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를 통해 최근 한국사회를 돌아보기

by 수차미
IE002323518_STD.jpg 영화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의 작품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 글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달려온 마블이 결과물을 내놓았다.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다. 그동안 국내외로 마블 영화가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이번 영화도 선 예매로만 백만 명을 넘기며 이례적인 흥행 예고에 돌입했다. 그렇다면 인터넷상에 스포일러가 떠돌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검증이리라. 어떤 검증이냐고 하면 당연하게도 '팬의 마음'이다. 열 여덞 마블 영화를 본 입장으로, 팬의 마음으로 이 영화가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검증해야 한다.

마블 스튜디오의 현 수장 '케빈 파이기'는 이렇게 언급한 바가 있다. "한국은 중국 다음으로 큰 시장입니다." 그에 보답하듯 마블은 내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영화에 한국을 등장시키는 등의 팬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블의 인기는 꽤 이례적이다. 일단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마블 코믹스 원작만화가 인기가 없다. 덧붙여서 <아이언 맨>(2008) 개봉 이전까지는 마블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즉, 마블 영화의 흥행 비결은 코믹스가 아니라 '영화화'에 있다. 마블도 모르고 마블의 캐릭터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블의 영화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화의 힘이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원작과 무엇이 달라졌길래 한국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을까? 세세하게 짚고 넘어가기보단 살짝 간추려 언급해보는 게 낫겠다. 그것은 바로 '현실성'이다. 아마 마블의 원작 팬들이 더 잘 알겠지만. 여러 작가가 하나의 만화를 집필하며 이야기 진행을 위해 자꾸만 캐릭터를 죽였다 살리곤 하니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에 마블은 '현실성' 있게 '세련된' 버전을 내놓았다. 마블 영화 세계관은 바로 이 '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코믹스 버전'에 기반을 두고 있다.

IE002323520_STD.jpg 영화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마블 영화와 현실성

그렇다면 마블 영화 세계관에서 현실성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물론 판타지에 가까운 히어로 영화에서 현실성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이상할 일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단적으로 현실성을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무래도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일 것이다. 부와 명예, 그리고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과학. 충분히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이다. 그가 하는 고민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토니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물질만능주의'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아들 뻘인 스파이더맨(톰 홀랜드 분)을 무시하는 '꼰대' 기질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런 아이언맨은 캡틴 아메리카와 함께 마블 영화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단순히 인기에 기반을 둔 게 아니다. 두 영웅은 신념으로나 캐릭터로나 정 반대다. 아이언 맨이 도구의 힘을 빌려 평범한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 캡틴 아메리카는 신념만 있다면 누구라도 영웅이 될 수 있노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건 꽤 웃긴 일이다. 성조기를 유니폼으로 입고 미국적 가치를 내세우는 캡틴 '아메리카'의 역할은 현 미국의 역할과는 정반대다. 오히려 '막강한 부'를 통해 '과학의 힘'을 빌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정의를 위해 개인의 신변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아이언 맨이 '미국적 가치에' 더 부합한다.

영화는 영화로만 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블 코믹스가 전통적으로 사회적 이슈에 기민하게 대처해온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쪽의 접근도 재밌다.

굳이 따지자면 그들의 신념을 단지 미국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단은 캡틴 '아메리카'니까 미국적 가치를 대변하는 것으로 가정하자. 우리는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미국적 가치의 두 인물이 대립하는 걸 보았었다. 이때 '냉동 인간' 캡틴 아메리카가 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의 수호 정신을 대변하는 걸 생각해본다면, 그 둘의 싸움은 마치 '과거의 미국'과 '현재의 미국'이 서로 치고받는 느낌이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캡틴이 고지식하게 느껴진다는 평이 있었다. 그런데 현시대에는 고지식하게 느껴지는 캡틴이 오히려 정상처럼 느껴진다. 캡틴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주장하는 아이언 맨을 가로막았었다. 캡틴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법보다 행동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을 요즘 맥락으로 되풀이해보자.

