협받을 때 종구는 행동한다. 효진은 종구의 딸이다. 말하자면 복제품이다. 이런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흔히 붕어빵과 같다.는 말을 예로 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복제품, 자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종구는 딸이 아니라 자신에게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이다. 효진은 그런 종구에게 말한다. “뭣이 중한디.” 말 그대로 종구는 제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원인도 그렇다. <곡성>에서 원인은 나오지 않는다. 결과를 늘어놓고 어떤 원인이든 갖다 넣어도 어귀는 얼추 맞는다. 그게 영화의 매력이지만 어떻게 보면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릴 때 미화되는 삶의 조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언제나 회상이란 미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빛이 바랜 사진처럼. 다시 말해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두 인물, 외지인과 종구는 사실상 같은 의지가 있다. 단지 누가 누구를 포용하느냐의 차이다. 외지인은 절대자이기에 여러 명을 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구는 아니다. 종구는 제 몸 챙기기에도 벅찬 인간이다. 공무원의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산다. 신이 신인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능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본능은 여러 가지를 뜻한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거나 재물욕을 포기하거나 번식을 포기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대신해 죽었다. 부처님은 만인의 허기를 짊어졌다. <곡성>에서 외지인은 그들의 시간을 보존하려 한다. 죽음 이전에 남겨진 미련을 거두어들인다. 미련은 질질 끌리기에 미련이다. 그것을 매듭짓고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조차 저승으로 향하는 것, 죽음은 막을 수 없다. 죽음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곡성>은 미련의 영화다. 저승 이전의 길목인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그 무대인 곡성(谷城)은 두 가지 존재, 양극단이 부딪히는 투기장이다. 한쪽은 말한 대로 미련을 해결하려는 자인 외지인과 다른 쪽은 미련 덩어리인 무명이다. 그 둘이 존재할 때 비로소 삶은 이어진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삶은 극단으로 향한다. 외지인은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쳐든다. 마치 죽음처럼. 무명은 외지인을 막으려 한다. 정확하게는 지연시키는 것에 가깝다. 무명은 적극적이지 않다. 그때 그의 존재는 미련에 대항하는 의지가 된다. 외지인은 여전히 꿋꿋하게 서 있다. 이제 다시 말해보자. 마을에 죽음(역병)이 닥치자 외지인이 온다(드러난다). 그것은 죽음과 함께 고개를 드는 미련이다. 삶이 절박해질수록 어딘가로 향하는 마음, 이루어내지 못한 것. 마을 사람들이 보내는 염원 같은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계속해서 나타난다. 거대한 장례식(곡성)에서 미련을 쫓아간다.


어딘가에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드는 미련은 마을을 혼란에 몰아넣는다. 그러한 미련이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살기 위해 아무 줄이나 붙잡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시금 일광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놈은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는 그 미끼를 확 물어분 것이여.” 미끼를 던지고 미끼를 물고, 순환은 계속된다. 마을 사람들이 역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수록 외지인의 힘은 커진다. 외지인의 힘이 세질수록 무명의 힘도 커진다. 둘은 서로에 반해 증가한다. 삶이 간절해질 때 미련은 커진다. 미련이 커질수록 삶은 멀어진다. 결국 그것은 미련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죽음을 맞고 나면 미련은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외지인(미련)은 포기하지 않는다. 미련은 미련으로 남아야 미련이다. 종구는 그렇게 미련을 남기며 죽는다.


외지인과 무명이 천상계의 존재라면 그 아래의 일광과 이삼은 인간계의 존재다. 천상계는 우리와 떨어진 심적공간이며 인간계는 현실세계다. 두 세계가 맞닿은 곡성(谷城)은 어느 순간 외부로부터 그들의 삶, 세계로 끌어들인다. 곡성이라는 거대한 죽음의 장소, 일광은 외지인이 펼치는 미련의 세계에, 이삼은 인간들이 내뱉는 한탄의 세계에 있다. 그들은 처음에 발을 내딛기 망설인다. 삶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일광은 그래서 사진을 찍는다. 외지인과는 다르다. 미련이 아니라 미련을 향한 시선이다. 그 시선. 작중에서 신을 보는 건 일광이 유일하다. 일광의 직업은 무당이며 신과 소통한다. 적어도 그만큼은, 내면(천상)에 있는 미련을 볼 수 있다. 마을은 미련으로 죽어간다.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는 둥, 외지인 때문이라는 둥. 영적으로 소통하는 일광과 외지인의 관계는 관념의 영역에 속한다. 그들은 장소로 통한다. 곡성(谷城)은 그들에게 까마귀와 염소, 검은 개를 보낸다.


