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된다는 것에 관한 작품, 인터스텔라와 이 영화

by 수차미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


인간과 비인간이 나오는 여러 영화가 있다. 보통 그런 영화는 ‘인간이 아닌 것’을 통해 인간을 논한다. 인간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일들. 혹은 인간이 아니기에 할 수 없는 일들. 이 두 가지로 관객은 공감과 혐오라는 상반된 정서를 끌어안게 된다. 이를테면, <E.T>에서 ‘이티’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을 가졌다. 말하자면 그는, 혐오스럽지만 공감이 가는 존재다. (사실은 귀엽다.) 하지만 정부는 이티를 ‘비인간’으로 규정해 체포하려 든다. 이에 이티는 ‘인간의 것이 아닌 능력’으로 주인공을 탈출시킨다.


우리가 <E.T>에서 얻은 교훈은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한 베타성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자충수였다는 점이었다. 우리에게는,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니 이쪽에서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말하자면, 외계인은 지구인에게 공격적일 것이라는 관념이 선제타격을 만들어 냈다. 착한 외계인과 나쁜 외계인이라는 두 가지 가정에서 눈앞의 베타성으로 착한 외계인의 선택지는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르게 판단했고, 이에 ‘인간성’을 속죄할 기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으로 거론되는 ‘비인간’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먼저, ‘주류’와 비주류’라는 점에서 사회적 소외를 떠올릴 수 있다. 이를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도둑들이 버려진 아이를 주우며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그다음으로, ‘자연’과 ‘인간’이라는 점에서 환경 파괴를 떠올릴 수 있다. 이를테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며 저지른 일을 복구하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인간’과 ‘기계’이라는 점에서 기술사회를 떠올릴 수 있다. 이를테면,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는 인간이 기계가 되었을 때 정신은 둘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묻는다.


여러 번의 물음으로 진부함을 느끼지만, 우리가 여전히 ‘인간성’을 묻는 영화에 흥미를 갖는 이유는 그만큼 ‘비인간’의 종류가 많기 때문이다. 단순히 종류만 많은 게 아니라, 담론의 성격도 여러 갈래로 변형된다. 그 많은 인간성 중에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가 무척 흥미롭게 다가온다.


IE002366898_STD.jpg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미디어캐슬


‘부모’라는 인간성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는 인간성 중에 ‘부모됨’을 묻는 영화다. 작품은 마키아(이와미 마나카 분)라는 요르프족 소녀가 부모 잃은 아이를 거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 아이를 키우고 떠나보내는 게 작품의 주요 서사다. 그러나 이것은 심층적인 플롯이고, 표면적인 플롯은 마을을 침공한 ‘메자테’ 왕국에 끌려간 친구 ‘레일리아(카야노 아이 분)’를 구하는 것이다. 처음에 마키아는 부모가 된다는 것 말고 아무런 생각이 없었으나, 우연히 만난 어릴적 친구를 통해 ‘레일리아’를 구한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게 된다. 영화는 이 두 가지 플롯을 통해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어 낸다.

먼저, 플롯을 분석하기 전에 작품 속 설정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의 종족인 ‘요르프’는 인간과는 달리 수백 년을 산다. 말하자면 판타지 소설에서 인용되는 엘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이별의 일족’이라고 불린다. 수명이 워낙 길어서 다른 동식물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세상과 거리를 두는 둥 무척 폐쇄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외부인을 사랑하는 것은 금물이다. 사랑하는 이가 자신보다 먼저 떠나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베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초월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들은 고대부터 살아왔고, 이미 멸종해버린 다른 종족을 기리며 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스스로를 ‘고대의 존재’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호칭에서 그들의 시간관이 현세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보다 기므로, 인간 기준으로 돌아가는 세상보다 느리게 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것이고, 반대로는 어떤 일이라도 인간보다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땅에 태어나 주어진 시간이 많으니 자신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이들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에게 삶의 여유가 생기면 남을 도울 여유도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그런 여유 속에서 수많은 이별을 보았고, 관찰했다.