죄형 법정주의란 '법은 죄에 우선한다'라는 것이다. 즉, 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다면 죄가 아니요, 죄가 아무리 중해도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이때 당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전의 문구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것이다. 분명 갑갑해 보일 수도 있는 죄형 법정주의지만 득과 실이 명확하다. 일단 득. 죄가 명확하지 않은데도 사람을 구속한다면, 그중에 반드시 억울한 피해자가 나온다. 또한 죄의 집행과 형량이 명확하지 않아 소위 말하는 '인민재판'처럼 흘러갈 위험이 있다. 그리고 실. 손만 뻗으면 해결될 문제를 제도를 개편하고 절차를 거치느라 제때에 풀지 못한다. 그 사이에 범인은 사라지고 문제는 영영 풀 수 없는 것이 돼버린다.

큰 맥락에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도를 위해 사람을 희생하기. 사람을 위해 제도를 희생하기. 제도를 타파하고 인권을 개진한다는 점에서 진보와 보수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니 부끄러워하지 말자. 두 진영은 싸울 수밖에 없고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아이언 맨과 캡틴 아메리카는 양립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시빌 워>를 관람한 관객들이 어느 한 쪽에 편중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당시 SNS를 떠올려 보면 아이언 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등했던 것 같다.

혹은, 현실 세계에서 어느 하나를 택했을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는 현실과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혹은, 편중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그들은 사실 '아이언 맨'의 편이었으면서 '캡틴 아메리카' 편이었노라 거짓말을 한 것일까? 당연히 아닐 테다. 우리는 정치라는 게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안다. 칼 융이 남성이 가진 여성성과 여성이 가진 남성성을 '아니마 & 아니무스'로 지칭한 것처럼, 개인의 정치 성향이란 본질적으로 양쪽에 걸쳐 있다. 단지 어떻게 자라왔고 무엇을 내세울 것인가의 문제인 셈이다.

'어떻게'와 '무엇을'이라는 점이 <시빌 워>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버키 반즈(세바스찬 스탠 분)는 악당 조직 '하이드라'에게 이용당해 아이언 맨의 부모를 살해한다. 그 사실을 안 아이언 맨이 버키를 살해하려 들자 캡틴 아메리카가 막아선다. '자의에 의한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형벌을 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캡틴에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자의였든 아니든 간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결과가 명확하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부모님이라면 더더욱. 분명 그 장면의 묘미는 '이성'을 내세우던 아이언 맨이 부모님 소식에 '감정적'으로 변하고, 반대로 '감정'을 내세우던 캡틴이 '이성적'으로 호소한다는 점이었다.

다시금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려 보자. 건국 이념으로 '자유'를 내세웠던 미국은 더는 자유가 없다. 캡틴이 살던 자유의 시대, 사람을 우선시하던 시대는 갔다. 토니는 대를 위해, 국익을 위해 기계 부품 쓰듯 사람을 다스린다. 마블 영화에서 아이언 맨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건 실제 미국의 행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은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다시금 위대해지고 Make America Great Again' 있다. 그런데 '무엇을' 위대하게 만드는지를 묻는다면 '경제'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람에 관한 건 퇴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경제발전과 인권증진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옛것'인 캡틴 아메리카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IE002323521_STD.jpg 영화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마블 영화와 공동체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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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는 그 고민의 연장선에 있는 듯 보인다. 작품의 주요 악당 '타노스(조시 브롤린 분)는 가히 급진적인 아이언 맨이라 부를 만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신념이란 '먹을 게 부족하면 먹을 사람을 죽이면 된다.'라는 것. 그래서 인피니티 스톤으로 우주의 절반을 없애 나름의 평화를 지키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같은 사상적 맥락을 공유하는 아이언맨과 타노스가 싸우는 모습은 굉장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그건 마치, 아이언 맨 자신이 위험에 빠지자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밀하게 살펴보면 묘하게 다름을 짊어낼 수 있다. 바로 '공동체의 가치'다. 우리는 종종 타인과 갈등을 빚곤 하는데, 그건 사실 우리가 그들을 '포용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말을 통해 회유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동물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니 정치란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대화의 수단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일어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다. '포용해야 할 집단'에서 '나와는 다른 집단'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치 '사랑하는 사람만 눈에 보이듯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그러한 '정보의 선택적인 수용'이 우리의 판단을 한쪽으로 가속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하나의 답 말고는 다른 답을 내지 못하게 된다. 즉, 타노스처럼 된다.

