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타키타니> 그리고 상실의 시대
<토니 타키타니> 그리고 상실의 시대
바야흐로 '책 안 읽는 시대'다. 유튜브로 대표되는 영상의 시대에 책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그건 책이 영상보다 부피도 크고 수고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북새통의 지하철 안에선 몸 하나 깜짝하지 않고도 볼 수 있는 드라마가 대세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책은 '교양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고, 글자로 내려진 지식의 원천을 습득할 자격이 있는 자의 특권으로 여겨진다. 일주일에 책 한 권 읽는다고 말하면 다들 대단하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무라카미 하루키. 많은 사람이 이 일본 작가의 이름을 안다. 세계 어느 석학들의 저서처럼 하루키와 그의 책은 교양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의 책을 읽었다는 건 아니다. 물론 대다수가 하루키의 책을 읽고 '하루키 월드'에 빠진다. 나머지 중 일부는 '하루키 월드'의 입구에서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포기하기도 하고, 책을 구매하고도 읽을 시간이 나지 않아 '휴업'을 하곤 한다. 그래도 그를 아는 것만으로도 삶의 여유가 있는 것이다.
<토니 타키타니>는 그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영화다. 이미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혹은 그를 모르거나,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 중 한 편을 골라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하루키 월드'의 구현에 충실하다. 누군가 '하루키 월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의 소설 중 하나를 인용하여 "상실의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했다면, 상실감을 스크린 위로 옮긴 <토니 타키타니>를 관람해보는 건 어떨까. 러닝타임도 한 시간여에 불과하다.
소설과 영화는 다음과 같은 대사로 사람들을 마주한다.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로 토니 타키타니였다." 우리는 그 대사를 듣는 순간부터 묘한 이질감을 안게 된다. 첫 번째로, 토니라는 미국식 이름과 타키타니라는 일본식 이름은 어귀가 맞지 않는다. 두 번째로, 그 어귀가 맞지 않는 이유를 추측하며 '고정관념'에 빠진 건 아닌지 스스로 자책하게 된다. 세 번째로, 토니 타키타니는 토니 타키타니일 뿐인데 굳이 그 이름의 '진실'을 파헤치려 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토니라는 미국식 이름과 타키타니라는 일본식 이름
토니 타키타니라는 이름은 마치 기름 같은 것이다. 그는 물로 이루어진 일본 사회에 섞일 수가 없다. 여기가 미국이라면 모를까, 사람들은 일본계 미국인 같은 이름을 가진 그를 신기하게 여긴다. 게다가 진짜 미국인도 아니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일본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토니 타키타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겹쳐져' 있다. 겉으로는 '미국계 일본인'이며 속으로는 '허울뿐인 이름'이다. 그 두 가지 속성은 각각 '반푼이'와 '쭉정이'라는 속어로 표현된다.
두 속어의 뉘앙스에서도 알 수 있듯, 둘 다 '나'를 부정하고 있다. 반푼이와 쭉정이는 완성되지 못한 자신을 의미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처음으로 부여받는 '명사'에서부터 그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감정을 알지 못하며, 끝난 후에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그건 꽤 헛갈리는 부분도 있다. 토니의 이름이 삶을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삶이 이름을 결정한 것인지 모호하다.
그의 아버지 '쇼자부로'는 거리를 유랑하는 재즈 뮤지션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 필요도 없는 아버지의 뒷이야기가 사족처럼 따라붙는다. 전범으로 처형될 뻔했지만 극적으로 살아나 대륙을 유랑하다 고국으로 돌아와 먼 친척뻘인 어머니와 결혼, 왠지 모를 미국에 대한 동경으로 '토니 타키타니'를 낳고 아내를 떠나 보냄. 우리는 토니의 어린 시절이 아버지의 잦은 외출로 외롭고 고독했다는 것만 알면 되는데 말이다. 이것은 영화가 '굳이' 토니의 배경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그 배경을 통해 토니에 대한 고정관념이 심해진다. 우리는 토니의 배경인 쇼자부로로부터 토니에 대한 아무런 해답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이 영화는 상실 이전에 '고정'에 관한 이야기다. 고정'관념'도 포함될 수 있으나 굳이 '관념'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일단 토니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고정되지 못한 존재다. 그럼에도 일본이라는 업보를 지고 태어난 존재다. 쇼자부로는 '전범'으로 몰려 사형당할 뻔했고 그 후속작에 해당하는 게 토니다. 어쩌면 쇼자부로는 억울하게 짊어진 '일본이라는 국가의 업보'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반푼이'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을 수도 있다.