그러니 아마도, ‘히비오르’라고 불리는 베를 짜는 것은 주어진 수명을 어떻게 써야 할 지에 대한 그들 나름의 고민으로 보인다. 그들은 히비오르를 짜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데, 요르프 족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히비오르에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히비오르란 물질적으로 마음을 보관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히비오르는 그저 단순하게 메시지만을 품는 게 아니다. 옛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베를 짜던 아라크네는 신의 형벌을 받아 거미로 영생을 살았다. 견우와 직녀 설화에서 직녀는 칠월칠석까지 베를 짜며 기다렸다. 이처럼, 베를 짠다는 건 오랜 시간을 뜻한다. 그러므로, 베를 짠다는 행위에 마음을 전하는 게 합쳐진 ‘히비오르’란 ‘오래된 마음’을 뜻하게 된다.


여기에 동양의 붉은 실 설화를 떠올려 보면 히비오르의 메시지는 강화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붉은 실 설화는 오랜 시간을 뜻하는 베짜기와 결합해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도 쓰이곤 한다. 붉은 실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라면, 이 실들이 한데 엮인 베는 거대한 인연 덩어리이고, 그걸 스스로 완성한다는 건 자신의 힘으로 만든 인연을 뜻한다. 그 인연 덩어리가 바로 인생이기에, 히비오르란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게 된다. 주어진 수명을 이렇게 쓰겠다는, 내 운명이 바로 이것이라는 다짐이 있다.

여기에, 생물과는 달리 베는 수명이 없으므로 망가지지 않는 한 계속 남아있는다. 말하자면, 긴 수명을 사는 요르프 족도 언젠가는 죽지만 히비오르는 사후에도 남는다. 이것은 인간보다 긴 수명을 사는 요르프 족에게도 ‘영원’이라는 개념이 있음을 보여주고, 그들이 믿는 내세적 시간관을 설명해준다. 예를 들어, 히비오르가 후대에 전해져 후손들에게 읽혀진다면 그 히비오르의 주인은 살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이곳에 메시지가 있기에, 그 메시지는 주인의 시간을 초월하게 된다.

이때, 몸은 없어도 마음만큼은 시간을 떠다닌다는 점에서 윤회라던가 환생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자식이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부모는 자식을 통해 ‘윤회’한다고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식이 자신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자식을 키우는 건 자신을 키우는 것과도 같다. 이런 맥락에서 ‘부모됨’이란, ‘내’ 삶의 목표이자 정해진 운명이다. 즉, 영화는 히비오르의 불변성, 영원성, 속박성등을 모성애와 결합하며 ‘부모됨’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마을을 잃고 도망쳐 나온 마키아가 자살을 각오한 와중에 고아가 된 아기를 발견하며 한 대사는 그래서 의미가 깊다. 먼저 당시 상황을 보면, 일족의 과거가 불타는 마을 속 히비오르와 함께 사라졌고 이제 그녀는 운명, 시간, 삶 등이 마을과 함께 사라진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 앞으로의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기도했다. 그런데 이때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아기를 발견한 그녀는 아기에게 ‘아리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이제 네가 나의 히비오르야.”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슨, 도망쳐 나오며 사라진 히비오르를 아리엘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가 아리엘에게 한 말은 앞으로의 삶은 아리엘을 위해 살겠다는 쯤으로 해석된다. 그 다짐은 히비오르처럼 영영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 부모는 영원한 부모라는 것, 부모가 부모 역할을 하는 건 이유가 없다고, 그리고 이 모든 건 시간 아래에 정해져 있었다고 말이다.


IE002366899_STD.jpg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미디어캐슬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비인간의 부모관계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유전자를 물려준 것도 아니고 같은 생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가 그와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게 생물종이나 유전자인데, 자녀는 자랄수록 자신과 부모의 차이를 점점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그들 사이에 어떠한 선천적 접점도 찾을 수 없다.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출생의 비밀’, 왜 나는 부모와 다르냐고 묻게 된다. 단지 자신을 키워주었다는 후천적인 접점만이 있다.

이때, 이 후천적인 접점은 그들이 시간을 공유했기에 생성된다. 이를테면, 친구와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느냐에 달렸다. 즉, 친구는 처음부터 친구가 아니었다. 그리고 부모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모와의 유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느냐에 달렸다. 즉, 부모는 처음부터 부모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부모관계에서 생물학적 동일성과 같은 ‘선천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도 부모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마치, 입양한 아이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때, 이 시간의 공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부모관계는 성립하기 힘들다. 기러기 아빠가 아이와의 관계에서 어색함을 겪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테면, 호소다 마모루의 <괴물의 아이>에서 주인공 ‘큐타’는 부모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양부모’를 만나게 된다. 그는 수인 형태의 괴물이었지만 큐타와 시간을 보내며 진정한 아버지로 거듭난다. 그 영화는 큐타가 양부모를 떠나 친부모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끝난다. 말하자면 시간을 함께한 후천적 부모와 생물학적으로 같은 선천적 부모를 모두 품게 된다.