반면 아이언 맨은 상대방과 대화하려 한다. 그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고 그럼에도 꿋꿋하게 신념을 지킨다. 그 과정에서 캡틴과 싸우는 등의 무수한 갈등이 발생한다. 재밌게도 그 갈등이 토니를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며, 우리는 그래서 토니가 짜증 난다. 분명 그는 '밉상'이다. 그러나 '밉상'이지 않다면 어떤 의견도 나오지 않고 그에 따른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마블 영화에서 토니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지만, '소'에 자신이 포함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즉, 그의 행동은 '모두'를 구하겠다는 것에서 귀인 한다. 어쩌면 홀로 모든 걸 떠맡고 희생하겠다는 신념은 비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영웅상이다. 전장터에서 날아온 수류탄에 품에 안고 동료를 구한 군인의 일화를 떠올려 보자. 그의 행동은 이기적이지 않다. 마찬가지로 그런 맥락에서는 토니의 행동도 이기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 그에게 아쉬움과 섭섭함을 느낀다. 그건 우리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미우나 고우나 말이다.

우리가 되 내여야 할 것은 '공동체의 가치'다. 타인을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순간 우리는 문제 해결 능력을 잃게 된다. 말하자면 식탁 위의 밥에는 손을 못 대고 반찬만 먹는 상황이다. 우리가 지금껏 알아본 이런 맥락들은 어쩌면 최근 한국 사회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대표적으로 미투 운동을 들 수 있다. 우리는 미투 운동이 성(性)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그 문제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승계되고 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떠올리는 명제. 제도를 위해 사람을 희생하기. 사람을 위해 제도를 희생하기. 실제 피해자는 거짓 폭로를 한 다른 사람에 의해 피해 사실을 의심당하고, 거짓 폭로자는 권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이 권력이 되기 위해' 폭로한다. 더 나아가서, 그런 불투명성에 지친 사람들은 미투를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여겨 버린다. 즉, '공동체의 가치'에서 배제하고 만다. 결국 문제에 싫증 내며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니 문제는 영영 해결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욕을 먹으면서도 신념을 내세우는 '아이언 맨'이 될 것인지 아니면 무식한 파괴자 '타노스'가 될 것인지 말이다.

서로에 대한 존중, 질서정연한 토론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설파하려는 게 아니다. 찬성이든 반성이든 간에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선택이다. 정치가 싫다고 해서 투표를 거부하면 어떤 대통령도 나오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미투 운동과 같은 사회 문제를 대하는 개인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그로 인한 다툼은 갈등이 아니라 화합에 가깝다. 그러나, 생각 자체를 포기하고 외면한다면 끝내 자신이 포함된 '공동체'가 죽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여담 :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타노스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타노스가 무척 입체적인 캐릭터라는 점이다. 영화는 타노스를 단순한 무법자로 그리지 않는다. 영화상에서 타노스는 '올곧은' 인물로 나온다. 권력에 취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것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긴다. 심지어 타노스는 자신의 딸을 애지중지하는 모습도 보이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다스 베이더가 회개할 때의 느낌이다. 분명 다스 베이더는 악당인데 묘하게 동정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입체적인 인물과는 별개로 사상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언급하면 좋을 듯하다. 타노스는 '먹을 게 부족하면 먹을 사람을 죽이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현실에도 있었다. 바로 '토마스 멜서스(Thomas Malthus)'다. 그는 1798년의 저서 『인구론』을 통해 '멜서스 트랩'을 주장했다. 그 주장의 핵심은 '먹을 게 부족하니 모두가 살기 위해서 생산능력이 부족한 저소득층을 없애야 한다'이다. 그가 대표로 든 사례는 아일랜드 대기근이다. 기아로 사람들이 죽자 오히려 경제가 전보다 발전했다는 것. 물론 지금에 와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기술 발전을 통해 식량 생산량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상은 후에 전체주의의 광풍에 이용되고 만다.

어느 관객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현실성'을 통해 이 영화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조금은 더 재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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