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심점 없이 하나로 뭉치는 사회

by 수차미

1.

대부분의 사람이 할리우드는 몰라도 스티븐 스필버그는 안다. 이때 당신은 할리우드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할리우드도 유명하다는 걸 잘 알지만, 이것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이기에 던진 유머다.

세계 영화는 할리우드에 점령당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건 어쩌면 상업영화를 필두로 한 문화 제국주의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혹시나 당신이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극장엔 미국 제작, 더 나아가 미국 자본이 들어가지 않은 영화는 없다. 그런데 그건 분명 재밌다. 그래서 볼 수밖에 없다.

그 말인즉슨 과장을 더해 세계가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점령당했다는 말도 된다.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E.T>(1982)나 <죠스>(1975)는 안다. 그런데 그건 단순히 영화가 잘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 영화는 여러 매체에서 숱한 패러디로 사용되며 우리의 뇌에 각인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히 영화에 불과하지 않다. 그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아이콘이다. 우리가 김국진이나 핑클을 힙한 연예인으로 기억하던 시대가 있듯이, 모두가 E.T를 따라 손가락을 내밀던 세대가 있다.

문화란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을 따라 천천히 나이를 먹어간다. 우리와 다른 점이라면 문화는 늙지 않는다는 것, 같은 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잊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산다는 건 죽어간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죽어가는 어느 때에,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우리가 얼마나 오래 남아 있을지 한 번쯤은 생각해보게 된다. 기억 속의 우리에겐 '이름 좀 날리던' 학창시절이 있었고, 돌이켜 보아야만 비로소 찬란해진다.

당신이 겪고 즐겼던 그 시절의 문화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허송세월에 불과하다 말하지 않는다. 그 문화는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냈기에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에 서 있을 땐 그것을 잘 모른다. 밖으로 나와 그곳을 바라볼 때 비로소 그 본가를 느끼게 된다.

레디 플레이어 원, 구심점 없이 하나로 뭉치는 사회

2.


IE002307822_STD.jpg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작품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의 미래를 그리고 있고, 가상현실을 주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그 미래는 여타 사이버 펑크 영화들처럼 무척 암울하기 짝이 없다. 비트코인이 주요 발행처가 따로 없듯이, 가상현실로 인해 구심점을 잃은 정부 기능 대다수가 시민에게 이양된 상태다. 마르크스식으로 말하자면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거머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작 생산수단은 노동자에게 가지 않고 누군가에게 노획된다. 영화가 그리는 미래는 사회의 지배자가 공권에서 '돈'권으로 바뀌었을 뿐, 예전과 별반 차이가 없다.

중앙 공권이 없는 곳은 그만큼 통제되지 않는 위법행위가 만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 내에서는 일종의 '작업장'이 기업화된 형태로 등장한다. 시장에서 아이템을 매수하고 그것을 비싸게 판매한다. 일부러 분란을 조장해 아이템을 '사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다. 사람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상 화폐가 현실의 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으니 현실에서 돈을 빌려 가상의 아이템을 산다. 그쯤 되면 대부분 채무이행 능력이 없으니 기업에서는 파산한 사람들을 회사로 데려와 일을 시킨다.

결국 그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와 일탈성이 강조되어야 할 오아시스가 현실의 규약까지 그대로 재현하게 된다. 오아시스는 현실처럼 고달프고, 경쟁해야 하고, 죽음보다 무서운 '파산'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그게 과연 게임에 불과한 것일지 의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영화 속 가상현실 '오아시스'는 사람들의 도피처가 된다. 현실의 빈민들에게 그곳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이것을 '음의 제곱'에 빗대어 말했는데, 허구에 허구가 겹치니 결국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까지만 읽고 무척 영화가 무거울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 영화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미하는 '중'의 대중문화를 한 자리에 때려 박았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캐릭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니 다들 자신이 아는 캐릭터 하나는 영화에서 건져간다. 그런 발견은 영화 내의 영상미와 겹쳐 쏠쏠한 재미를 준다. 어쩌면 그 발견은 자기 삶의 재발견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도 저런 것을 즐기던 젊음이 있었노라고 말이다.

