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가 희망을 말하는 방식

by 수차미

이 글엔 작품 전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IE002359838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투니버스


작품의 제작사 가이낙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원제 : ふしぎの海のナディア)는 1990년에 일본의 가이낙스 사에서 만든 39부작 애니메이션이다. 노틸러스호와 네모 선장이 등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하지만 <해저 2만 리>와는 작품 진행이 하늘과 땅 정도로 다르다. 소설 <해저 2만 리>가 잠수함을 타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이야기라면,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블루워터'라는 고대유물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두 집단의 수장 '네모 선장'과 '가고일'을 중심으로 한다. 작품은 이러한 갈등을 배경삼아 '나디아'라는 소녀를 내세우는데, 나디아는 '블루워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다. 말하자면 나디아는 이 작품을 보는 관객과 함께 '블루워터'의 비밀을 서서히 알아가게 된다.

비밀을 알아간다는 작품 서사는 가이낙스가 잘하는 것 중에 하나다. 훗날 가이낙스가 만든 <에반게리온>에서 알 수 있듯, 가이낙스는 여러 신화와 설화를 가져와 이야기를 새로이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다. 말하자면 재창조이며, 모티브를 끌어온 만큼 모티브를 찾아내는 재미를 준다. 이를테면 <에반게리온>은 작품을 한 번만 관람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많았고, 그래서 관객은 작품을 여러 번을 관람하여 의문점을 정리하고는 했다. 그 의문점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떤 결과를 내는지 알아내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관객들이 소위 말하는 '오타쿠'가 되었다. 그 의문을 서로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오타쿠 커뮤니티가 형성되었고, 그 커뮤니티가 훗날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TV 애니메이션은 각 화수마다 기승전결을 분할할 수 있어 '모티브'를 숨겨두기에 용이하다. 그렇다면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가 가이낙스 최초의 TV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작품이 어떤 의의를 갖는지는 무척 당연해 보인다. 이 작품을 만들며 쌓인 노하우가 <에반게리온>으로 이어졌으리라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에반게리온>이 어떤 작품이고 어떤 파급력이 있었는지를 되새겨본다면 그 추측은 더욱 무게를 가진다.

IE002359839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투니버스


이 작품의 완성도가 <에반게리온>에 비하면 떨어지는 게 사실이나(그 유명한 무인도 편을 제하고서…), 모두를 구하려 모두가 희생하는 식의 협동만큼은 <에반게리온>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작품은 선과 악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에 따라 서사를 진행시키지만 나디아를 통해 결국은 모두가 살인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괴물을 이기는 건 괴물뿐이고, 두 집단 모두 괴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건에서 제삼자였던 나디아는 자신이 괴물로 여기던 이들의 '공주'가 되면서 괴물이 되기를 강요받으나, 그것을 뿌리치고는 괴물 모두를 없애 버린다. 블루워터는 '괴물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삶으로서의 현재'를 되살리는 것에 사용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착한 소수가 나쁜 다수를 무찌르는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게 된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이 <에반게리온>에 비해 무게감이 덜하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더욱이, 이 작품은 본래 아동을 위한 것으로 기획되었다가 어른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분명, 어린이 주인공 4인방 (쟝, 나디아, 마리, 킹)을 내세우는 건 아동층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행동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이 어린아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어느 상황에 내쳐져도 의연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작품 속 어른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IE002359836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투니버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어린이 주인공들은 어른들의 축소판 혹은 어린이가 되고 싶은 어른들의 호소처럼 보인다. 일찍 부모를 잃고 홀로 성장했기에 '어린이일 시간이 없었다'고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어른들에게 맞는 말을 해도 애들이 뭘 아느냐고 핀잔을 듣는 것을 보면 젊은 층과 기성세대의 대립이 떠오르기까지 한다.