그렇지만 마키아는 둘 다 아니다. 마키아와 아리엘은 요르프와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차이가 있고, 수명의 차이로 모든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한다. 마키아는 아리엘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고, 그 후로도 수백 년을 살 것이다. 말하자면, 시간의 공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키아는 자신이 제대로 된 부모가 아니라며 자책한다. 즉,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바로 마키아가 부모됨을 깨닫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마키아가 시간의 공유를 깨닫는 과정이다.


이 영화의 장점이 바로 그것으로, 기존의 ‘인간-비인간’ 사이의 부모관계를 다루는 작품들과는 달리 시간의 단절을 끌어냄으로써 부모됨이 영속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아기를 발견할 당시 마키아의 나이는 15살로, 갓난아기였던 아리엘이 늙어 죽을 때 그녀의 나이는 100세를 조금 넘긴다. 수백 년을 사는 요르프 족임을 감안하면, 앞으로 주어진 시간이 무척 많으니 흘러가는 시간 아래에 아리엘과의 추억을 잊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늙지 않으므로 시간이 멈추었다 해도 무방한데, 자신 이외의 것들은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흘러가는 시간을 산다. 말하자면, 그들의 긴 수명은 인간과 다른 시간관을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이별의 일족’이며, 그들이 히비오르로 정체성을 확보해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키아의 마음은 아리엘을 발견할 당시 그대로이지만 아리엘과 함께한 시간들은 잊혀진다. 우리가 어렸을 때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면 자세히 답하지는 못해도 좋았다 나빴다 정도는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기억은 후퇴하되 감정만이 남는 이 상황은 내적 시간과 외적 시간이 다른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생각하는 것만큼’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거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거나. 요르프 족은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의 시간관과는 다르고, 이러한 시간의 상대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변의 가치로 여기는 ‘부모됨’이 정말로 절대적인 것인지를 묻는다.

하지만 여기에 보다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부모관계가 시간 공유로 형성되는 것이라면, 시간 ‘자체’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부모와 자녀 사이의 시간이 다르다면 그 관계는 뿌리가 흔들리지 않을까?

이를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는 시간을 거슬러 자녀의 죽음을 먼저 목격한다. 그건 블랙홀이라는 후천적 요소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쿠퍼는 5차원 공간에서 시간을 관통하는 ‘부모됨’을 깨닫았었다. 그래서 쿠퍼는 자식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간이 삶을 관통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시간이 세계에 만연해 있다면 죽은 자식과의 추억도 사라지지 않고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 마키아는 오랜 수명으로 자녀의 죽음을 먼저 목격한다. 그건 종족의 차이라는 선천적 요소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마키아는 히비오르에서 시간을 관통하는 ‘부모됨’을 깨닫았었다. 그래서 마키아는 ‘이별의 일족’임에도 슬픈 이별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이 히비오르처럼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붙잡는 것이므로 죽은 자식을 제 손으로 떠나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건 단순히 시간을 함께하는 게 부모관계를 결정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기존의 논의에 따르면, 어느 한쪽의 수명이 길어 어느 순간 이별을 맞이해야만 하는 이들은 부모관계가 아니게 된다. 그렇지만 이때, 물리적인 시간을 개인의 내면으로 옮긴다면 단절을 피할 수 있다. 이 물리적인 시간의 균열은 아마도 히비오르 천을 만들 때 나타나는 그물 모양일 것이다. 말하자면, 히비오르를 만드는 건 시간의 단절을 메꾸는 행위다. 그래서 히비오르란 영속성을 상징하며, 그것에 부모됨을 투영한 마키아는 이별하지 않는 부모가 될 수 있었다.


