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는 전쟁영화인가?

by 수차미
IE002320967_STD.jpg 영화 <덩케르크>의 작품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1.

인터넷에 <덩케르크>를 검색해보면 '전쟁 영화'라고 나온다. (그리고 그 앞엔 '놀란 감독이 만든'이라는 수사가 붙는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일부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전쟁영화인가?" 그들은 전쟁 영화에 전쟁이 없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총에 맞아 살점이 너덜너덜해지고 고막이 나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사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영화의 마지막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전쟁에서의 철수는 승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철수는 명백한 승리이지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대사는 전쟁의 상반된 면을 보여준다. 창과 방패처럼, 공격과 방어로서의 전쟁으로 나뉜다. 여기서 공격자는 추축국이고 방어자는 연합국이다. 결국 '철수가 승리다'라는 위의 대사는 다음처럼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조국(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들인 군인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꾸어 말한 대사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돌아갈 '곳'이 있어도 돌아갈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적을 희생한다면 별 의미가 없다. 이것은 법과 제도보다 사람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말하자면 '사람을 위해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밥을 먹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밥을 굶는 게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전쟁터는 '덩케르크 해변'이 아니라 우리의 삶 어딘가일 것이다. 우리는 삶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풍경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전쟁이 그리 단순치만은 않다는 걸 안다. 전쟁이란 국가와 국가 간의 싸움이고 그것을 위해 국민은 희생되어야만 한다.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단위이기 때문에 국민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국가'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전쟁이라는 점이다. 국가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는 국토와 국민과 실효 지배이고, 우리는 일제 시대에 두 가지를 잃고도 국가를 지켜냈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여러 인물의 입을 빌려 반복 언급되는 '집'의 가치를 말해준다.

IE002320968_STD.jpg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2.

그러나 이 영화가 놀란의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놀란의 영화는 항상 '집'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고 이 영화도 그렇다. 이를테면 <메멘토>는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쫓는 남자가 나온다. 즉, 그는 돌아갈 곳이 없는 상태다. 다른 영화 <프레스티지>는 경쟁을 위해 가족을 버리는 두 남자가 나온다. 즉, 그들은 돌아갈 곳을 스스로 제거한다. 그리고 <인셉션>에서는 가족의 품에 안기려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남자가 나온다. 즉, 그는 가족이 자신 삶의 최우선 순위다. 마지막으로 <인터스텔라>는 가족을 구하려 가족을 떠나야만 하는 남자가 나온다. 즉, 그는 가족을 밀어내는 것이 곧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놀란의 영화는 집을 대변한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집인 가족부터, 큰 집인 국가까지 모든 종류의 집을 망라한다. 놀란의 평소 인터뷰나 생활에서도 간접적으로 그것이 드러난다. 분명 그는 가족의 가치를 최고로 둔다. 하지만 어떨 때는 놀란의 그런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족으로의 회귀라는 건 어쩌면 관습과 규약에 얽매인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놀란이 말하는 가족이란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로 정해진 교리와 가치다. 즉, 놀란의 집이라는 건 안정적이고 포근하므로 부동의 가치를 뜻한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반드시' 집으로 향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인터스텔라>에서 쿠퍼를 제외한 나머지 승무원이 어느 순간 스크린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족이 없거나 신봉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쿠퍼는 아멜리아 브랜드 박사가 사랑 탓에 임무를 망쳤다며 비난하지만 끝내 사랑이 정답인 것을 알게 된다. 그 사랑을 통해 시간을 넘어 메시지를 전하고 인류를 구하게 된다. 작중에서 그 부분은 '필연'으로 묘사된다. 그건 마치 가족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이어져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분명 이것은 할리우드가 내세우는 미국적 가치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영화는 '가족과 국가와 종교'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만들어진다. 그건 미국의 주류가 신봉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할리우드 영화의 평균적인 식사장면은 가족끼리 둘러앉은 식탁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국가를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별 이상한 것은 아니다. 분명 50개 주의 연합이라는 건 가족의 가치를 내세우지 않으면 실현하기 힘들다. 조금씩 생각이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는 건 종교가 내세우는 화합의 가치, 혹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필연성이다.