이 영화를 보는 십대 이십대는 현재 자신이 즐기는 게임에서 나온 캐릭터에 열광한다. 오버워치의 '트레이서'나 스타크래프트의 '짐 레이너'가 3초 정도 나온다. 반면 시큰둥한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한 삼십대 사십대는 <백 투 더 퓨쳐>의 애마 '드로리안'과 <아키라>의 붉은 바이크를 보며, 어느덧 주인공과 함께 신나게 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한국식으로 '서브 컬쳐'라고 불리는 '하위문화'가 단지 하위에 불과하지 않다고 말한다. 세대를 불문하고 공감하는 그것이 하위라고 불릴 만한 이유가 없다.

서브는 결코 메인이 될 수 없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하위문화가 반문화의 성격을 띤다는 것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하지만 반문화는 반대쪽에 있다는 것이지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서브 컬쳐가 별 것 아니라고 말하는 주류를 향해 호소한다. 그들이 서브 컬쳐에 보내는 냉소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배척하려는 이분법의 구도다. 그리고 그러한 이분법은 그들이 원래 향유하던 정치, 경제에서 이미 하고 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그들 세계와 우리 세계의 법칙을 이기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대화할 땐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고, 서브 컬쳐를 바라볼 땐 그것이 어떻게 등장하고 인기를 끌게 되었는가를 먼저 따져야 한다. 이분법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영영 사이를 갈라놓는 것으로 여기게 될 때 두 집단의 갈등이 시작되고 만다.

단지 '서브'라는 명칭 탓에 서브 컬쳐가 아래의 것으로 오인받고 있고, 그들은 이곳이 다른 세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게 이기적인 해석인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상 현실의 모토를 이해하면서도, 정치적인 머리로는 하찮은 대중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선거 기간에 시장에 들러 길거리 음식을 맛있게 먹는 정치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들은 어린아이도 아닌데 몸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다. 생각이 미숙해서 몸이 따르지 않는 어린아이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몸과 생각이 일치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불을 뒤집어쓰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일치하는 사람은 무척 올곧은 사람이다. 그리고 올곧은 사람에게 세상을 맡겨야 한다는 것에 누구라도 동의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상 현실이 서브 컬쳐를 사랑하는 이에게 맡겨져야 함을 안다. 영화는 바로 그러한 두 집단의 대립을 보여준다.


IE002307823_STD.jpg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3.

오아시스의 개발자가 죽으며 남긴 유언, 자신이 숨겨 놓은 이스터 에그를 찾을 시 게임의 운영권을 포함한 모든 유산을 물려준다는 말은 무척 달콤하게만 들린다. 세계 2위에서 1위로 올라서기 위해 오아시스를 '인수'하려는 'IOI'와, 인디아나 존스처럼 보물보단 '보물찾기'에 흥미가 있는 주인공 '파시발'이 이스터 에그를 찾아 나선다.

이 영화의 주요 서사는 오아시스를 대중의 것으로 만들자는 주인공 집단과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기업체의 갈등이다. 여러 대사가 그러한 각자의 입장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확대시킨다.

3-1.

기업체의 수장은 "이 일만 끝나면 다시는 접속할 일 없어."라며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는 자신의 사상을 드러낸다. 기업의 채무자들을 모아다 꾸려 놓은 작업장은 마치 거대한 사육장처럼 기능한다. 그들은 게임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현실을 붕괴시켰고 그 대가로 이곳에 감금되었다. 말하자면 통제가 되지 않으니 동물적인 것이며, 그 동물을 조련해 군대로 만드는 게 기업이다.

그것이 게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중독, 몰입, 빈곤, 이러한 단어들이 그러한 상황을 대변한다. 과거에도 게임은 애들 장난이었고, 지금도 포털 뉴스를 보면 '게임 중독은 질병인가?'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메인을 장식하고 있다. 2045년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그곳은 일종의 '디스토피아'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중앙이 무너져 통제되지 않는 상황은 유저를 보호할 수가 없고, 그로 인해 삶이 붕괴하지만 그럼에도 게임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둘 다'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향락인가 생존인가. 취미가 직업이 되는 순간, 더는 취미가 아니게 된다는 우스겟 소리가 있다. 생존을 위해 하는 게임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가 즐기는 게임 중에는 '돈을 쓰기 위한' 것이 있다. 그것은 돈을 쓰는 것에서 나오는 '재미'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돈 많은 직장인'을 타겟층으로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즐거움을 위한 게임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게임을 양산하는 소수 게임사를 향한 풍자이기도 하다.