버려진 것, 익숙하지 않은 것, 항상 그렇듯이 이질감은 그들을 배척하게 한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들을 의심하게 된다. 이미 벌어진 사건 탓을 하며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구속된다. 삶(이삼)은 외지인(미련)을 의심한다. 그런 이삼에게 신부는 말한다. “본인 눈으로 본 거 아니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이미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에 불과하다. 다른 선택지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것에 미련을 둔다. 미련을 둔다. 외지인은 일광을 아래에 둔다.


<곡성>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영화다. 표면적으로도 “내가 악마로 보이느냐?”라고 묻기도 하고 닭이 울거나 악마의 상징들, 검은 동물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종교의 본질은 믿음에 있다. 믿음은 내면에서 온다. 나를 믿는 건 나밖에 없다. 왜냐하면 타인이 자신을 믿음을 확인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개인에게 있다. 그 역할은 주어진 것보다 주는 것에 가깝다. 눈앞에 미끼를 던지고 나아가지만 정작 낚싯대는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다. 무엇도 자신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의존이 아니라 의지다.


종교의 가장 긍정적인 힘은 믿음이다. 영화가 의도한 것은 그러한 부분일 것이다. 종교의 부정적인 것은 배제된다. 아니, 편집으로 사라진다. 영화는 교묘하게 그것을 분리해낸다. 대표적 장면, 일광이 길고 긴 굿을 할 때 효진 – 외지인 – 일광으로 컷을 넘긴다. 효진은 고통스러워한다. 외지인도 그렇다. 그렇다면 일광이 누구에게 굿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영화는 교묘하게 감추어낸다. 그러나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효진과 외지인은 하나임을 알 수 있다. 효진과 외지인을 제외한 사람은 죽는다. 외지인을 따르는 이삼은 산다.


외지인의 그룹은 말한 대로 미련이다. 영화는 개인의 미련을 교차한다. 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해낸다. 일광이 염소에 칼을 치고 나무에 못을 박고, 그다음 컷에 오는 것으로 설명하려 든다. 그러나 그것조차 의심하게 되고 영화가 끝나고도 미련을 남긴다. 어떻게 보아야 할지, 어떤 게 맞는 건지. 이미 영화는 지나갔음에도 생각한다. 따라서 둘 중 누구에게 살을 날렸다고 생각해도 미련이 남기에 둘은 하나다. 종교는 의심하지 않는다. 배제된다.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여러 상징은 맥거핀으로 남는다. 오로지 관객을 위한 것으로만 남는다. 그것은 미련이지만, 작중 인물이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들, 종구와 이삼은 이미 마음속에 믿음이 있다. 외지인이 악일 것이라는 믿음. 무명은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믿음으로 행해진 것은 믿음에 기초하지 못한다. 그 기반, 그 관념은 주변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종구는 장모의 말에 따라 무당(일광)을 부른다. 말하자면 일광은 종구가 휘둘림으로써 태어난 존재다. 반대로 효진은 종구가 무관심하기에 태어난 존재다. 신경 쓰지 않고 지내다 뒤늦게 눈에 띄는 것. 미련이다. 딸이라서, 혹은 몰라주었던 마음이다. 그래서 일광과 효진은 같은 그룹에 속함에도 대립하게 된다.


두 미련은 다른 시선을 지닌다. 하나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적 (사진)시선이고 둘은 붙잡으려 하는 회귀적 시선(굿)이다. 그 시선은 이미 제목에 있다. 거대한 장례식장인 곡성(谷城)은 망자를 붙잡으려 한다. 망자. 혹은 그에 대한 미련. 애초에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항하던 미련. 일광은 인간계에서 신을 매개하며 종구에게 답을 준다. 무명. 이승. 그것에게서 오는 압박. 무명(삶)에 속하든가 혹은 외지인(미련)을 따르던가. 그래서 외지인과 일광은 악마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미련을 향하도록 현혹하는 존재이므로. 그런데 미련을 따르면 미련해진다.


삶. 삶은 현재에 있고 미련을 따르기 위해 과거로 회귀해야 한다. 회귀는 퇴행과 맥락이 같다. 혹은 흐르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행위다. 종구에게는 그것조차 미련을 두어선 안 된다는 믿음, 혹은 미련을 확인하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미련을 남긴 삶은 사라진다. 미련을 두었기 때문에 (과거로 향했기 때문에) 그들이 있을 자리(현재)는 사라진다. 일가족이 몰살당하며 곡성(哭聲)은 없다. 아무도 울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공간과 함께 사라진다. 미련과 함께. 효진은 침묵하고 이삼은 묻는다. “당신은 악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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