IE002366902_STD.jpg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미디어캐슬


이야기가 부모됨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두 가지 플롯을 교차하며 메시지를 전한다. 요르프 족의 복수를 하는 게 표면적인 플롯이고 마키아가 부모가 되는 게 심층적인 플롯이다. 주인공이 마리아인 만큼 심층 플롯을 따라 진행되는데, 각각 갓난아기,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 청년기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파트가 독립된 것처럼 보이나, 매 파트마다 어떤 형식으로든 ‘복수’의 플롯이 개입한다. 말하자면 표면적인 플롯이 심층적인 플롯을 감싸고 있다. 즉, 이 영화에서 복수는 부모됨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다.


마키아의 소꿉친구 크림(카지 유우키 분)은 레일리아와 연인이었는데, 왕국에 레일리아가 납치된 후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중이다. 레일리아는 장수의 피를 왕가에 섞기 위해 납치되었고, 왕자와의 결혼에서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낳은 딸은 요르프 족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왕국과 왕자로부터 버려지고야 만다. 그래서 그녀는 딸을 만나지 못하며,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말하자면 임신과 부모라는 점에서 마리아과 유사한 면이 있고, 또 대비되기도 한다.


마리아가 아리엘을 직접 낳은 것은 아니지만 본인이 원해서 만든 관계다. 죽음의 순간에서 그녀를 구원한 건 아기 아리엘의 울음소리였다. 반대로, 레일리아가 낳은 딸 메드멜(쿠노 미사키 분)은 본인이 원해서 만든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구하려 온 이들을 따라가지 않은 것도 메드멜 때문이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그들에게 자식은 운명처럼 찾아왔지만 그 배경이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두 번째, 마리아는 기른 정을 대표하고 메드멜은 낳은 정을 대표한다. 세 번째, 그들이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자식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히비오르로 대표되는 ‘부모됨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것에 사용된다.


말하자면, 어떤 식으로 엮인 부모 관계라도 끝내 부모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찌 됐든 부모는 자식을 위해 살아야만 한다. 설사 그것이 고되고 힘들지라도 말이다. 아마도 영화는 부모됨의 위대함을 말하려 하는 듯하다. 하지만 서사의 연결이 미흡해서 그 메시지가 뻔한 신파로 보일 여지를 남긴다. 마리아가 아리엘을 키우는 과정에서, 각 파트 별로 이야기를 이끌어갈 사건이 일어나지만 앞뒤 맥락을 설명하지 않고 다음 파트로 넘어가 버린다. 이 성급함으로 이야기 사이에 구멍이 생겨 전체를 추측하기 힘들다.


툭툭 끊어지는 듯한 이 작품의 편집은 아마도, 요르프 족의 투쟁과 인간 아이를 키우는 아리엘을 동시에 보여주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결말까지 달려가는 기간이 촉박해서 편집을 투박하게 했다. 그런데 그 편집 사이를 메꾸는 건 인물의 과잉된 감정이다. 전후 사정이 설명되어야만 하는 요르프 족 투쟁 서사와 딱히 설명이 필요 없지만 감정적인 공명이 필요한 아리엘의 부모 서사를 동시에 하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것이다.


이 어중간함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면 아마도 오카다 마리 감독인 듯하다. 오카다 마리는 뛰어난 각본가이지만, 메시지를 먼저 만든 후 인물을 설정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좋게 말하면 뚝심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메시지의 연결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가 각본을 집필한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는 낮은 개연성을 지적받은 바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개연성이 낮다고 지적받을 부분이 많은데, 그 빈틈을 메꾸어 보려는 의도로 만들어 졌을 법한 설정이 있다. 첫 번째는 고대의 존재인 ‘레나토’이고 두 번째는 레일리아의 연인 ‘크림’이다.


레나토는 크고 아름다운 드래곤인데, 왕국에서 전투를 위해 길러지는 중이다. 레일리아는 레나토가 자신처럼 고대의 존재이기에 언젠가 시간 아래에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성에 갇혀 날지도 못하는 겁쟁이라며 비난하는 등 감정 이입하는 모습을 보인다. 레일리아는 자신과는 달리 날개가 있음에도 탈출하지 않는 것을 비난한다. 말하자면 고대의 존재인 레나토는 현세대인 인간에게 통제당한다. 다르게 말해, 크고 거대하고 힘이 센 영광의 과거는 결국 현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선형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가족 담론 또한 건드린다. 가족이라는 것은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늙기 때문이다. 즉, 부모는 결코 자식보다 후대의 시간을 살 수 없다. 그런데 요르프 족 부모는 인간 자식보다 훨씬 오래 산다. 레일리아의 딸 메드멜은 인간에 가까우므로 레일리아보다 먼저 죽을 것이며, 마리아의 아들 아리엘도 마리아보다 먼저 죽을 것이다. 말하자면 레나토는 인간과 비인간의 부모 관계를 설명하도록 삽입된 설정이다.