재밌는 것은 작품에서 이스터 에그를 찾기 위해 꾸려진 기업의 태스크 포스 구성인원들이 모두 '오타쿠'라는 점이다. 마땅히 대체할 단어가 없어서 사용했지만 오타쿠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니다. 게임의 전문가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낫겠다. 어찌 됐든 그들이 무시하는 게임을 위해 게임의 전문가를 영입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무시하는 것과도 손잡을 수 있다는 점. 둘은 그토록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돈이면 다 된다.'와 '배운 놈들이 더 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현실의 정치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이 이스터 에그를 찾는 순간 함께 기뻐하는 '오타쿠'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은 정말로 게임을 순수하게 좋아할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이스터 에그 찾기 게임의 패배자는 기업이 아니라 '게임을 즐기지 못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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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가난하다. 하지만 단지 주인공만 가난한 것은 아니다. 앞서 묘사했던 오아시스처럼 현실 세계도 중앙 권력의 붕괴로 사회 주변부가 사막화되었다. 영화에서는 도시의 전체적인 외관이 묘사되지 않고, 오로지 빈민촌만 화면에 풀숏으로 잡는다. 우리가 여타 SF영화에서 본 듯한 주거지의 모습이지만 다음 숏에서 주인공과 함께 보이는 집안 내부와 외부는 '고작 컨테이너 박스'에 불과하다.

가상 현실은 현실보다 사막화의 속도가 느릴 뿐이다. 어찌 됐든 그러한 격차로 인해 오직 가상 현실에서만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다행이라면 부자나 빈자나 모두 가상 현실에 열광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가상 현실이 익명성과 편의성을 줄지는 몰라도, 그러한 편의성이 자본에 영향받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가상 화폐가 현실의 돈과 교환된다는 사실 또한 현실과 가상 현실이 썩은 종양처럼 고착화 되는 것에 한몫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향락인가 생존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다시금 던져본다. 하지만 질문의 요체가 다르다. 주인공 파시발은 분명 가난한 현실에서 탈피하고픈 마음으로 이스터 에그 찾기에 뛰어든다. 영화가 시작하면 이미 5년 전부터 그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정보가 주어지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의 집에 보이는 신문 스크랩과 가상 현실 내의 정보를 1000번이나 보았다는 것으로 주인공의 노력이 알려진다. 그러니까 기업과 파시발의 게임 시작 이유는 같다. 돈이 그들을 지배한다.

하지만 이스터 에그를 찾기 위한 세 가지 열쇠, 미션은 개발자에 대한 정보로만 알아낼 수 없다. 개발자의 삶에 자신을 대입하지 않고선 이해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게이머끼리의 연대, 혹은 소외자의 연대다.

오아시스의 개발자는 일종의 '오타쿠(미국식으로는 Nerd)'로 굉장히 소심한 성격을 지녔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부터 각종 게임을 비롯한 하위문화를 섭렵한 것으로 나온다. 이때 우리는 은연중에 오타쿠가 하위문화를 즐긴다는 고정 관념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 두 가지를 명백하게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픈 마음과 그 도착지인 하위문화는 버스 정류장처럼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표지가 내용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논리적 오류에 해당한다.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게 된 건 뉴스에 나쁜 정치인만 나오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착한 정치인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분명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도 눈앞에는 나쁜 정치인만이 보이기에 우리는 그 고정관념을 공식으로 확립하게 된다. 하지만 그 틀을 깨야만 더 넓은 시야를 지닐 수 있다. 이를테면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 정도가 있다. 혹은 남자는 치마를 입어선 안 된다는 것이 있다. 분명 길거리에 어떤 남성이 치마를 입고 있다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그건 단지 치마를 입은 남자일 뿐 동성애자나 정신병자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IE002307825_STD.jpg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4.