나디아 그리고 전후 일본

명랑한 소녀의 유랑기로 시작했던 작품이 공중전함의 전투로 이어지리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와 지구를 아우르는 거대한 위협'을 필연적으로 안고 간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별 이상할 것도 없다.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의 악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구와 우주를 지배하려는' 것이어야만 했다. 거기에 SF적인 요소가 조금 혹은 많이 가미되어야만 했다. 지금에 와선 둘 다 사장되어버렸지만 '21세기'에 대한 기대와 '20세기'의 실패를 뿌리치려는 노력이 결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다가올 21세기는 기술로 건국될 유토피아였으며, 지나간 20세기는 '원폭'으로 지어진 디스토피아였다. 말하자면, 그런 작품들 속에서 고도의 기술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당과 그를 저지하는 주인공 집단의 모습은 마치 전후 일본사회의 자기혐오 혹은 극복에 가까워 보인다.

IE002359840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투니버스


일단 이 작품의 설정을 짤막하게 흩어보면 다음과 같다. 240만 년 전, 270여 광년 떨어진 곳에서 날아온 외계인이 지구에 불시착하여 '아틀란티스'를 건국한다. 12,000년 전, 아틀란티스인들이 전쟁으로 자멸한 후 남은 생존자들이 '타르테소스'를 건국한다. 이후 1877년, 타르테소스의 수상이 인간을 지배해야 한다며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유는 인간은 본래 아틀란티스인의 하인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타르테소스의 왕은 이제 지구는 인간의 것이라며 수상에게 반대한다. 그러나 쿠데타가 성공해 타르테소스의 왕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수상은 고대 무기 '바벨탑'을 가동해 시험타격을 하려 한다. 그렇게 고대유물 '블루워터'의 힘으로 이제 막 바벨탑이 가동하려던 순간, 타르테소스의 왕이 블루워터를 가로채 바벨탑이 오작동하고 만다. 그 오작동으로 타르테소스 전체가 폐허로 변해버리고 두 사람은 지구를 방황하게 된다.

두 사람 이름이 길어서 생략하자면 왕은 '네모 선장'이고 수상은 '가고일'이다. 가고일은 아틀란티스를 부흥한다는 뜻으로 '네오 아틀란티스'를 설립한다. '네오 나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여기서 '네오'는 단언 부정적인 뉘앙스다. NEO라는 이름의 철자를 뒤집으면 ONE이 되지만 영화 <매트릭스>에서와는 반대의 의미다. 말하자면, 단 하나라는 뜻의 ONE은 구원자가 아니라 '독재자'로서 사용된다. 그는 독재자로서 아틀란티스의 과학을 신봉하고 아틀란티스 인이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부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제국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독재자 가고일과 그를 따르는 '네오 아틀란티스'의 존재란 당시 일본의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제국을 표방하며 황제를 내세우는 가고일의 발언은 그것이 '제국주의'를 암시함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치뿐만이 아니라 나치를 포함한 추축국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네오 아틀란티스에서 일본제국을 떠올리는 것은 바벨탑이 보여준 거대한 원폭의 이미지 때문이다. 아틀란티스의 고대 병기 '바벨탑'은 크고 아름다운 첨탑인데, 고밀도의 에너지를 쏘아 올린 후 목표에 타격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그것이 타격하는 순간의 이미지는 원폭의 잔해인 버섯구름처럼 생겼다. 게다가 타격 후의 타르테소스는 원폭 후 열로 녹아내린 도시처럼 생겼으며, 피해자들은 녹아서 '증발'하고 생존자들은 열기로 고생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옛 찬란함을 되살린다는 목적으로 가동한 무기가 아군의 저지로 '오작동'하여 나라 전체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전후 일본의 양가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IE002359830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사진에 보이는 것은 가고일 일당이 건설한 바벨탑이다. ⓒ 투니버스