IE002320969_STD.jpg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3.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건, 놀란이 내세우는 가장 큰 신념이다. 우리는 놀란의 영화에서 그것들을 아주 '많이' 보지만 느끼지는 못한다. 긴밀하게 연결된 플롯 때문만은 아니다. 무언가가 있기는 한데 콕 집어 말하기 힘들다. 어리석은 생각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암묵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고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연대(連帶), 표현하자면 고리다.

우리는 놀란의 영화에서 개연성을 찾지 않는다. 놀란의 영화는 개연성이 아니라 필연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처음 볼 때는 모르지만 여러 번 보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대표적으로 <메멘토>의 컷들을 편집해서 선형적으로 붙여보면 그다지 별 내용이 없다. 즉 편집을 통해 만들어 낸 내용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인셉션>은 꿈을 소재로 하지만 정작 꿈이 주요한 진행도구는 아니다. 놀란은 작품 초반에 인물의 입을 빌려 "꿈을 심거나 훔칠 수 있는 도구"라며 규칙을 설정한다. 그 부분에서 관객은 꿈은 조작될 수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된다. 결국 꿈은 조작될 수 있는 것이며 안정적이지 못하기에 진행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보는 건 꿈이 아니라 '꿈을 조작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꿈을 왜 조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남는다. 물론 영화는 그 부분까지 말해주진 않는다. 단지 무의식을 조작하는 게 가장 큰 힘을 가진다며 규칙을 강요할 뿐이다.

놀란의 영화에는 항상 결말 이전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반전이 있다. 그런데 그 반전은 이미 암시되었다. (이게 바로 필연성이다) 놀란이 초반에 설정한 게임의 규칙은 관객의 사고를 졸라매고, 그렇기에 그 틀에서 벗어날 때 반전이 된다. 만약 놀란이 규칙을 설정하지 않았더라면 누구나 흔히 생각해낼 수 있는 진행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얼마나 틀에 박혀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놀란의 영화가 설정한 '한계 내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그건 사고를 규약하고 지배하는 행위다. 그런데 재밌게도 관객들은 그 틀을 가지고 노는 걸 무척 좋아한다.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다.

플롯의 마술사라는 별칭은 바로 그 부분을 뜻한다. 말하자면 마술은 원래 속임수인 걸 알면서도 즐겁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즐겁기만 한 게 전부는 아니다. 청중은 둘 중 하나다. 멍하니 앉아 놀라거나, 혹은 마술의 비밀을 알기 위해 요리조리 무대를 뒤지거나. '무언가 있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라는 게 놀란 영화의 핵심이다. 관객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기보단 없는 것을 있는 척하며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지식의 고리다.

IE002320970_STD.jpg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4.

지식의 고리와 가족의 가치, 이 두 가지가 놀란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상반된다. 지식의 고리는 발전해 나가는 것인데 가족의 가치는 점점 해체된다. 이제 우리는 그 '무언가'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놀란은 그 두 가지를 대비시켜 '어떤' 의미를 생성해 내고 있다.

놀란의 영화에서 가족은 필연성을 띤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족은 필연적이지 않다.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처럼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상실감을 느끼면서도 상실감을 채울 가족을 원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린아이처럼 말도 안 되는 걸로 떼를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놀란의 영화가 가족을 잊지 말라며 관객을 붙들어 매는 것처럼 보인다. 설득력이 강한 놀란의 마술들이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질문들이 새로이 생겨난다. 분명 우리는 <덩케르크>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들은 바가 있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귀환 중인 두 사람이 보이고, 그들은 패잔병으로 불릴까 두려워한다. 정확하게는 패잔병이라 조롱할 '언론'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하던 신문에서 처칠 수상은 말한다.