작품 중간에 스쳐 지나가는 오아시스 개발자에 대한 신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제임스 할리데이는 차세대 스티브 잡스인가?”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이 대사에 작품 전체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첫째는 스티브 잡스가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그가 제임스 할리데이와 정반대의 성격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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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에 대한 언급, 스티브 잡스가 우리에게 남긴 유명한 대사가 있다. “One more thing.” 이것은 스티브 잡스가 자사의 제품을 발표할 때 항상 언급하던 문구다. 지금까지 보여준 게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발표의 마지막이라고 생각될 쯤에 이 문구를 외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항상 예측 가능한 범위 밖에 있었고, 사람들은 그래서 열광했다. 그 예측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건 그만큼 시야가 넓어졌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죽은 지 7년이 지났고 현재의 애플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흥행세다. 그리고 최근 애플이 출시한 아이폰 X의 홍보 문구는 다음과 같다. “The Future is here.” 이 간결한 문구에는 애플의 제품 철학이 온전히 담겨 있다. 늘 새로운 한 가지를 고객에게 선물하려던 잡스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미래’가 아니라 ‘여기’다. 미래가 여기에 있다는 건 현재와 미래가 한 자리에 공존한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제 애플의 유명한 두 문구를 합쳐보자. 예측의 범위를 넘어선 미래가 바로 이 자리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미래인가 현재인가? 이곳에 있다는 점에선 현재이나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선 미래다. 이것이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리는 우리 사회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술발전은 아직 예전 기준에 맞춰져 있는 법과 마찰을 빚는다. 이른바 문화 지체 현상이다. 문화 지체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추세에 뒤쳐지게 되므로 사람들은 문화 지체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요즘의 우리나라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를 몹시 두려워한다. AI와 블록체인과 같은 기술이 자신과 자녀들의 직업을 빼앗을 것이라며 말이다. 그래서 전전긍긍하다 4차 산업혁명에 관한 강의란 강의는 모두 들으러 간다. 그러나 그런 기술과 같은 선상에 놓인 또 다른 혁신인 가상현실에 대해선 일절 관심도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 중에선 가상현실이 우리에게 가장 와 닿는 미래상임에도 말이다. 우리는 이미 <매트릭스>를 통해 아주 공포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렸다. 지금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단지 전기적 자극에 불과할 뿐이라면?


다른 맥락에서의 <매트릭스>는 통제되지 않는 가상현실 기술의 한 면을 그리고 있다. 그곳의 사람들은 가상현실인 것 자체를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나 <레디 플레이어 원>의 사회는 다르다. 삶이 빈곤한 나머지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택권이 주어졌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어떤 면에서는 선택권이 주어진 게 더욱 고통스러울 수 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사실들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마주한 순간의 고통을 이겨내야만 삶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정보를 위한 대가다.


그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현실에 답이 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걸 몰라서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게 아니다. 인지의 범위 안에 있으나 설득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미래가 이곳에 있지만 정작 우리는 그것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상실감이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고통을 이겨내야만 삶을 직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통을 이겨내도 현실은 현실일 뿐이라는 삶의 무게만이 있다. 현실과 가상 둘 다 고통일 뿐이라면 그나마 가상 현실 쪽에 배팅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작품의 사람들이 오아시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왜 개발자를 스티브 잡스에 비유했는지 대략 이해가 갈 것이다. 가상 현실은 전 세계 사람들을 평등하게 한 자리에 불러 모은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우리에게 있어 큰 변혁이다. 모니터를 보며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는 군인이 자신의 행동을 살인이라고 여기지 않듯이, 직접 대면하지 못하면 페이스북 친구들도 그저 데이터 파일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생각도 못 하던 것, 인지의 영역 밖에 있던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게 가상현실이다.


