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전뇌코일>에 담긴 과학기술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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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뇌코일이라는 요상한 제목의 애니메이션
<전뇌코일>이라는 요상한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한 건 어느 강의 시간의 일이었다. 강의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디지털 매체’를 주제로 한 발표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 발표는 다른 조가 하고 있었는데, 나는 강의실 맨 앞에 앉아 조용히 경청 중이었다. 약간의 설명을 한 후에 발표자가 나와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세부 주제는 ‘AR이 매체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발표자가 예시로 든 건 <포켓몬 GO>와 <소드 아트 온라인>이었다.
이것들은 널리 알려진 것이어서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시를 소개한 후 이어질 발표자의 해석을 기대했다. 그렇게 약간의 지루함을 안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뇌코일>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발표자는 이 만화가 AR 기술을 배경으로 한다며 아주 짧게 짚고 넘어갔다. 한 5초쯤이었나. 하지만 나는 그 짧고 강렬한 소개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제목과 포근한 느낌의 그림체, 그리고 안경을 AR 기기로 사용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디지털로 꿈꾸는 아이들
<전뇌코일>은 이상한 제목에 특이한 그림체를 한 일본의 26부작 애니메이션이다. 여러 곳에서 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입증했지만 이상하게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추측건대,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작품이 너무 어려 보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등장인물이 모두 초등학생이라는 점과, 그걸 표현해내는 그림체가 아동용처럼 보이기에, 이 작품의 표지만을 두고 본다면 아동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전뇌코일이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내용도 유추가 안 되는데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면 더더욱 손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었고 애니메이션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다가올 미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도 SF 소재를 다루는데,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처럼 까마득히 먼 미래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말하자면, <전뇌코일>이 보여주는 미래는 적어도 우리가 죽기 전에는 손에 쥘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공각기동대>에 못 미치는 작품성이긴 해도 이 작품이야말로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뇌코일>의 주요 배경은 ‘전뇌코일’이라는 AR 시스템이 사회 전반을 운용하는 근미래다. 작품의 제목인 전뇌코일에 대해서는 추후에 언급하도록 하자. 어찌 됐든 이 AR 시스템에 접속하는 도구가 ‘전뇌 안경’이다. 이 안경을 쓰면 현실 배경 위에 전뇌공간의 사물이 겹쳐 보이게 된다. 마치 포켓몬 GO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안경으로 바라보는 전뇌공간은 정말로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컴퓨터 공간의 데이터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그 증거는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전뇌 안경으로 ‘미사일’ 싸움을 벌이는 등의 놀이를 하는데, 미사일에 맞은 아이들은 무척 아파 보인다. 그 미사일은 안경 속에만 존재하기에 맞아도 아프지 않은 게 정상이다. 혹은 전뇌 펫이라는 가상의 애완동물을 껴안기도 한다. 아이들은 전뇌 펫을 진짜 생물처럼 여기며 애지중지한다. 전뇌 펫 또한 주인에게 강한 충성심이 있어 작품 진행의 주요한 소재가 된다. 재밌는 점은 전뇌 펫이 실제 촉감을 지녔다는 것이다. 전뇌 펫은 실제 동물처럼 병을 앓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말하자면, 전뇌 펫은 안경을 벗으면 현실에 없다는 점 말고는 현실의 애완동물과 똑같다.
어린아이기에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 묘사들은, 아마도 가상 공간이 우리 현실과 얼마나 밀접할 수 있는지를 표현하려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작중에서 의사와 같은 특수 직종을 제외하면 어른들은 전뇌 안경을 쓰지 않는다. 어른들은 전뇌 안경으로 소통하는 아이들을 이해하기는 해도 그저 장난감쯤으로 치부한다. 전뇌 안경을 쓰지 않은 사람에게는 전뇌 영역이 보이지 않으니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뇌 안경은 ‘현실에 없는 걸 구현한다’는 점에서 ‘상상’의 영역이다. 그게 바로 아이들만이 전뇌 안경을 쓰는 이유다.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어른보다는 덜 현실적이기에 전뇌 안경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 반면 어른들은 늘 현실을 마주하며 살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지고 눈앞에 보이는 게 아니라면 쉽게 믿지 않는다. 굳이 전뇌 안경을 쓰지 않더라도 ‘전뇌 공간’은 도시의 교통 체계를 정리하는 등의 ‘현실’을 보여주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전뇌 안경은 단순히 어른과 아이를 가르는 묘사에 지나치지 않게 된다.