"전쟁에서의 철수는 승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철수는 명백한 승리이지요… (중략) … 우리나라를 지켜낼 것입니다. 우린 해안가에서, 상륙지에서, 들판과 거리와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놀란이 이 영화에 설정한 규칙을 떠올려 보자. 잔교에서의 일주일, 배 위에서의 하루, 공중에서의 한 시간. 해안가에서, 상륙지에서, 들판과 거리와 언덕에서. 장소와 시간과 개인의 역할이 각각 다르지만 결국 집으로 귀환해야만 한다. 그것들은 <인셉션>에서 말하듯 다른 시간대가 하나의 결과로 응집된다고 말한다. 혹은 <인터스텔라>에서 말하듯 다른 시간대를 사는 이들이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무척 기념비적인 것이다.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의 입을 빌려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조커는 배트맨의 공과 사를 대변하는 두 인물을 각각 다른 장소에 묶어 놓고 한 지점을 폭파할 것이라고 말한다. 배트맨은 고뇌하다가 끝내 둘 다 잃고 만다. 즉, 놀란은 변했다. <덩케르크>에서 놀란은 그 두 가지 모두를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진행시켜 나간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한 남자와 두 아이는 요트를 몰고 덩케르크 해변으로 향하던 중 어느 비행사를 구출하게 된다. 그 비행사는 PTSD에 시달리며 덩케르크 말고 집으로 가자며 선장과 실랑이를 벌인다. 비행사는 실랑이 중에 한 아이를 밀치게 되고 아이는 뇌진탕으로 생명이 위독해진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아이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덩케르크 해변에 놓인 수십 명을 구하는 게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IE002320971_STD.jpg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5.

여기서 '가치'라는 표현은 신중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과 국가 둘 중 어디에 가치를 두는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므로. 하지만 이 영화가 선택한 것은 국가다. 재밌게도 가족이나 국가나 둘 다 집에 해당한다. 가족은 작은 집, 국가는 큰 집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차이가 바로 공과 사다. 같은 목표라도 수행하는 방법은 다르다. 놀란은 그 다름이 잘못된 건 아니라고 말한다. 작품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은 요트 선장처럼 냉철하기도 하고, 잔교의 군인처럼 감정적이기도 한다. 끝내 그들은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다.

이쯤에서 다시금 <다크 나이트>를 떠올려 보자. 하비 덴트 검사는 동전을 튕겨 피해자의 운명을 가늠한다. 만약 희생자가 앞뒤를 맞춰 산다면, 그것은 필연인 걸까? 그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며 자비로운 척 하지만 정작 동전은 양쪽 다 앞면이다. 그러니 기적을 옹호하는 건 아닐 테다. 그는 양쪽 다 앞면인 것도 운명의 범주라며 비웃는다. 그게 놀란의 생각이었다. 신은 모든 걸 미리 정해두었다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영화감독인 그는 영화의 신이니 영화의 모든 것을 정해두었었다.

그렇게 본다면 놀란은 관객을 현혹하는 것에서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놀란은 더는 우리를 앞질러 가지 않는다. 그동안의 작품은 놀란이 이야기의 작용지점을 미리 설계해두고 관객이 잘 따라오도록 편집하는 것이었다. 반면 <덩케르크>는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톱니바퀴들의 나열이다. 영화 속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다른 시간대를 살지만 신기하게도 이야기는 진행된다. 두 대의 비행기가 순차적으로 추락할 때마다 작은 요트가 그들 앞에 나타난다. 살아남은 한 대의 비행기는 잔교의 폭파를 성공적으로 방어한다. 마침내 잔교는 지켜지고 군인들은 해변을 떠난다. 이것은 분명 필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구를 새롭게 반복해본다. 놀란은 가족을 끌어안는 것에서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놀란은 더는 우리를 앞질러 가지 않는다. <덩케르크>는 현실로 이어지는 가족 이야기다. 마침내 가족은 지켜지고 우리는 영화관을 떠난다. 이것은 분명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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