사람은 그 어떤 신기술보다 훨씬 혁신적이다. 사람을 많이 만나보면 알겠지만 세상엔 정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특이한 사람 한 명을 만날 확률이 정말 놀랄 만한 신기술을 발표할 확률보다 크다. 그래서 가상현실이라는 기술은 그 어떤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무섭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그러한 공포를 이겨내고 삶을 직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 파시발의 동료들은 남녀노소 국적마저 다르다. 그리고 파시발이 대항하는 거대 기업의 구성원도 그러하다. 혼자 활동하는 게 더 편하다던 파시발은 작품이 진행될수록 사람의 힘을 믿게 된다. 인적 네트워크를 타고 이어지는 개인의 연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그룹이 되어 거대 기업을 박살 내게 된다.


두 그룹은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같으나, ‘기업’이라는 이름이 구체적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성이 확실한 기업이 뚜렷한 목적이 없는 개인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어느 한 가지에 집착하는 것보단 다양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현 사회의 모습이 거울처럼 영화에 비추어 진다. 결국 미래를 바꾸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IE002307826_STD.jpg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4-2


둘째에 대한 언급, 스티브 잡스는 일생 동안 그다지 좋지 않은 성격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스티브 잡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로 지적하는 사항이다. 그런데 오아시스의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는 무척 소심해서 좋아하는 여성에게 고백조차 못 한 것으로 나온다. 즉 두 사람은 완벽하게 반대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와 제임스 할리데이는 혁신을 일구어냈다는 점에서 같다. 어쩌면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 이 관계가 현실과 가상현실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만들었고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스마트폰은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다. 그것은 기존에 메시지와 통화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던 전파를 정보의 바다로 배가했다. 우리는 이제 컴퓨터라는 방구석의 접속 도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던 정보를 지금 이곳으로 불러오는 효과가 있다. 그런 스마트폰의 보급률이 2016년의 한국을 기준으로 자그마치 91퍼센트에 해당한다. 2년이 지난 지금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품에서 나오는 가상현실 접속기는 흡사 색안경처럼 보인다. VR 글라스는 허공에 떠다니는 전파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다. 이미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던 접속기는 VR 글라스를 통해 시각화된다. 시각은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90퍼센트를 담당하며, 그러므로 시각으로 연결된 세계를 더는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파시발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바타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건 페이스북 프로필 속의 사진이나 카카오톡으로 나누는 대화보다 훨씬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결국 두 사람의 차이점은 시각화다. 우리는 이미 미래에 살고 있지만 단지 <레디 플레이어 원>의 가상현실이 화려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이 미래라고 생각해 버린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들이 겪는 문제는 이미 우리도 겪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 파시발은 “진짜는 진짜 세계에 있다.”라고 말한다. 결말을 장식하기에 이 영화의 모든 메시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영화의 출발선에서부터 그것을 말했었다. 영화는 초반부터 화려한 레이싱 경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지만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이모의 부름으로 현실로 달려가는 파시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곳 현실이 무척 고달픈 곳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한다. 멀리서 보면 어느 SF영화처럼 ‘미래’로 보이는 이 빈민촌은 전체 화면을 잡는 풀숏에서야 컨테이너 박스를 ‘아름답게’ 쌓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럭저럭 살 만한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도 주어진 방이 따로 없어 돌아가는 세탁기 위에서 덜컹거리는 몸으로 빈곤이 시각화된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가상현실 접속기가 멀쩡한 방 한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상현실은 현실의 방을 포기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접속기는 접속 도구로 존재할 때 가장 큰 의의가 있다. 현실과 가상현실의 구분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겪는 고통은 현실과 가상현실을 동일시할 때 벌어진다. 파시발은 실명을 노출해 기업으로부터 쫓기게 되고 아르테미스의 부모는 사채로 아이템을 구매하다 사망하고 만다. 물론 두 사람이 그러한 동일시를 통해 끈끈해졌다는 걸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해답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지 동일시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아마 당신은 전 단락에서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두 세계는 명확하게 분리될 때 가치가 있지만 그럼에도 가상 현실의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선 안 된다. 즉, 동일시하라는 것도 맞고 아니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아날로곤(Analogon)이라 불렀다. 눈앞에 존재하지만 그건 사실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파시발은 현실의 사람이기에 이곳 오아시스에 있을 수가 없다. 이곳에 있는 건 말 그대로 아바타이니 내가 아는 파시발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조종하는 게 현실의 파시발이니 우리는 아바타를 파시발처럼 대해야만 한다.