현실 세계 어른이 보기에, 허공에 손을 휘휘 젓거나 아무것도 없는 곳을 피해 도망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무척 한심해 보일 것이다. 말하자면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무것도 없는 걸 꾸며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건 단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어른들도 전뇌 안경을 쓴다면 아이들이 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전뇌 안경을 쓰지 않는다. 어른들은 전뇌 안경을 단지 장난감쯤으로 취급하며 아이들의 귀속품으로 여긴다. 다시 말해,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렇게 어른과 아이가 소통되지 않는 모습은 온라인 게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른들은 게임을 장난쯤으로 여기지만 아이들은 게임 속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아날로그 세대인 어른에게 온라인 공간은 새롭게 창조된 것이고 적응해야 하는 곳이지만, 디지털 세대인 아이들에게 온라인 공간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어서 무척 익숙하다. 말하자면 이 아이들은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다.
그리고 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은 ‘밀레니엄’이라는 말로도 칭해지곤 하는데, 2000년대를 기점으로 온라인 공간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꽤 많이 나와서 지금의 우리에겐 ‘디지털 네이티브’가 무척 익숙해졌다. 이를테면 <디지몬 어드벤쳐>는 선택받은 아이들이 디지몬 세계로 떠나는 이야기이고 <썸머 워즈>는 아이들이 가상 공간을 구하는 이야기다.
유식한 독자라면 이 작품들이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어린아이라함은 대략 청소년까지를 지칭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가상공간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건 그들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보통 이런 작품에서 현실 세계는 신호등이나 은행 전산망과 같은 가상 세계의 수혜를 입고 있다. 그래서 악의 무리는 가상 세계를 지배해 현실을 파괴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이 ‘가상 세계’는 현실 세계보다 우위에 있다. 그래서 세상을 구하는 건 늘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다. 오직 어린아이만이 이 가상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아날로그 세대보다 가상 세계를 더 잘 이해하는 게 당연하다. 말하자면 다가올 미래는 어린아이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자, 현실은 상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은 편리하지만 악용하면 큰 위협
그런 맥락에서, 전뇌 공간의 일이 현실처럼 묘사되는 이 작품은 어린아이의 시점이다. 일단 주인공이 어린아이다. 그리고 ‘아이템’의 사용이 게임처럼 묘사되는 것을 보면 SF인데, 그게 마치 마법처럼 보이는 걸 보면 판타지 장르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과학을 보여주지만 ‘마술’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과학과 마법이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전후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과학은 마술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꼽자면 <강철의 연금술사>도 그랬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도 그랬다. <천공의 성 라퓨타>도 그랬고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도 그랬다. 그 논리를 대표하는 말은 “18세기 사람에게 현대의 비행기는 마술처럼 보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소명은 ‘과학은 편리하지만 악용하면 큰 위협’이라는 주제의식으로 연결된다.
이 만화들의 주제의식은 보통 다음과 같은 스토리로 진행된다. 고도의 과학기술을 가진 문명이 있었는데, 자신들끼리 내분이 일어나 세계가 멸망한다. 이후 그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후대에 경고를 전한다. 말하자면 과학은 풍요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재앙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스토리가 일본의 원폭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전쟁 동안에 개발된 기술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했지만 정작 그 편리함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아이러니를 비판한다. 지금까지는 사람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수십 발의 총알을 썼다면, 핵의 개발로 단 한 방에 수십만을 죽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핵’은 기술의 정점인 동시에 재앙의 끝이기도 하다.
눈으로 적의 사망을 확인하지 않기에 도덕적인 죄책감을 덜 수 있는 이 무기는 분명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눈이 아니라 스크린 상에 숫자로 표시되는 사망자의 수는 사람의 죽음을 ‘디지털화’한다. 사람의 목숨이 눈앞에 보이는 피비린내가 아니라 컴퓨터 안의 데이터에 불과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컴퓨터라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소통이 편리해졌지만 정작 사람 간의 연결고리는 약해졌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에게는 친절히 대하면서도 인터넷 너머의 사람에게는 거침없이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기술을 악용할 때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하나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짜는 현실에 있다
<전뇌코일>에서도 그 주제의식이 약하게 드러나 있다. 작품에서 전뇌 안경은 아이들에게 세 명중 두 명은 있을 정도로 흔한 도구인데, 어른들은 안경을 쓰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는 마치 전뇌 안경이 아이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른보다는 ‘꿈’을 꾼다는 점에서, 아이들이 전뇌 안경을 쓰는 이유는 ‘꿈’을 꾸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실제로 작품에서 묘사되는 전뇌 안경의 기능은 마치 ‘마법’과도 같으니 ‘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쓰는 전뇌 안경은 ‘꿈’을 꿀 수 있게 돕는 도구이며, 전뇌 안경으로 접속하는 전뇌공간은 꿈의 공간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꿈의 공간에서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어른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반면에, 아이들은 ‘메타버그’와 ‘반짝버그’라는 전뇌물질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메타버그와 반짝버그는 왠지 모르게 작품 상에 주인공이 사는 도시에만 있고, 이 희귀성은 이것이 ‘화폐’로 기능하게 한다. 또한 작품 후반부로 이어지는 ‘무대’로 가기 위한 도구가 된다. 작품에서 아이들은 처음에 이것을 ‘화폐’로서 모으지만 뒤로 갈수록 ‘무대’를 열기 위해 모으게 된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아이들이 전뇌공간에 집착하는 건 전뇌물질을 모으기 위해서이며, 전뇌물질을 모으는 건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결국 ‘전뇌’란 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 꿈은 처음에는 ‘돈’이지만 뒤로 갈수록 달라진다.