레일리아의 연인 크림은 연인을 빼앗겼다는 분노와 나라를 잃은 슬픔에 잠긴 인물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살아남아 레일리아를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레일리아는 메드멜을 이유로 거절하고, 이에 크림은 구출이 아니라 복수로 방향을 바꾼다. 그는 요르프 족이어서 오래 사는 만큼, 오랜 복수를 준비한다. 그리고 끝내 왕국에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복수를 달성하는 듯했으나, 함락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크림은 아들과 살던 마리아를 데려와 전쟁 이전까지 보살펴 주는데, 히비오르가 오염됐다며 염색한 머리를 버리고 새로 기를 것을 강요한다. 이때 히비오르가 그들이 삶아온 삶과 운명을 상징하는 것을 떠올려 보면, 크림의 말은 마리아와 아리엘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마도 크림은, 철저하게 과거에 얽매인 존재로서 항상 과거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인간과의 관계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크림은 인간과 비인간은 양립할 수 없음을 말하는 캐릭터다.


작중에서 다섯 마리 남은 레나토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하나둘씩 죽어간다. 그러니 관객은 이야기가 끝날 때쯤에는 모두 죽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 한 마리만큼은 살아남는다. 반대로, 레일리아를 위해 복수의 칼을 갈던 크림은 정말로 어이없게 죽고 만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던 왕국의 멸망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말하자면 죽을 것 같던 레나토는 살아남고, 살 것 같던 크림은 죽고 만다.


이러한 반전은 그들이 가진 메시지를 뒤집는 효과가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부모 관계에서 부모됨이 시간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레나토는 죽을 듯하다가 살아난다. 말하자면 레나토는 후천적인 것을 대표하며, ‘고대의 존재’라는 영속성을 지닌 채로 관계의 성립을 증명한다. 반대로, 인간과 비인간의 부모 관계에서 과거는 과거로만 남겨질 뿐이라고 말하는 크림은 살 듯하다가 죽어 버린다. 말하자면 크림은 선천적인 것을 대표하며, ‘고대의 존재’인 만큼 관계를 품은 채 시간 아래로 사라져 버린다.


IE002366901_STD.jpg 영화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의 한 장면ⓒ 미디어캐슬


글을 마치며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는 전통적 시간관을 반전시켜 부모됨을 묻는다. 히비오르처럼 운명을 말하는 요소가 있으며, 최근에 <너의 이름은>을 보았던 관객이라면 이 ‘실 짜기’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사용되는 소재로, 평소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관객이라면 익숙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운명을 시간의 선형성과 엮어냈다는 점은 참신하며, 낳은 정과 기른 정 담론과 연결되는 부분이 흥미롭다.


그동안 인간과 비인간의 부모 관계를 묘사하는 작품은 ‘종을 뛰어넘은’ 이라는 부분을 주목하곤 했다. 이를테면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는 인간 부모가 ‘늑대아이’를 키우는 이야기인데, 자녀들은 ‘인간’과 ‘비인간’ 중 어느 것을 택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갈림길은 사람의 시간과 늑대의 시간이 분리되는 곳이다. 늑대는 일찍이 독립하기에, 자식이 늑대를 택한다면 그만큼 일찍 보내주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 본능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반면, 이 영화는 그 자연의 섭리를 주인공의 배경으로 옮겨둔다. ‘고대의 존재’인 요르프 족은 자연의 섭리대로 시간 아래에 사라져야만 한다. 그런 기조로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멸망의 순간이 찾아오고, 섭리를 따르려던 순간 삶의 이유를 찾게 된다. 작품은 마리아가 삶의 이유에 확신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 과정은 바로 부모됨을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모됨을 지나치게 신격화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분명, 미흡한 연결고리를 감정으로 메우는 모습에서 모성 만능주의가 보이기도 한다. 혹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야말로 참된 모성이라며 여성관을 악화시킬 우려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는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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