쉽게 말해 초상화다. 초상화는 망자를 그리고 있으나 이미 이곳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초상화를 볼 때 생전의 고인을 대하듯 한다. 마찬가지로 가상현실은 분명 가상이지만 그 뒤에 사람이 있기에 정말로 현실이 될 수 있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관계가 아니다. 세상에 가득 차 있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단순하다. 티브이 속에 나오는 빈민들에게 동정을 보내지만 쇼가 끝나면 금세 잊고 만다. 뉴스에 나오는 시위대를 보며 왜 저리 화를 내나 싶다가도 막상 자신이 같은 일을 당하면 분노한다. 그건 우리가 어떤 사회문제를 볼 때 그들을 왜 도와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된다. 만연해 있는 그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에 가상 현실이 현실이 된다.


IE002307827_STD.jpg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5.


2010년의 아랍의 봄은 트위터의 140자를 통해 시작되었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주인공 파시발은 개인 방송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 냈다. 두 매체의 차이는 글과 영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기술 발달을 시사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야가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그만큼 시야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5-1.


물론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그러나 본다는 것은 단지 눈을 통한 감각만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같다. 안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보는 사물이 단지 ‘복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원본’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세계에 있고, 우리 눈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마치 신기루와 같다.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보기 위해선 그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단지 눈만 가지고선 사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 다른 정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현대 사회는 바로 그 정보가 큰 가치를 지닌다. 정보의 난립에서 판단 기준을 세우는 건 개인의 신념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보를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몫이다. 많고 다양한 정보를 수용할수록 개인의 판단은 세밀해지고 주장이 확고해진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신의 시야에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현상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 그것이 전부라 여긴다.


이때 자신을 의심해본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자신의 생각에 어떤 반대항이 나올 수 있나. 그렇다면 그 반대항은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다면 왜 그러한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므로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게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장점을 강화하고 약점을 방어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굳이 방어하려 하지 않는다. 방어할 정도로 깊은 타격을 입어본 적 없기 때문이다. 빠르게 소모되는 콘텐츠의 흐름이 공격만을 유도하고 있다. 긴 글이 죽었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글만 죽은 게 아니다. 사람들은 긴 영상도 싫어한다. 정보의 홍수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에게 쉽고 빠르게 전달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웹 드라마나 웹툰과 같은 짧은 분량의 콘텐츠를 간식처럼 소비한다. 이른바 스낵 컬쳐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경계하는 미래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의 주인공 파시발은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느릿하다”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화가 그리는 가상 현실의 전체적인 템포가 빠릿하다는 걸 느낀다. 영화는 현란한 레이싱 게임으로 막을 올린다. 이내 교차로 비추어지는 현실 세계의 플레이어들 또한 빠릿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게임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들의 모습은 마치 좀비처럼 느릿하다. 찰리 채플린이 말하듯, 아침 출근길에 오르는 노동자의 모습은 흡사 온순한 양 떼처럼 보인다.


우리 현대인이 바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오히려 빠릿한 가상 현실이 ‘진짜 세계’처럼 보인다. 이런 면에서 <레디 플레이어 원>은 타 SF 작품과 특이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이버 펑크’로 불리는 SF 장르는 ‘기술만 발달한 채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은’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그래서 디스토피아의 현실이란 득과 실이 공존하고 있다. 기술이 발달해도 돈이 없거나, 발달된 기술이 새로운 범죄에 악용된다. 그러나 ‘오아시스’라는 가상현실은 장점만이 있는 곳이다. 중앙 시스템이 없고 직접 민주주의가 도래한 그곳은 기술로 만들어낸 유토피아다. 파시발은 손짓 한 번으로 외모를 바꿀 수 있고 타고 다니는 자동차 또한 데이터 형태로 소지할 수 있다. 즉 오아시스란 대상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곳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원본은 개인의 머릿속에 있고, 머릿속은 오아시스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가상 현실은 현실을 바탕으로 했기에 결코 본질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상현실의 반대항인 현실은 유토피아의 반대항인 디스토피아다.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 현실 세계란 오히려 사라져야 할 곳이다. 작품의 현실은 ‘실’만이 있다. 그렇기에 존재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현실 세계의 자본 ‘IOI’가 가상 현실에 개입함으로써 ‘실’을 가져오게 된다. 여기-이곳을 보며 저기-그곳을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가상현실이 ‘여기-이곳’이 된다.