일본제국의 끝이 원폭이었다는 사실을 세계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에 품는 생각은 각자가 조금씩 다르다. 혹자는 그들을 전범이기 이전에 세계 첫 번째 원자폭탄 피해자로 본다. 그래서 핵 위험성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들 전쟁의 업보일 뿐이지만, 전쟁이라는 게 모두가 원해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 보아야 한다.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의 <이 세상의 한구석에>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 미화라는 비판과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조명이라는 상반된 평을 받은 이 영화는 히로시마에 살던 어느 가정을 보여준다. 전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던 주인공이 영화 마지막에 거리에 내걸린 태극기를 보고 우는 장면이 있다. 한국인으로서 조심스럽게 이 부분에 관해 코멘트를 하자면, 작품의 포인트는 '풍족하지 못했던 생활조차 타인을 희생해서 얻은 것'이다. 말하자면 범죄를 저지른 건 수뇌부이지 서민이 아니라고 부정하던 상황에서, 사실은 서민조차 그들에게 동조했음을 깨달았으니 더는 원망할 곳이 없는 것이다.

가해자로서의 일본과 피해자로서의 일본은 그렇게 갈라진다. 나라 한쪽에는 가해자였던 시절을 반성하며 전쟁범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반대편에는 원폭을 근거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때,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원폭의 상징인 '바벨탑'을 두고 갈라지는 두 집단을 떠올려 보면 예사롭지가 않다. 바벨탑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가고일은 원폭이 '힘'이 된다는 쪽이며, 가고일을 막으려는 네모 선장에게 바벨탑이란 '무고한 희생'을 일으키는 도구다. 말하자면 가고일은 가해자 일본으로써 '원폭'이라는 강대한 힘을 손에 얻으려 하고, 네모 선장은 피해자 일본으로써 '원폭'이 아틀란티스의 분열과 인류의 멸망을 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IE002359834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바벨탑으로 섬 하나가 날아가는 모습이다. ⓒ 투니버스


여기서 사람들이 눈치챘을 만한 사실은 네모 선장을 통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일단 네모 선장은 선조들과는 달리 죄를 저지른 게 없으며 기록을 통해 그들의 역사를 학습한 상태다. 즉, 네모 선장은 역사와는 무관하며 선조들의 만행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가고일의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실수로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된다. 이때, 그가 오래된 우주선을 거두어 잠수함으로 개조하면서까지 가고일에 대항한 것은 그들 자체가 '아틀란티스'의 수혜를 보고 있다는 감정 때문이다. 나라가 멸망한 게 가고일 탓이지만, 사실은 국가에 몸을 담고 있던 자신 탓도 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금 <이 세상의 한구석에>를 떠올려 보자. 가고일이 일방적인 가해자이긴 하지만, 네모 선장도 결국 '피해자이자 가해자'일뿐이라고 이 작품은 말한다.

아틀란티스에서 갈라져 나온 두 집단은 이렇게 일본의 양가감정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일본의 과거를 둘러싼 두 집단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일본의 자기살해이자 과거 계승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끝내 네모가 가고일의 음모를 저지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말하자면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현대'가 '가해자인 과거'를 저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아틀란티스의 고대 힘으로 여겨지던 '블루워터'가 한 사람을 살린다는 점은 '파괴의 힘'이 '생명의 힘'으로 변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고 힘이 사라져 버려 평범한 돌멩이로 변해버리고 만다. 즉, 더는 계승되지 못하니 영영 '생명의 힘'으로 남게 될 것이다.


IE002359828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투니버스


잠수함 그리고 공중전함 노틸러스호

70년대 일본인들에게 사랑받았던 만화 <우주전함 야마토>에서는 옛 일본해군의 가장 큰 전함 '야마토'가 우주로 날아오르게 된다. 정확하게는 바닷속에 가라앉은 야마토를 본뜬 모형이지만 어찌 됐든 야마토다. 그 작품에서 '야마토'는 배임에도 우주를 항해할 수 있는 것으로 건조된다. 건조 목적은 야마토를 타고 '이스칸다르'라는 곳에 가서 방사능 제거장치를 받아오는 것, 야마토의 엔진도 이스칸다르에서 설계도를 보내주었기에 만들 수 있었다. 말하자면 방사능으로 멸망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러 전함을 발진시키는 이야기다. 여기에 착한 외계인의 존재는 덤이다.