보통 이런 경우엔 그 섞인 국가에 따라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뉜다. 한국에서도 '미국계'나 '프랑스계' 연예인들이 잘나가는 걸 떠올려보자. 물론 그들이 어린 시절 받았던 차별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국가'의 지위에 따라 차별받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미국계 한국인은 미국에서는 차별받고 한국에서는 대우받는다. 그건 미국이 한국보다 국력이 강해서다. 그러므로 혼혈인들의 고국은 명확하게 이분화된다. 같은 민족으로 대우받는 마음의 고향인 한국과, 같은 국민으로 대우받는 물질적 고향인 미국이다. 두 가지를 동시에 취할 수는 없고 어느 하나만 택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피가 섞여 있다. 피는 가장 큰 설득력을 지닌다. 정말 화가 나고 말도 안 되고 보고 싫어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용서되는 것을 떠올려보자. 혹은 이미 희미해진 핏줄을 공유하는 형제국 '터키'나 구소련의 '고려인'들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단지 '한민족'이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호감을 지닌다. 하지만 토니의 경우 피가 이어져 있지 않으며 허울뿐이다. 알맹이가 비어있으니 토니는 국가와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쭉정이처럼 둥둥 떠다닐 수밖에 없다.
결국 토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토니의 성격은 어느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 그 아무것도 아님탓에 토니는 사회로부터 외면받는다. 그건 곧 토니가 사회로부터 외면받는 모두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지만 애써 모른 체하는 사람들, 애써 모른 체하는 사건들, 애써 모른 체하는 시간들. '우리'라는 그룹에 속해 있지만 언제 어디서 사라져도 별 관심이 가지 않는 것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상실'의 시대라기보단 '고독'의 시대가 맞다. 상실은 잃을 것이라도 있어야만 한다. 토니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그건 그가 기름처럼 미끌미끌하기 때문이다.
어귀가 맞지 않는 이유
상실감이 대물림 된다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토니의 아버지는 아내를 잃고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은 돈을 열심히 벌어 토니를 여유롭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으로 표명된다. 그런데 그 여유로움이 집안을 공허하게 한다. 아버지가 집을 자주 비우니 토니는 항상 혼자다. 이때, 감정은 다음과 같이 변화함을 알 수 있다. 상실감-여유로움-공허함. 그리고 그건 끝없이 순화하는 감정의 고리다. 작품을 관람하다 보면 이 세 가지 감정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은 아내와 함께하는 여유의 삶이 된다. 여유로운 아내의 죽음은 공허로의 회귀를 부른다.
'느낄 수 있다'가 아니라 '알 수 있다'이다. 원래 감정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게 분명하지만, 영상의 힘을 빌려 표면으로 구체화된다. 전체적인 연출과 카메라의 구도, 그리고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그건 '스타일'에 의존한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스타일을 빼면 남는 게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된다. 그 스타일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만큼 잘 구현해 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원작의 팬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러한 포인트를 하나씩 짚어가는 것도 재미의 요소다.
이를테면 자꾸만 여백을 강조하는 카메라가 있다. 인물을 화면 중심에 클로즈업한 후에는 필수적으로 '공허함'을 부각하는 장면을 넣는다. 그렇게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며 인물의 상실감은 배가 된다. 마치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주먹을 통해 카메라의 효과를 알아보자. 주먹을 꽉 쥐면 밀도가 높아져 단단하다. 주먹을 쫙 펴면 밀도가 낮아져 부드럽다. 하지만 밀도의 변화뿐 손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인물은 그대로지만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감정이 달라진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공허함의 장면은 초점이 없다. 무언가 거리감이 맞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인물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아주 멀리서 인물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기는 한데 카메라의 바깥에 인물을 배치한다. 그건 마치 정중앙에 있는 '투명한 무언가'를 찍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때 우리는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러한 '무언가' 혹은 '배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투명한 존재와 토니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영화는 단순히 상실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 투명한 존재는 무엇일까.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쇼자부로부터 토니까지 '그'는 있다. 아마 그 투명한 존재란 인간의 곁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무언가일 것이다. 그 무언가의 예를 들자면 죽음이나 기쁨처럼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고리이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게 상실감일 듯하다. 단순히 초점이 엇나가 있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텅 빈 공간을 강조하니, 우리는 그 인물과 공간이 일체화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언제 어디서나 구분 지어지지 않고 나타나니 결국 인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그 말인즉슨 인간은 필연적으로 상실의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다는 뜻이다. 재즈 뮤지션이었던 토니의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안고 모두에게 보이는 무대 위에 섰다. 그때, 그의 상실감은 마치 발가벗겨진 듯 만인 앞에 드러내어 진다. 우리는 그 상실감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이 타인에게 털어놓고 품에 안기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타인에게 털어놓기란 쉽지 않다. 그게 만인의 앞이라면 더욱 그렇다.