IE002307824_STD.jpg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5-2.


말하자면 사람의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는 심신 이원론과 같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면, 몸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의 자아를 복제해서 기계에 넣는다면 그것 또한 우리다. 마찬가지로 가상 현실의 우리는 자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RPG 게임을 할 때 캐릭터 선택 창에 있는 것들을 본다. 몇 개를 키우든 그것은 모두 당신이다.


이때 현실의 우리는 게임상의 캐릭터를 조종한다는 인식이 확실하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현실의 화려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각에 민감한 우리는 그곳을 현실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조종한다는 인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조종의 끈이 끊어진 우리는 가상현실이 현실을 조종하는 역설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분명 가상현실은 현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가상현실이 현실을 조종한다는 건,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과 같다.


현실이 아무리 고달파도 끝내 그것을 외면한다면 자기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자기 파멸을 막기 위해선 현실과 가상현실간의 동기화가 필요하다. 즉 몸과 마음은 하나여만 한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 지어 생각하는 사고가 다시금 현실의 악습을 답습하고 만다. 작중 ‘IOI’의 경영자는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다투는 게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기기만 한다면 이곳에 다시 올 일 없어” 이 대사는 두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고, 현실 사람들이 무너지면 가상 현실 또한 없다는 것을 간과한 사고다.


IOI가 가상 현실을 현실로 바꾸어 놓는 작업은 현실의 빈곤을 가속화 한다. 구체적으로는 ‘하나의 현실로 동기화된 두 곳 모두’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아시스의 시민들은 그제야 두 공간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가상 현실이라는 단어에서 방점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에 찍혀 있던 것이다.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철학의 문구는 심신 이원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현실은 갑갑한 기계 껍질이고 가상은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곳이다. 육체에 갇힌 우리는 오아시스를 새 육체로 삼는다. 그런데 오아시스가 새 육체라면, 우리의 영혼은 다시금 ‘기계 속의 유령’이 되고 만다. 결국 우리는 유령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자신이 그리 쉽게 규정된다는 것에 반발심리가 있다.


게임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게 ‘게임 중독’이라면, 영화가 보여주는 가상현실이란 ‘현실 중독’이다. 바뀌지 않는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미래란 개인의 손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이 허용되는 가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 가상 현실이기에 우리는 오히려 현실에 몰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


미래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다. 거짓말과 같은 가상 현실은 곧 현실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단순히 서브 컬쳐에 대한 향수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성 소수자와 여성 문제와 같은 편견의 표지를 부수어 내는 시대상과, 앞으로의 세상은 게임이 주도할 것이라는 ‘게이미피케이션’의 암시가 있다. 더 나아가서 개인이 공공의 신뢰를 증명하게 되어 중앙 권력이 불필요해지는 미래상을 담고 있기도 하다.


사실 각각 따로 놓고 보면 기존에도 많은 영화가 말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세 가지 하나로 뭉쳐질 때 이 영화가 무척 특별해진다. 영화는 중앙이 사라지고 개인이 선두로 떠오르게 되면, 현실의 인프라가 혼란에 빠질지언정 끈끈한 인적 네트워크는 유지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건 결국 개인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동시에, 만인이 평등하고 익명성의 그늘에 보호받는 ‘오아시스’만이 이상적인 사회상이라 말하는 듯 하다.


결국 이 영화에서 서브 컬쳐는 단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이 아니다. 서브 컬쳐는 누구나 하나쯤은 즐겨본 것으로서 만인을 공감하게 하는 도구다. 말하자면 사랑이나 슬픔처럼 본능적인 것, 영화가 그리는 미래란 본능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게 게임이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비트코인과 같은 탈중앙화를 경계하라는 것일까. 많은 평자들이 여러 관점으로 이 영화를 보겠지만, 그럼에도 개인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만큼은 맞장구를 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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