<우주전함 야마토>가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작품의 설정은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 영향을 주었다. 일단 가라앉은 배를 공중전함으로 개조한다는 모티브 측면이나 작품 후반부의 전투 장면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가 이어받은 것은 아무래도 '뉴 노틸러스호'가 야마토를 닮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강대한 일본 해군을 상징했던 야마토를 내세운 <우주전함 야마토>가 아주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군국주의에 발을 디뎠던 것을 떠올려 보면,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도 그렇게 보일 여지가 있다.

IE002359841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투니버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네모 선장은 가고일과는 달리 과거를 인정하고 속죄를 비는 인물이다. 그가 군국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질 수 있는 야마토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름으로써, 또한 그것으로 가고일의 '레드노아' 함선을 무너뜨림으로써 군국주의는 자신을 집어삼키게 된다. 아틀란티스를 이길 수 있는 건 아틀란티스의 기술력뿐이라는 네모 선장의 말처럼, 군국주의를 이길 수 있는 건 군국주의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양측이 모두 파멸함으로써 하나의 집단에 두 가지 이념이 대립하는 자아분열 상태가 치료된다. 혹은, 현실의 상황도 같은 방법으로 치료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10년대 이후 일본의 행보는 극우화되어 가는 중이다. 여기서 극우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쪽에 가깝다. 그리고 극우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나라가 불안에 빠졌기 때문이다. '살아야 한다'는 생존의 목소리가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살아남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극우란 겉으로는 '합리주의'의 탈을 쓰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기주의'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살아남기 위해 최선'이라는 이기적인 말 속에는 '다 같이 산다'라는 이타주의 개념이 없다. 말하자면 '최선'이라는 단어에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관념이 들어 있다.

마찬가지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네모 선장은 '노블리스 오블리쥬'적인 모습을 보인다. 타르테소스의 전 국왕답게 자신을 희생해 모두를 살리게 된다. 아주 재밌게도, 앞서 말했던 '최선'의 의미는 이제 반전된다. 가고일이 '살아남기 위해' 모두를 희생했다면 네모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말하자면 가고일은 '단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자신에게 투영한 것이고, 네모는 '단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외부에 투영한 것이다. 그래서 가고일은 "짐이 곧 국가"라는 독재자인 것이고, 네모는 "팀이 곧 나 자신"이라는 리더로서 활약할 수 있었다.

IE002359835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투니버스


이러한 '나와 국가'의 관계는 야마토를 모티브로 한 노틸러스호를 통해 확인된다. 작품에서 네모 선장의 잠수함 노틸러스호는 같은 이름의 공중전함인 '뉴 노틸러스호'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우주전함 야마토>에서처럼 배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게 되는 것인데, 이런 부분에서 '비상의 판타지'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비상의 판타지는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물리적인 것과 '지위의 상승'이라는 심리적인 것을 포괄한다.

이를테면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항공모함'인데, 항공모함이란 갑판에서 비행기를 발진시키는 함선이다. 말하자면 배가 비행기로 바뀌는 '비상'을 상징하며, 그 화력은 단 한 척만으로도 큰 위협을 줄 수 있다. 그러니 그것을 소유한다는 건 전쟁에 승산을 주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보유한 항공모함 4척을 모두 잃게 된다. 그러니 바다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뉴 노틸러스호'의 비상은 항공모함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가고일 일당에게 잠수함이 대파당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적같이 등장한 고대의 함선 '뉴 노틸러스호'는 기적을 기대하는 이들의 바람을 보여준다.