그런 흐름 때문인지 이 26부작의 구성에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 차가 확연하다. 전반부 13화까지 이 작품은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데, 각 화가 하나의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13화 이후로 에피소드마다 던져둔 ‘떡밥’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도시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던 여러 소문은 ‘전뇌공간’에서 벌어졌던 실제 일이었고, 아이들은 이제 ‘돈’이라는 물질이 아니라 ‘진상규명’을 위해 힘쓰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 전뇌공간과 현실공간의 가치관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진상규명을 하려 동분서주하는 게 후반부의 이야기인데, 그 과정에서 한 아이가 다치게 되고 이에 어른들은 자식보호를 위해 안경을 빼앗는다. 이를 어른의 관점에서 보면, 닌텐도가 유행이어서 하나 사주었더니 닌텐도를 하다가 아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빼앗는 것과도 같다. 말하자면 어른들에게 전뇌 안경, 전뇌공간은 그저 기술의 일종일 뿐이며 삶을 윤택하게 할 도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안경을 ‘압수’하면서 “진짜는 현실에 있어”라고 말한다. 전뇌펫은 그저 가짜일 뿐이고, 진짜 살아있는 동물은 ‘지금-이곳’에 있다고 말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작품은 기술세계에 사로잡힌 아이들에게 현실로 돌아오라 종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과학은 편리하지만 악용하면 큰 위협’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시 전설이라는 호기심을 위해 편리한 기술을 활용한 대가로 한 아이가 죽었고, 이에 슬픔에 빠져 부모의 말에 동의하는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슬픔’을 느끼는 건 ‘뇌’가 있어서지만, 그 슬픔은 ‘심장박동’을 통해 확인되므로 현실 세계가 ‘진짜’다. 그녀는 이 대사를 통해 현실 세계를 전뇌 세계보다 우위에 놓는다. 지금 이 현실이 없다면 전뇌 세계 또한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심장이 뛰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전뇌 세계를 꿈으로 가정하고 현실 세계를 현실로 가정한다면, 위의 대사는 ‘꿈은 현실을 살아야만 꿀 수 있다’는 것일 테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전뇌 세계로 도시 전반을 통제하는 (신호등이나 증권거래소와 같은) 도시의 성격과는 정반대가 된다. 말하자면 현실 세계는 이미 ‘꿈’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데 어른들은 반대로 알고 있다. 결국 도시를 지배하는 건 현실이 아니라 꿈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어른들의 말은 해답이 되지 못한다. 어른들이 현실을 직시하는 건 도시 전반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이들이 꿈을 꾸며 살아가는 건 이 도시에서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다. 그래서 꿈의 접속기 ‘전뇌 안경’은 오직 아이들만이 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들을 통해 기술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도시전설의 음모를 만들어낸 건 ‘어른’이고 ‘기업’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어른들은 모두 착하지만, 정작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시전설을 만들어낸 어른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착한 사람만이 있고 나쁜 사람은 ‘있기는 하지만 보여주지 않는’다. 이때 아이들이 ‘착한 어른’과 합세해 무찌르는 건 ‘나쁜 어른’이다. 그 나쁜 어른들은 현실이 꿈보다 낫다고 말하며 기업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이 착한 어린이들은 꿈은 현실의 대안이나 망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현실’이라며 목소리를 낸다. 이 전뇌 기술은 꿈의 기술이나 현실의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이제는 일상 속으로 스며든 현실일 뿐이라고 말이다.