영화 외부적으로 볼 때, 이러한 슬픔은 우리가 어떤 사건의 유가족에게 보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 세상은 그들의 슬픔을 만인의 것으로 포장하려 든다.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을 보도하며, 그들의 슬픔은 더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기자들은 유족의 앞에 모여들고 정치인은 얼굴만을 비추러 온다. 그 과정에서 슬픔이 왜곡되는 것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런데도 유가족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왔다는 건, 슬픔이 왜곡되어서라도 수복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 가치가 바로 상실감이나 공백이며, 그건 수복될 수 없기에 더욱 슬프다.
<토니…>는 그것까지 미치지 않는 어딘가를 말하는 영화다. 위에서 언급한 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정관념으로) 생각하는 상실의 사례다. 하지만 그 투명한 존재란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 곁을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 모든 것은 반드시 대칭을 이루기 때문이다. 무언가 얻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편에 잃는 사람이 있다. 당신이 돈을 쓴다면 돈을 받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사랑이든 돈이든 인사든 살아 숨 쉬든, 무언가를 얻는다면 그 반대편에도 '어떤' 일이 일어나는 중이다.
우리는 살아있기에 죽은 사람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죽은 사람이란 생물적으로 죽었다는 것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죽었다'는 건 '잊혔다'라는 것과 같다. 상실이라는 것은 있었다가 없어진 것들에 대한 감정이며, 그것은 '이곳'에 없기에 서서히 잊힌다. 카메라의 중앙에 있는 '투명한 존재'란 바로 그러한 '잊힘'을 뜻하는 것일 테다. 우리는 그 투명함을 곧바로 볼 수 없기에 단지 '느낌'이라는 추상을 통해서만 그를 기억할 수 있다.
토니 타키타니는 토니 타키타니일 뿐
무언가를 상실한 순간부터 그것은 영원히 고정된다. 여기서 그것이란 무언가를 떠올리는 가치이다. 두 단어는 뜻이 유사하지만 지속성에서 차이가 있다. 떠올리다란 사라져 가는 것들, 기억 속 어딘가의 한 시점을 '지금' 이곳으로 되살리려는 행동이다. 반면 기억하다란 지금 잊혀 가는 것을 그것이 기억 저편 어딘가로 사라질 때까지도 계속 붙들어 놓고 있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떠올리다란 기억하다라는 단어를 수식한다. 기억하던 도중에 그 끈이 끊어지는 순간 대상은 '잊혀'진다. 떠올리다란 끊어진 줄을 이어보려는 노력이다. 그건 마치 우물 속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것과 같다.
그러한 수복의 과정이 이 영화에 있다. 영화는 어떤 화자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고,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의 그 인물은 토니도 아니고 토니의 아버지도 아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단지 나레이션이라는 사실 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를 초월한 누군가인데, 그건 영화 내적으로 '신'이고 외적으로는 '관객'이다. 그런데 그가 정말 신이라면 아주 매정한 인물이다. 그저 관찰만 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으니 말이다.
여기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종교에서의 신이 아니다) 원래 신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신이라는 것이 있음으로써 우리가 의지를 얻는다는 게 중요하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신이란 우리를 계속 주시하는 관찰자이다. 그 관찰 속에서 우린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되고, 무언가를 기억해야만 하기도 하며, 어딘가로 향할 용기를 얻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위에서 말했듯이 '투명한 존재'를 뜻한다. 그 존재는 당신의 반대항으로 형성된 것이며, 당신이 정말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다. 즉 개인의 절대적 신념을 뜻한다.
우리는 많은 순간, 매 순간 선택에 놓인다. 회사에 지각해 택시를 타야 한다던가 혹은 회사에 있는데 누군가의 조사를 들었다던가. 그 어떤 선택도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 절대적인 기준을 엇나가거나 선택하는 건 개인의 몫이다. 여기서 방점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가 아니라 '개인의 몫이다'에 찍혀야 한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변할 수도 없다. 그걸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도 변함이 없지만, 그 후의 행보는 '개인의 몫'이다.
영화를 끝까지 본다면 이 영화가 개인의 몫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전지적 관찰자로만 여겨지던 나레이션을 등장인물들이 이어 말한다. 마치 판소리처럼 '하나의 대화를 말하지만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이 작품을 하나의 거대한 판소리, 말하자면 연극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영화 밖의 우리를 아는 듯 자연스럽게 나레이션을 이어받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나레이션을 다시금 이어받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나레이션은 인물의 마음을 설명해주는 것에서 끝났으니, 우리는 그에 대해 답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해결책이든 위로이든 간에 말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상실에 대한 답신이다. 고정된 사실, 고정된 현실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이 영화의 주된 편집이 벽을 스쳐 지나가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물음에 충실한 것이다. 흡사 지하철이나 터널에서 보았던 그 느낌, 두 상황의 공통점은 '앞으로만 가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며 '후퇴'할 수 없는, '고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뒤로 남겨지는 공간은 '상실'과 같은 '여백'으로 남겠지마는, 끝내 기억 속 어딘가로 사라져야 하는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걸 안다. 우리는 그렇게 상실의 시대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