그리고 뉴 노틸러스호는 가고일의 '레드노아'과 정면으로 충돌해 자폭하게 된다. 이때 만약, 노틸러스와 레드노아의 전투에서 해전을 떠올렸다면 그 자폭행위에서 카미카제를 떠올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네모는 모두를 지킨다는 사명으로 홀로 자폭하게 되는데, 그런 부분은 앞서 말한 "팀이 곧 나 자신"이라는 말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네모는 '국가가 곧 나 자신'이라는 카미카제를 한 것일까?

IE002359831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노틸러스 호의 브릿지다.ⓒ 투니버스


당연히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자신을 향한 것이기에 새로운 세기를 여는 것으로 해석된다. 과거의 만행과 과거의 만행을 반성하는 자신이 있다면, 그 두 가지 모두에게서 자유로운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다. 즉, 작품은 태평양 전쟁과 그 결과 중 하나인 카미카제를 끌어와 의미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반전의 메시지를 강화한다. '뉴 노틸러스호'의 기적 같은 등장은 아마도 극우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대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아틀란티스 그리고 과학

아주 재미있는 점은 이 작품에서 네모 선장의 출생과 죽음이 메이지 유신 기간과 얼추 들어맞는다는 점이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과학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 작품이 메이지 유신의 시작과 끝을 보여준다는 점은 무척 의미가 있다.

이를테면 이 작품은 실제 세계와는 다른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온갖 신기술을 관람 중인 소년 '쟝'으로부터 시작한다. 쟝은 비행기를 날리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고, 이후의 서사에서 '비과학'을 지지하는 소녀 '나디아'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는다. 나디아는 네모의 노틸러스를 보며 "과학은 사람 사이에 분쟁을 불러온다"고 말하지만 쟝은 "과학은 인류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과학의 양면을 두고 대립하고 있다.

결국 과학이란 그 자체로 나쁜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에서 노틸러스호와 쟝의 과학지식으로 인물들이 풍요롭게 지내기도 한다. 무인도에 떨어진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쟝의 과학 덕분이라는 나디아의 대사가 있다. 반면 그 반대편에는 과학의 힘으로 신무기를 개발해 노틸러스호를 침몰시키려는 가고일 일당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들보다 과학적으로 몇백 년 뒤처져 있다며 '하등하다'고 말하는데, 앞서 무인도에서 쟝과 나디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과학이란 '문명'의 상징이다. 말하자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일본이 스스로 '문명국'이라고 칭했던 걸 떠올려볼 수 있다.


IE002359837_STD.jpg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한 장면ⓒ 투니버스


그런 맥락으로 볼 때, 작품의 결말에서 네모가 가고일을 격파하는 것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문명국으로 거듭나고 이후 문명의 힘으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을 비판하는 것이다. 아틀란스인의 힘을 각성한 나디아는 "블루노아를 가진 사람은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 대사는 이미 악마가 되어버린 일본제국을 향해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미 악마이기에 남은 선택지는 신이 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외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사실은 현대의 일본인에게 거대한 메시지로 작용한다. '과거의 영광'에 매몰되지 않고 새 시대의 주인인 인류에게 자리를 넘겨주라는 작품의 결말은, 일본제국을 '아틀란티스'에 전후 일본을 '인류'에 빗대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일본 제국 내부의 양심과 비양심의 충돌로도 볼 수 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모른 체하기 어려운 건 '제국'이 현대에 부활했기 때문이다. 아틀란티스처럼 국가가 절멸의 위기에 처하고 과거의 영광이 그리워질 때 '제국'은 고개를 쳐든다.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구호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이름의 이기심인 것처럼 말이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도 현재 진행형이며, 우리나라는 진행 중에 폐단을 끊어냈다. 그 블루노아가 강력한 힘의 원천이자 지혜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것일지 지혜를 추구하는 것일지 고민해보게 된다. 작품에서는 블루노아를 포기하고 한 사람을 살려내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사람이 항상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무엇이든 간에 좋은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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